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등병에서 장군으로 [ 전제현 ] | |||
작성자 | 관리자 [2020-07-09 14:56:4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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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제현
이등병에서 장군으로 ‘보충장교’ 참전이야기 전제현 장군, 6·25 북진·후퇴 야전기 6.25 전쟁에 이등병으로 참전하여 육군 소장으로 전역한 전제현(全濟鉉) 노장군의 전쟁이야기 제목이 특이하게도 ‘보충장교’이다. (비매품, 2016.1.17.) 국군 6사단 소대장으로 북진과 후퇴작전에 참가하고 주월 한국군 사령부 기획참모부장, 보병 11사단장을 역임한 전투 지휘관 출신이 어찌 ‘보충장교’일까.
이등병 입대, 육군종합 3기로 임관 평북 정주 출신인 전 장군은 신의주 동중을 거쳐 오산(五山)중학을 나와 38선을 넘어 육사 8기생에 응모하려다가 충북 제천에서 고등공민학교 교사로 6.25를 만났다. 국군이 후퇴하자 전주로 피난가다 전주중앙국민학교 모병소를 통해 이등병으로 입대, 참전하게 됐다. 당시 국군 7사단(사단장 민기식 대령)이 후퇴길에 전주, 이리, 군산 등지 모병으로 부대를 재건할 때 전제현 이등병은 제7중대(중대장 최진종 중위) 서무계를 맡았다. 전황이 급박해지자 피난수도 부산에서도 길거리 모병을 통해 M1 소총 사격훈련만으로 낙동강 전선에 신병을 보충하던 시기였다. 이때 ‘소모품’으로 불린 소대장이 모자라자 정부가 급히 ‘육군보충장교령’을 제정하고 육군종합학교를 설립, 소모품 소위들을 임관시켰다. 병사들 가운데 구제 중학 졸업 학력을 골라 6~9주간 훈련으로 임관시켜 전선으로 보냈다. 전제현 일등병은 사병근무 전력이 평가되어 6주 훈련으로 육군종합학교 3기생으로 임관됐다. 동기생 소위들은 18세 소년에서 53세 노인까지 뒤섞여 있었고 직업도 교사, 교수, 경찰관 출신 등 다양했다. 신임소위 100명과 신병 900여명이 기차 편으로 영등포를 거쳐 한강 부교를 지나 육본에 신고하자 6사단으로 배속됐다. 신임소위나 신병이나 모두 소모품 보충역 신세였다.
곳곳 혈전 겪고 사단장, 제3사관교장 역임 전 소위가 6사단 2연대 1대대 제1 소대장으로 부임하고 보니 중대장도 생도 1기 조정호 소위였다. 1950년 11월 부대가 북진하여 평남 개천(价川)에 이르자 이미 중공군 참전과 인해전술에 의한 포위공격설이 나왔다. 전 소위가 부임 3일 만에 첫 전투명령을 받고 800고지 기습에 성공하자 상급자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소모품 소위의 첫 전과기록이 너무나 신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덕천에 이르러 중공군 포위망에 갇혀 사흘 만에 겨우 순천으로 빠져나와 추위와 졸음 속에 개머리판으로 병사들을 깨우며 남하했다. 그로부터 동두천, 횡성, 사창리, 용문산 혈전을 통해 전투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 중공군의 압박으로 부대가 횡성, 홍천을 거쳐 사창리에 이르자 사단장이 논바닥 훈시를 통해 차량과 장비들을 남겨두고 후퇴한 패전의 책임을 묻는다면서 연대장과 대대장을 헌병대가 체포해 가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로부터 부대를 재편성, 사주방어로 적의 야습을 격퇴시키고 2,600명의 포로를 잡는 용문산 전투 승리를 기록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 전 소위는 중위로 진급하여 중대장과 대대작전 장교를 거쳐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포병으로 전과하여 고급 지휘관의 길로 들어섰다. 1968년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기습 공격한 1.21 사태 시는 6군단 작전참모로 활약하고 1973년에는 파월 한국군 사령부 작전참모, 기획참모부장을 거쳐 귀국하고 보니 보직이 없어 부평에 있는 206 보충대의 ‘보충장교’로 전역을 대기하는 신세였다. 그러나 다시 합참 정보국 북한과장으로 부임한 후 장군으로 승진, 6군단 포병사령관, 보병 11사단장, 포병학교 교장, 제3사관학교 교장을 거쳐 소장으로 전역했으니 야전 지휘관의 명예 전역이었다.
두 번째 보충근무 오산고 교장 전 장군은 1983년 1월 전역 후 모교인 오산고 교장에 취임했으니 이를 두 번째 보충근무라고 해석한다. 오산고 교장 취임에 앞서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선생 동상을 참배한 후 함석헌 오산중 동창회장의 환영 속에 취임했다. 오산중학은 1907년 평북 정주에 남강 이승훈이 설립했지만 6.25 부산 피난시절 오산중 9회 졸업생인 김홍일 장군이 학교재건을 추진하여 부산에서 개교했다가 1년이 지나 서울 원효로로 상경했었다. 전 교장은 정주 출신으로 오산중학을 다닌 인연에다 기독교 신자라는 조건을 충족시켜 교장으로 추대되어 엄격·강직한 교육정신으로 15년 근속 후 퇴임하니 공직 52년의 일생이었다는 회고이다. 전 장군은 평북 출신 장성들의 모임인 ‘평성회’에서 8.15와 6.25 체험을 기록으로 남기자는 뜻을 모아 ‘보충장교’를 비매품으로 저술했노라고 밝혔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3호 (2016년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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