제목 | 복야공파(僕射公派) | |||
작성자 | 관리자 [2020-03-09 10:58:3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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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야공파(僕射公派)
대표인물은 전길(佶)이고, 평북 정주군(定州郡)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 전길(全佶) 정선전씨 28세로, 공께서 밀직부사로 재임 시인 고려 고종18년(서기 1231년) 8월에 몽고 태종은 고려국을 침략할 계략을 세우고, 몽고의 장군 살례탑으로 하여금 고려국을 치게하였다. 몽고 장군 원수(元帥) 살례탑이 별군을 이끌고 우리나라 의주 땅에 침범하였을 때, 문무를 겸비한 공께서는 이들 침략자들을 좌시할 수 없어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정신으로 휘하군졸을 거느리고 용약출정(勇躍出征)하여 의주에서 몽고병을 맞아 격전 끝에 몽고군 다수를 살육하고 포로로 붙잡아 크게 전공을 세워 고려국의 위맹을 떨친바가 있었다. 그 후 조정에서 논공행상을 함에 있어 공의 훈공을 인정하고 첨의부좌복야(僉議府左僕射)로 제수하였다.
▷첨의부 고려 후기 중앙의 최고 행정관청으로, 1275년(충렬왕 1) 원의 간섭에 의해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합해져 첨의부로 되었다. 1293년에 도첨의사사로 개칭되었으며, 1356년(공민왕 5) 반원개혁정치의 일환으로 문종 때의 관제를 복구할 때 첨의부가 없어지고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이 각각 복구되었다. 그러나 1362년 다시 합해져 도첨의부로 되었다가 1369년에 문하부로 바뀌었다. ▷좌복야 고려시대에는 백관(百官)을 총관하던 상서도성(尙書都省)의 정2품 벼슬이었다. 상서좌복야의 줄인 말이다. 문종 때에는 상서령(尙書令) 다음가는 차관직이며, 1275년(충렬왕 1) 상서도성이 첨의부(僉議府)로 개편될 때 폐지하고, 1298년(충렬왕 24)에 다시 첨의부에 두었다가 곧 폐지되었다. 1356년(공민왕 5) 상서성이 다시 설치됨에 따라 여기에 다시 두었다가 폐지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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