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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 11, 12대 대한민국 대통령 전두환
작성자 관리자 [2020-01-30 11:2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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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두환[ 全斗煥 ]  

 


 

 전두환 대통령은 완산 전씨입니다.

 
  

대한민국 11ㆍ12대 대통령

 

출생 /1931년 1월 18일 경남 합천에서 출생.

직업 /대통령, 정치가, 군인 

 

한국의 11ㆍ12대 대통령ㆍ정치가ㆍ군인. 경남 합천(陕川) 출신. 1951년 대구 공업 고등학교를 거쳐 1955 육군 사관학교 제11기로 졸업하였다. 1959년 육군 부관 학교(군사 영어반)를 거쳐 1960년 미국에 유학, 미국 보병 학교를 수료하였고 1965년에는 육군 대학을 졸업했다. 1966년 제1공수 특전단 부단장에 취임하고, 1967년 수도 경비 사령부 제30대 대장이 되었다가 1969년 육군 참모 총장실 수석 부관, 1970년 제9사단 제29연대장으로 베트남전에 파견되었으며 돌아와 1971년 제1공수 특전 단장의 요직을 맡았다. 1973년 육군 준장 진급되고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를 지냈으며 1978년 제1사단장을 거쳐 이듬해 국군ㆍ보안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80년 육군 중장에 진급하고, 중앙 정보 부장 서리가 되었다가 6월에 국가 보위 비상 대책 상임 위원장(國家保衛非常對策常任委員長)에 취임하였다. 

8월 육군 대장에 진급되고 예편, 8월 27일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9월 1일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이듬해 1월 민주 정의당 총재에 추대되었다. 그 해 2월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제5공화국 출범의 주역 되었으며, 민주주의의 토착화, 복지 사회의 건설, 정의 사회의 실현, 교육혁신과 문화 창달을 4대 국정 지표로 제시하고 강한 개혁 의지를 천명하기도 하였으나, 그에 따른 부작용도 발생되었다. 

 

1987년 6월 노태우(盧泰愚)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고 1988년 2월 제6공화국에 정권을 이양하고,  그 해 10월 국민 여론에 따라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로 거처를 옮기고 야인으로 돌아갔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두환 [全斗煥]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전두환이 말한 지도자의 조건 

 "돈이 생기면 형편 되는대로 아랫사람을 도와주라고 권하고 싶다.“

 

全斗煥 대통령은 1988년 2월3일 연설문 담당 金聲翊 비서관을 불러 離任 기자회견 문안에 대한 지침을 내리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요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통령: 

한 나라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요건 가운데 

첫째는 건강이라고 나는 봐.   사람이 살면서 무엇을 하든지 우선 건강해야 한다. 건강은 노력, 즉 체력단련에 의해 성취될 수 있다. 

건강하고 체력이 강하면 매사에 자신이 있고 상황 판단이나 분석을 할 때 명확하게 할 수가 있다.    

두 번째 요건은 결단력이다. 지도자는 適時에 결심하고 결단할 수 있는 판단력과 용기, 그리고 의지를 갖추어야 한다. 지도자가 필요할 때 결단이나 결심을 하지 못하거나 斷案을 잘못 내리면 국가와 국민이 불행에 빠지게 된다.   

셋째는 신뢰감이 있어야 한다. 지도자는 접촉을 통해서 상대방이 믿음직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믿음을 줄 수 있게 되자면 다소의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첫 대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인상을 주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유리한 점이 많다. 평소 생활과 행동이 그러했다면 몸에서 풍기는 맛이 상대방에게 믿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신뢰를 받는 데는 타고난 성품도 있으나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서도 될 수 있다. 항시 言行이 일치되어야 한다.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그 사람의 습관이 된다.   

지도자는 우선 그 사람의 부인과 자식, 자기를 보좌하는 측근으로부터 믿음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신뢰는 곧 존경으로 바뀔 수가 있다.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네 번째 요건은 표현능력이다. 최소한 자기의 뜻을 상대방에게 정확히 전할 수 있는 표현능력이 필요하다. 이것도 반복연습이라든지 노력에 의해서 충분히 갖출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는 인내심이다.    

여섯째는 한국적 특수상황하에서는 安保지식이 풍부해야한다. 물론 보좌에 의해 결심만 하면 될 수도 있으나 오늘의 세계는 지도자에게 있어 안보지식이 하나의 상식화되어가고 있다.   핵 문제, 美蘇 문제, 한반도 문제 등을 알아야 한다. 미국의 대통령후보들에게 있어서는 누구나 다 주한미군 문제와 유럽주둔 문제 처리 등이 공약 또는 상식적인 토론 제목이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욕심을 부린다면 인간적인 매력이 있으면 좋다. 만나서 얘기를 해보면 맛이 당기는 사람, 한번쯤 더 만났으면 싶을 정도의 매력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작은 단체는 물론, 나라의 지도자는 항상 남을 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이것이 곧 국민을 위하는 마음가짐이다.     

보좌관이나 휘하 요원들에 대해서는 지도자가 경제적 문제, 금전 문제에 있어서 손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마음이 되어야 한다. 돈이 생기면 형편 되는대로 아랫사람을 도와주라고 권하고 싶다. 나는 이것이 곧 국민을 위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또 남의 이야기나 보좌관의 이야기는 피곤하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경청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보좌관의 의견과 건의를 존중해야 한다. 최소한 존중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는 자신의 구상과 결심을 소상히 설명해서 보좌관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2016-5-31 조갑제 닷컴에서 

 

 

대통령 全斗煥의 겸손 

 “나는 軍출신으로 경제는 잘 모른다. 경제전문가인 여러분들이 정책을 세워라. 집행은 내가 책임지고 하겠다”

 

서양철학의 원조인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만 내가 다른 사람보다 현명하다”고 말하였다. 그는 또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달한 사람만이 지식에 대한 갈망을 가지게 되고 이러한 갈망이 도덕적이고 지혜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하였다. 無知의 인식이 지적탐구와 도덕적 覺醒(각성)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知的인 오만이나 도덕적인 독선에 사로잡혀 지식과 지혜와 도덕적 수양에 대한 갈망이 증발해버리면 인간은 무지하고 추악한 괴물로 전락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괴물들이 권력을 장악하면 예외 없이 경제는 파탄이 나고 국민은 고통을 당하게 된다. 특히 인간의 완벽성을 확신하는 독선적 공산주의자들이 국가를 장악하면 경제적 황폐화는 물론이고 대량학살 같은 慘事(참사)도 일어나게 된다. 

5공화국 때 고위 경제 관료를 지낸 사람의 傳言(전언)에 의하면 전두환 前대통령은 知的으로 겸손하였던 것 같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 경제 참모들에게 “나는 軍출신으로서 경제는 잘 모른다. 경제전문가인 여러분들이 정책을 세워라. 그러면 집행은 내가 책임지고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겸손한 대통령이었던 것 같다. 

전두환 대통령 재임기간에 대체로 國泰民安(국태민안)하였으며, 한국의 무역수지가 처음으로 흑자로 돌아서고,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全斗煥씨야말로 지금 인생의 황금기에 있다." 

 인간 全斗煥 연구(3) 출세가도를 줄달음치면서 남을 부리고, 남을 젖히며, 남을 조사하는 일에 익숙하였던 全씨로서는 이제 처음으로, 「당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90년 2월호 월간조선 게재.

 체제의 잘못을 몽땅 쓰게 돼

全대통령을 매일 모셨던 이들은 그가 매우 소심한 면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독재자라고 공격을 받은 全씨를 「너무 국민 눈치 많이 보는 사람」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한 비서관 출신은 『대통령의 눈치를 봐야 할 사람보다는 대통령이 눈치를 봐야 할 사람이 훨씬 많다. 대통령이 만만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청와대 비서관들인데, 이들에게는 신경질을 내기도 하였다』고 했다. 독재체제의 대통령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일이 나쁘게 되면 책임도 독점하게 된다. 全대통령이 朴鍾哲군에게 물고문을 시킨 것은 아니지만 국민들의 분노는 결국 全대통령으로 집중되었다. 

독재체제에서는 「체제=독재자」이므로 체제의 잘못이 全대통령의 잘못으로 개인화 될 수 있다. 全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그토록 컸던 것은 독재체제의 잘못을 그 체제의 대표에게 몽땅 넘겼기 때문이었다. 이런 식의 분노발산이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은 독재체제는 대통령의 취향에 의하여 이리저리 방향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새벽에 포장마차집에 들러 주인을 격려하면 공무원들이 포장마차 단속을 중단하고, 대통령이 지나가는 말로 『나는 두부찌개를 좋아한다』고 하면 대통령이 시찰 가는 곳의 식탁에는 반드시 두부찌개가 등장했다. 全대통령이 『왜 두부찌개만 내 놓느냐』고 불평을 했더니, 사라지더란 것이다. 朴대통령이 1970년대 말에 부산을 시찰, 崔錫元시장과 함께 해운대 동백섬을 산책하는데 쥐가 한 마리 나타났다. 朴대통령은 무심코 『저놈 쥐 잡아라!』고 했다. 경호원들이 바위 사이를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결국 쥐를 잡아  내더라는 것이다. 

全 전 대통령은 국회증언에서 姜信玉 의원이 간첩조작사건에 대해서 답변을 재촉하자 『그것은 실무자 선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서 모르겠다』는 취지로 답변하였다. 全씨는 증인대기실로 돌아와서는 『도대체 간첩조작이 뭐냐?』고 생전 처음 듣는 말인 듯 의아해하더라는 것이다. 87년초 서울고법의 부장판사는 국군보안사가 적발한 간첩사건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얼마 뒤 법조계에는 『全대통령이 대노했다』는 소문이 쫙 퍼졌고, 그 판사는 불안해 하고 있었다. 全대통령이 판결에 대해 어떤 논평을 했는지 모르지만 무심코 한 한마디라도 경직된 독재체제에선 크게 울려 그 뒤의 재판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단임약속에 대한 순정

全대통령의 머리 속에는 朴대통령이 1인장기집권 때문에 그런 비극을 맞았으므로 대통령단임만 실천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다. 국민들은 그 단임이란 것을 「형님 먼저 아우 먼저」식의 군사정권 내부의 임무교대로 간파했으므로 단임 약속의 의미를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이런 인식 차이 때문에 1985년 이후 全대통령의 생각과 국민들의 요구는 타협점 없이 평행선을 달리다가 6월 사태를 맞은 것이었다. 全대통령은 수 십년 친구인 盧泰愚씨를 5공화국 출범 때부터 후계자로 지목하여 경력관리를 시켰다. 정무장관, 내무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민정당 대표라는 그의 경력에 안기부장이란 자리가 삽입되었더라면 盧씨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2인자로 지목된 사람이 한번도 정권을 승계한 적이 없는 한국적 풍토에서 全씨가 당초의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우직한 순정을 반영한 것이리라. 

그러한 全대통령도 1986년말 安賢泰 경호실장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고 한다. 『아무래도 다음 대통령은 민간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安실장은『각하 그 말씀은 안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것은 각하의 고독한 결단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때 全대통령은 盧 민정당 대표와 함께 盧信永 총리를 후계자로 검토하고 있었다는 것이 측근의 증언이다. 全대통령은 퇴근 뒤 盧총리의 공관에 몇 번 들러 각별한 신임을 나타내기도 했다. 全 전 대통령은 백담사에 간 뒤 자신이 盧泰愚씨를 후계자로 지명한 이유가 『분단상황에서는 군을 잘 아는 지도자가 아직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고 말한 바 있다. 全 전대통령은 어쨌든 나름대로의 항심(恒心)으로 단임약속과 盧泰愚 후계자 구도를 바꾸지 않았다. 全 전 대통령은 백담사를 찾아 온 손님에게 최근 『내가 4·13호헌조치를 통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거부한 것은 盧대표가 직선제로는 도저히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지 나를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全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사태로 민심이 완전히 돌아서자 『이런 분위기 아래서는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가 오히려 불리하다. 선거인단에 야당 의원이 대거 당선될 수도 있다』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챠우셰스쿠의 말로 맞을 뻔?

全씨의 국회증언이 시작되기 전 국회 5공비리조사특위의 황명수(黃明秀)위원장은 서두의 연설을 통해 루마니아 대통령 차우셰스쿠의 末路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때 全 전 대통령은 꽉 다문 입에 힘을 주었고 의자 손잡이를 잡은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全斗煥대통령이 차우셰스쿠와 같은 말로를 맞고 한국이 루마니아로 변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는 있었다. 6월 사태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던 6월 19일에 全斗煥 대통령이 부산에 계엄령을 펴고 군3개 사단을 투입했더라면 한국은 파국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한 예비역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군대는 경찰과 근본적으로 다른 조직이다. 전경은 시위대에 항복하고 뺨을 얻어맞을 수도 있지만 군대는 그럴 수 없다. 일단 군대가 나오면 사태를 철통같이 장악해야 한다. 6월사태 때 그런 목적을 달성하려면 광주사태의 몇 배나 되는 피를 흘려야 했을 것이다. 루마니아 사태에서 실증되었듯이 전체국민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는 군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군대는 결국 국민 편에 서서 총부리를 全정권 쪽으로 돌렸을 것이다.』 

 朴대통령이 자신의 운명을 재촉했던 것은 경찰력으로 막을 수 있었던 부산사태에 비상계엄령을 선포, 권력층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켰기 때문이었다. 全대통령은 『재임기간에는 계엄령을 절대로 선포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일찍부터 전투경찰을 늘려 놓았었는데, 이 경찰병력이 6월사태 때 끝까지 버팀으로써 「경찰이 계엄령을 막았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6월19일에 全대통령이 일단 군 출동명령을 내렸다가 치안본부장의 「경찰력으로 막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쉽게 그 결심을 번복한 것은 朴대통령과는 판이한 의사결정 방식이다. 이런 점 때문에 全대통령은 즉흥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으나 납득할 만한 다른 이유가 발견될 때 자신의 고집을 꺾을 수 있다는 것은 대파국을 예방할 수 있는 德性이기도 했을 것이다.

 우직한 도박―經協요구와 올림픽

全 대통령은 준비와 경험 미숙으로 의사결정과정에서 결심과 번의를 되풀이하였지만 몇 가지 國政의 기본방향에 대한 기조는 바꾸지 않는 우직성을 보였다.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단임약속, 盧泰愚 후계자 구도 등이 그것이다. 1985년 2·12총선 직전에 민정당에서는 긴축 예산과 공무원 봉급동결을 풀어줄 것을 全 대통령에게 요구했으나 全대통령은 『민정당과 물가안정 중에 택일하라면 물가안정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버티었다고 한다. 한 경호관 출신은 『全대통령이 자주 단임약속의 실천의지를 公言한 것은 자신에 대한 다짐이기도 하였다. 정권연장의 유혹을 뿌리치려는 몸부림처럼 느껴졌다』고도 했다. 서울 올림픽은 朴鐘圭씨가 준비해온 아이디어를 全대통령이 경제 각료들의 반대를 누르고 채택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었다. 朴, 全 두 사람은 「간 큰 일을 저지를 기질」의 소유자로서 의기투합하여 엄청난 일을 해낸 셈이었다. 일부에서는 서울올림픽이 정권연장에 이용될 것이라는 시각을 가졌으나 6월사태 때는 오히려 군동원을 억제하는 작용을 해 결과적으로는 민주화의 보장조건 역할을 했다. 

이런 秘話가 있다. 1980년 여름 全씨가 아직 국가보위상임위원장이던 시절에 일본 이토추 상사의 세지마 류조 상담역이 일본政界의 密使임무를 띠고 한국에 와 全씨와 단독 면담했다. 세지마씨는 이때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하십시오. 그리고 일본에 대해 경제협력차관 제공을 요구하십시오』라고 권했다. 日帝 때 대본영의 작전참모 출신인 세지마씨는 서울올림픽과 경협차관이 한반도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일본의 안전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정부가 가만히 있는 한국에게 차관을 제공해주겠다고 나설 수도 없어 한국정부가 차관을 요구하면 못 내키는 척하고 건네주겠다는 작전이었던 것이다. 全씨는 대통령이 되자 「느닷없이」 60억 달러의 경협차관 요구를 일본정부에 최후 통첩하듯이 냈고, 결국 나카소네 총리의 고문역을 맡고 있던 세지마씨가 중간에 나서서 權翊鉉 민정당 사무총장과 담판, 40억 달러로 낙착 지었던 것이다. 

 全·盧 팀웍의 비결

6·29선언은 물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대치 상황을 정치력으로 일거에 수습하고, 그 바탕에서 민주적인 방법을 통한 정권연장을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해방 이후 최대의 정치적 승부수였다. 12·12사태 날의 밤에 全씨가 보여주었던 동물적인 감각의 승부기질은 이 정치적 결단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이 대도박에서 全斗煥·盧泰愚 콤비는 승리를 거두었다. 全·盧콤비는 독재체제에서는 1인자와 2인자가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통설을 깨고 끝까지 팀웍을 유지했지만, 金大中·金泳三 두 金씨는 全·盧의 계산대로 대권을 눈앞에 두고 분열하며 정권인수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全·盧콤비의 팀웍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朴正熙 대통령의 통치술과 비교할 때 더욱 돋보인다. 朴대통령은 군지휘관 시절부터 부하들을 상호 견제시켜 조직을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방법을 애용하였다. 심할 때는 이간질을 붙인다는 비난을 들을 정도였다. 10·26사건은 車智撤 경호실장과 金載圭정보부장의 상호견제가 감정문제로 폭발한 것이었다. 全대통령은 권력집단 내부의 인간적 단결에 신경 써 심각한 내부균열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盧泰愚씨가 조심하며 독자적인 기반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던 것도 그런 단결의 한 요인이다. 許三守사정수석과 許和平정무수석비서관이 1982년 말에 그만두었지만 권력핵심의 단결에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 두 許씨가 밀려난 이유는 李哲熙·張玲子 사건 때 강경한 수사를 건의했고, 이것이 全씨 부부의 반발을 산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全씨는 백담사에서 『두 許씨가 장관까지 부르는 등 越權이 심해 잘랐다』고 얘기했으며 李·張사건에 대해서는 『그 사건은 법률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을 정치적으로 확대시켰다』고 하며 李圭光씨의 구속은 불필요한 과잉조치였다는 뜻의 말을 했다고 한다. 

全씨가 12·12주체세력의 내부단결을 유지한 비결은 두 가지였다. 인사면에서 全씨는 안기부장, 육군참모총장, 보안사령관, 국세청장, 감사원장 등 권력의 중추부에 주로 하나회 출신의 측근을 임명하여 정권의 고삐를 단단히 잡았다. 정치자금 면에서는 그 자신이 루트를 독점하였다. 朴대통령 밑에서 李厚洛, 金鍾必, 金成坤, 朴鐘圭씨등이 독자적 파벌을 만들어 각축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각기 따로 정치자금 루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全대통령은 스스로 음성적 정치자금 모집과 배분의 단일 창구역할을 맡았다. 그는 월급 주듯 이 돈을 민정당 운영비나 선거자금으로 나눠주면서 퇴임 때까지 영향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7년 단임을 예고하고도 권력 漏水 현상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인사권과 정보 수집권, 그리고 자금루트를 양보하지 않고 장악한 덕분이다.  

 철저한 인계·인수

민주당에서는 이원조(李源祚)의원이 정치자금모집의 대리창구였고 야당분열공작에 관계했다고 의심하고 있는데 全씨의 측근중의 측근이었던 ㄱ씨는 이렇게 말했다. 

『全대통령은 정치자금을 직접 받았습니다. 기업체 대표가 수 십억 원의 정치자금을 낼 때 대통령을 직접 만나 부탁도 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들어야지 대리창구를 뭣 때문에 이용하겠습니까. 국회의원 선거 때 보니까 10만원을 보태주는 사람도 꼭 후보를 만나 직접 주려고 하던데…』 

그러나 1987년 대통령 선거 때는 李源祚의원이 盧후보를 돕는다는 명목으로 자금조달에 적극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全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서 실토한 바에 따르면 李의원은 87년 대통령선거전에 자신을 찾아와 『이제부터는 盧후보를 도와주어야겠습니다』고 하기에 『그렇게 하라』고 승낙했다는 것이다. 全 전 대통령이 李의원에 대해 유감을 갖고 있는 것은 친인척 비리에 대한 정보를 李의원이 盧대통령의 측근에게 제공하였고, 그 정보가 언론계 출신 측근에 의해 언론으로 새나갔다는 확신에 기인한 반응이라고 한다. 

全 전 대통령의 한 측근은 『全대통령이 퇴임 직전에 남은 정치자금 550억 원을 인계한 것은 그분의 돈관리 방식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全씨는 지금도 사단장 시절에 판공비 20만원을 갈라준 내역을 외고 있다는 것이다. 정보참모에게 몇 만원, 운전병에게 몇 천 원씩으로 갈라주었으며 후임자가 처음 부임하여 상당기간 돈에 궁할 것에 대비하여 그럴 때 쓰도록 남은 돈도 인계하여 주었는데, 550억원도 그런 성격이란 얘기였다. 다른 옛 비서관은 『파출소장이 관내로부터 들어 온 촌지들을 모았다가 집으로 가져가면 도둑놈이 되지만 파출소 운영비에 쓰고 부하들에게 나누어주면 한국적 현실에서는 이해될 수 있지 않겠는가. 全대통령이 그런 스타일이었다』고 했다. 여러 증언으로 미루어 全대통령은 군지휘관 시절이나 대통령 때 돈을 모으는 일보다는 나눠주는 일에 더 쾌감을 느꼈던 것 같다. 

全대통령은 집권말기에 퇴임 뒤 자신의 격하운동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했었다는 증언은 많다. 『여기서 죽느냐 나가서 죽느냐, 이것이 문제인데 나가서 죽는 것이 나라에 보탬이 되겠지?』라고 말하기도 했고 『권력이란 것은 부자간에도 나눠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민정당에 의해 당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盧泰愚 대통령 당선자 측에서는 全씨가 퇴임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1988년 2월 총선을 치르면 全대통령의 입김이 많이 들어가므로 이를 피하려고 4월 총선 쪽을 택했다는 것이다. 퇴임 뒤 全씨가 미국을 방문하여 닉슨 전 대통령을 만났다. 닉슨은 全씨에게 『政敵들이 당신에게 많이 짖어대기는(Bark)하겠지만 물지는(Bite) 못할 것이다』고 일러주더라는 것이다. 全씨의 한 측근은 최근에 全씨에게 『단임에는 성공했지만 평화적 정권교체에는 실패하셨습니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全씨측에서는 5공 비리 청산문제를 근본적으로 정치 보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李炳注씨가 『全씨에 대한 분노의 폭발은 해방 이후 한 번도 해소된 적이 없이 쌓이기만 하였던 독재정권에 대한 울분의 총량이 한꺼번에 터진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 뜻에서 全씨는 朴대통령의 몫까지 당하고 있는 것이다』고 한 말은 음미해볼 만하다. 

 참고 있을 뿐

인간의 가장 강한 본능 중 하나가 자기합리화라고 한다. 全斗煥씨 부부가 백담사에 들어가 참회를 하고 있으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은 지난 국회증언을 듣고는 『자기합리화만 하고 있다』고 화를 냈다. 그런 사람들은 1988년 10월 14일에 새세대 육영회회장 李順子씨가 여러 신문에 냈던 「회원과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이란 글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거니와 저는 『전직 대통령 부인이니까 잘못이 있어도 눈감아 주자』라는 억지 논리와 구차한 비호를 단호히 거절합니다. 파헤치십시오. 철저하게 파헤치십시오. 선입관과 편견을 버리고 냉정하고 공정하게 접근해 간다면 결국 진실은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낼 것입니다」  이런 확신과 오기에 찬 부부가, 그것도 나이 50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가치 전부를 부정하는 그런 참회를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국민들이나 그렇게 비치도록 노력했던 일부 정치인과 언론에 오히려 문제가 있는 것이다. 김영삼 씨가 『나는 마음을 비웠다』고 한 말이나 金大中씨가 『나는 무엇이 되느냐보다는 어떻게 사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과 같은 맥락의 허구다. 정치인이 종교인 흉내를 낼 때 허구의 바벨탑은 최대치로 올라간다. 정치와 종교는 시저와 예수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명제이다. 

全씨는 백담사에서 지나간 재임기간중의 경제성장과 민생치안에 자부심을 느끼고 6·29선언의 裏面史的 역할에 대해 자기만의 보람을 간직한 채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도 국가와 친구를 위한 일이다』는 일종의 순교자적 사명감까지 맛보고 있는 것이지, 태어나지 않아야 할 정권을 태어나게 했다는 데 대한 참회는 조금도 없는 것이다. 「全斗煥씨가 참회하고 있다」는 국민들의 착각과 「지금쯤은 국민들이 이해해줄 것이다」는 全씨의 착각이 교차하여 그 시각 차를 확인한 것이 지난 국회 증언이었다. 

全씨는 백담사에서, 89년 봄의 MBC 텔레비전 박경재 시사토론 프로에 나온 朴槿惠씨의 이야기(5공화국이 고 朴대통령을 섭섭하게 대우했다는 취지)를 듣고는 대단히 화를 냈다고 한다. 고 朴正熙대통령 친인척의 비리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자신이 적극적으로 그 부분의 조사를 저지했기 때문인데 『저럴 수가 있느냐』는 반응이었다는 것이다. 全씨는 『접수된 朴대통령과 그 친인척 비리에 대한 신고·진정서만 해도 한 트럭 분은 족히 되었다. 내가 물러나면 저렇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말했다고 한다. 全씨 측근에서는 『지금 언론에서는 朴대통령이 친인척 관리를 잘했다고 하는데, 全斗煥대통령이 지금 5공 비리 수사하듯 3공비리를 조사했다면 그 규모가 全 전 대통령의 친인척 비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엄청났음이 드러났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全씨는 친인척 비리의 원인을, 『못 살고 못 배운 친인척들이 주위사기꾼들에게 이용되었다』고 파악하고, 『부정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축재목적이기보다는 자신이 소유한 주식회사의 돈을 개인 돈처럼 썼다가 횡령죄로 기소된 식의 법규위반이 주된 것인데 언론에 의해 너무 과장되었다』는 시각이다. 全씨는 또 金復東씨에 대해서 『술만 마시면…』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렇다면 광업진흥공사 사장을 하지 않았어야지』라고 했다. 그러니 全씨는 참고 있는 것이지 참회하고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全 전 대통령은 지금도 盧대통령을 믿고 있다는 게 측근들의 傳言이다. 全 전 대통령은 국회증언 이후 측근에서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묻자 『盧대통령과 의논해서 하지』라고 말하더란 것이다. 이 측근이, 盧대통령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듯한 투의 불평을 하자 全씨는 『그래도 어떻게 하나. 40년 친구사이인데…』라고 했다는 것이다. 

全씨는 국회증언에서 盧대통령과 야당지도자에 타격을 줄 만한 폭탄선언을 하지 않았다. 全씨의 측근 가운데서는 이 폭탄선언을 무기로 삼아 盧대통령으로부터 몇 가지 보장을 받아 두자는 제의를 했으나 全씨는 『盧대통령이 신세진 사람이 수백 명이나 되는데 그럴 여유가 있겠느냐…』고 설명하면서 거절했다고도 한다. 全씨는 회고록에서 소상히 밝힐 때까지는 계속해서 비밀정보라는 폭탄을 안고 있을 것이며, 그 덕분에 기성정치판에 대해서 일정한 영향력을 유지해갈 것이다. 盧대통령부터가 全씨를 어려워하고 있으므로 여권 내에서 全씨가 완전히 무력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인생의 황금기

그러면 역사는 全씨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역사는 全斗煥씨를 다는 저울의 한 쪽에 12·12사태, 5·17쿠데타, 광주사태, 5공비리를 올려놓을 것이고 반대쪽에는 물가안정, 서울올림픽, 경제성장, 단임실천 등을 올려놓을 것이다. 저울이 어느 쪽으로 어느 각도로 기우느냐 하는 것은 보는 이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 인식의 문제일 것이다. 

현재로서는 全씨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强勢이지만 이런 소수의견도 있다. 李炳注씨는 『유신체제가 민주화되는 과도기의 지도자로서 全씨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면서 『한국의 민주화 방식과 루마니아의 방식을 비교해 볼 만하다. 군사정권의 자체적인 궤도수정이 다른 나라에 그 예가 있는가』라고 말했다. 

한 경제학자는 『국제적 비교를 해야 한다』고 했다. 『외국에서는 해방 뒤 한국의 경제·정치발전을 세계사의 금자탑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해방 당시 우리보다 훨씬 앞에 있었던 아르헨티나, 멕시코, 필리핀은 이제 정치·경제 모든 부문에서 우리 뒤로 처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국민 모두는 영웅이고, 우리 시대는 영웅시대여야 합니다. 그러나 영웅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면 화살 맞은 시체들만 나뒹굴고 있습니다.』

 이 경제학자는 李承晩·朴正熙, 그리고 全씨를 「화살 맞고 죽은 영웅」으로 표현하고 싶은 모양인데, 全씨는 아직도 기가 죽지 않고 백담사에서 팔팔하게 살고 있다. 줄곧 출세가도를 줄달음치면서 남을 부리고, 남을 젖히며, 남을 조사하는 일에 익숙하였던 全씨로서는 이제 처음으로, 「당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경험은 인간 全斗煥을 성숙시키게 될 것이다.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 스님은 『全斗煥씨야말로 지금 인생의 황금기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 기사 이후 전두환 전 대통령은 김영삼의 소위 역사바로세우기 재판을 통하여 반란과 내란 수괴로 斷罪되어 징역 2년을 살고 나왔고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또 가족들의 은닉 재산에 대한 검찰 수사가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기가 꺾이거나 낙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비록 경호원의 보호를 받는 상태이지만 모임에 자주 나가고 산책도 한다. 그가 일반 시민들로부터 봉변을 당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결혼식, 개막식, 생일 잔치 등에서 여러 번 전두환 전 대통령을 보았지만 참석자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정치와 언론이 전하는 全斗煥과 국민들의 가슴 속에 있는 전두환은 많이 다르다. 역사적 평가도 지금보다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는 손에 피를 묻히면서 집권하였지만 단임실천과 직선제 개헌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놓고 살아서 청와대를 떠났다. 백담사 은둔에 이어 감옥 생활도 하였지만, 한때 '군사 독재자'로서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그가 지금은 우리 곁에서 한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성취를 증거한다. 그는 동네북이 되었지만 잘 버티고 있다.  

2016.5.29.

  

克日을 실천한 全斗煥: 韓日 경제 성장률 비교표의 證言 

 1981~1992년 사이 한국 경제는 일본보다 거의 세 배나 빨리 성장하였다. 이 시기는 민주화 운동의 熱風이 분 때이지만 튼튼한 경제가 그 충격을 흡수, 직선제 改憲과 평화적 정권 교대가 이뤄졌다. 당시 일본도 好況이었지만 한국은 성장률에서 세계 최고였다. 

 

韓日 경제 성장률 비교

(월드뱅크 통계)

 

연도

1981 

1982 

1983  

1984 

1985 

1986 

1987 

1988 

1989

일본

4.2

3.4

3.1 

4.5

6.3

2.8

4.1

7.1

5.4

한국

7.4

8.3

12.2

9.9

7.5

12.2

12.3 

11.7

6.8

연도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일본

5.6

3.3

0.8

0.2

0.9

1.9

2.6

1.6

-2.0

한국

9.3

9.7

5.8

6.3

8.8

8.9

7.2

5.8

-5.7

연도

1999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일본

-0.2

2.3

0.4

0.3

1.7

2.4

1.3

1.7

2.2

한국

10.7

8.8

4.5

7.4

2.9

4.9

3.9

5.2

5.5

연도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일본

-1.0

-5.5

4.7

-0.5

1.8

1.6

-0.1

0.6

 

한국

 2.8

0.7

6.5

3.7

2.3

2.9

3.3

2.7

 

 

 

 

위의 통계는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1. 全斗煥 盧泰愚 집권기 12년 동안 克日이 이뤄졌다. 전두환 정부는 일본 교과서 파동이 일어났을 때 反日을 넘어 克日, 즉 일본을 이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 약속은 실천되었다. 1981~1992년 사이 한국 경제는 일본보다 거의 세 배나 빨리 성장하였다. 이 시기는 민주화 운동의 熱風이 분 때이지만 튼튼한 경제가 그 충격을 흡수, 직선제 改憲과 평화적 정권 교대가 이뤄졌다. 당시 일본도 好況이었지만 한국은 성장률에서 세계 최고였다. '일본을 따라잡는다'는 말이 비로소 현실성을 띠게 되었다. 그 餘勢를 몰아 10년 내 한국은 구매력 기준으로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을 능가한다. 

2. 일본은 1992년부터 경제 상장률이 急落, 20년이 넘는 장기간의 버블 붕괴 경제침체를 겪고 있다. 한국도 2015년에 수출 감소와 2%대 저성장을 기록, 일본형 장기침체의 초입부에 들어갔다. 일본의 예에서 보듯이 이 침체는 오래 끌 것이다. 일본은 장기침체를 잘 견딘 편이다. 축적된 국내외 자산이 어마어마하고, 기술력이 강한데다가 한국과 달리 선동세력이 힘을 쓰지 못하였고, 국민들의 교양이 분열을 막았다. 한국은 선동세력이 강하고 국민들의 교양이 약하며, 核위기까지 같이 왔다. 

3. 1981~2015년의 35년간 성장률에서 일본이 한국을 앞선 해는 한국이 外換위기를 겪던 1998년 한 해뿐이었다. 2008~2009년의 금융위기는 한국이 일본보다 더 성공적으로 극복하였다. 李明博 정부의 공이다. 기획재정부 姜萬洙 장관은 당시 '이 위기만 잘 넘기면 한국은 경쟁국들을 추월하게 될 것이다'고 예언하였는데 적중하였다.  

4. 민족사 2000년 역사상 國富를 가장 많이 키워 韓日 격차를 줄인 시기의 통치자 全斗煥 정부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 

 

 

아무리 全斗煥 대통령이 미워도 이 통계는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집권 기간에 한국은 세계 제1위의 경제성적표를 기록, 민주화를 뒷받침하였다. 

 

인터뷰에 나가서, 내가 全斗煥 대통령을 역사적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하면 놀라는 기자들이 더러 있다. 모든 대통령은 聖君이어야 하고 모든 스포츠맨은 슈퍼맨이어야 하고 모든 기업인은 無慾의 자선가여야 한다고 생각하는(그러면서 자신들은 모순덩어리이다) 기자들의 눈에는 榮辱(영욕)투성이인 全斗煥 전 대통령의 욕된 면만 보지 않으려 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질 것이다. 내가 全斗煥 정권에 의하여 두 번 기자직에서 해직된 적이 있다고 말하면 왜 그런 사람이 全씨를 좋게 보느냐고 이상한 눈초리로 대한다. 公的 판단에 私感을 介在시키면 안 된다는 원칙이 생소한 모양이다. 수치로 본 全斗煥 대통령의 부정할 수 없는 功積을 싣는다.         오늘날 한국에서 識者를 자칭하는 사람들중에는 全斗煥 정권을 변호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 金泳三 전 대통령이 주도한 소위 역사재판에 의하여 全斗煥 정권의 출범 과정은 反헌법적인 반란과 내란 행위로 규정되었다. 이 판결에 대한 異見도 많다. 全斗煥 정권의 출범에 대한 논란과는 별도로 이 정권이 남긴 實積에 대해서는 異見이 적다. 수치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정치는 動機보다는 결과를 重視한다. 객관적 수치로 나타나는 全斗煥 정권의 실적이 역사적 평가의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             *제5공화국 관련 경제정보: 朴正熙 정권 마지막 해와 全斗煥 정권 마지막 해의 비교표      1. 1979년 1인당 GNP: 1,546 달러   2. 1988년 1인당 GNP: 3,728 달러   3. 1980년대 경제성장률: 연평균 10.1%로서 200여개 국가중 1위      4. 1979년 수출 147억 달러, 수입 191억 달러, 경상수지 적자 41억5100만 달러.   5. 1988년 수출 600억 달러, 수입 525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 138억 달러.      6. 1979년 국민저축률: 25%   7. 1988년 국민저축률: 34%      8. 1979년 도매 물가상승률: 20%, 1980년은 44%   9. 1983-87년 도매 물가상승률: 연평균 2.7%      10. 1970년대엔 외채 망국론이 강했지만, 1988년에 외채 320억 달러, 對外자산 253억 달러로 개선되었다가 1989년에는 純채무국으로 전환.    11. 전화대수: 1982년 300만 대에서 1988년 1000만 대 돌파.      12. 소득격차: 1980년에 지니계수가 0.39, 88년엔 0.34로 축소(수치가 낮아지면 격차가 줄었다는 뜻임).      全斗煥 정권은 1980-88년 사이 세계 1위의 고도경제성장을 달성했다. 이 기간 국민소득은 2.3배로 늘었고 무역적자 구조는 무역흑자로 바뀌었다. 두 자리 수의 물가상승률은 2%대로 안정되었다. 외채도 크게 줄었고 국민저축률은 일본을 앞서는 세계최고 수준에 달했다. 1980년대 全斗煥 정부는 통신망 설치와 전자산업 육성을 國策사업으로 추진하여 1990년대 이후 한국이 세계적 인터넷-전자산업 强國으로 도약하는 조건을 만들었다.       이 경제성장으로 해서 한국사회에 중산층이 두껍게 등장했다. 1980년대 말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약70%가 되었다. 이들이 민주화의 主力부대가 되었다. 이들의 온건성향이 6.29선언으로 나타난 타협적, 평화적 민주화의 엔진역할을 했다.    경제성장이 만든 쿳션이 한국사회의 바닥에 깔리는 바람에 민주화의 부작용을 견뎌냈다. 1985년 2.12 총선으로 시작된 민주화의 혼란기에 경제성장률이 피크에 달했다. 경제호황기에 민주화 시위가 절정기를 맞았다는 것은 행운의 타이밍이었다.       全斗煥 대통령은 마이너스 경제성장률을 기록한 경제를 이어받아 이를 수습한 뒤 물가를 잡고 고도 성장과 흑자를 이룩했다. 全斗煥 대통령이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정치는 상당부분 경제를 관리하는 기술이다. 경제에 성공했다는 것은 정치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反證이다.       경제 성공의 功을 전두환 대통령이 아닌 金在益 경제수석한테 모두 돌리려는 사람들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金在益씨를 잘 부린 사람이 全 전 대통령이었고, 金수석은 1983년10월에 아웅산 테러로 타계, 그 뒤의 경제관리엔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 경제성장은 평화적 민주화와 全대통령의 단임실천을 가능케 했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준비한 이도 全斗煥이다. 이런 호재로 安保면에서도 對北우위를 확보했다.       그에게는 물론 12.12사태의 책임이 있고, 비자금 모집의 과오가 있다. 이 때문에 그는 2년간 백담사 귀양, 2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이들 과오를 한쪽으로 놓고 그 반대편에 경제적 성공과 튼튼한 안보, 그리고 단임실천 및 6.29 민주화 선언(직선제 개헌이 핵심)과 서울올림픽 성공을 놓으면 저울은 어디로 기울 것인가. 한국 민주주의 건설의 결정적인 계기(6.29선언)를 만든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는 게 공정한가?   물론 광주 사태 시의 군 발포와도 그는 관련이 없다. 발포 명령 자체가 없었다. 위험을 느낀 군인들의 자위적 발포가 시작이었다.      *하나 덧붙인다면 전두환 정권은 前 정권을 격하하지 않았다. 김영삼 정부가 했던 식으로 前 정권 비리를 캐기 시작했더라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현재의 국민적 평가는 매우 달라져 있을 수도 있다.       *全斗煥 전 대통령을 독재자로 규정하려고 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선례를 남긴 사람'이란 대목을 검토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발전에 대수롭지 않은 일인가, 아니면 대단한 일인가. 한 국가가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선거를 통해서 평화적 정권교체를 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평화적 정권교체의 역사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성숙도 지표이다. 유럽에선 영국이 1688년의 명예혁명을 통해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확립했다. 미국은 1776년 건국시부터 이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프랑스는 1871년 普佛전쟁에 져서 나폴레옹 3세 황제가 쫓겨난 뒤 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정권교체기에 들어갔다.  독일과 일본은 1945년 패전 이후부터 선거를 통한 권력교체가 가능한 나라가 되었다. 스페인은 철권통치자 프랑코가 죽은 2년 뒤인 1977년부터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있다. 舊소련과 동구권 나라들은 1989년경부터 이 시기로 들어갔다. 필리핀은 1986년 마르코스 추방 이후 그렇게 되었으나 아직도 불안해보인다. 한국은 1988년 全斗煥 퇴임으로부터 이 전통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놓고본다면 민주주의의 발달사는 길지만 의외로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은 길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평화적 정권교체는 가장 마지막 단계에서 가능해진다는 의미이다. 30년밖에 되지 않는 한국의 평화적 정권교체 역사는, 민주주의의 기반이 충분히 다져졌다고 볼 수 없는 조건에서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주기도 한다. 북한과 중국은 아직도 정권교체의 꿈도 꿀 수 없는 곳이다. 정권교체는 옛날엔 전쟁이나 암살, 쿠데타를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정상이었다. 민주주의 시대엔 선거가 전쟁을 통해서 했던 일을 대신한다. 그만큼 선거는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정권교체의 전통을 국민 모두가 소중히 가꿔나가야겠다. 동시에 全斗煥 정권이 만든 이 평화적 정권교체의 선례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全斗煥을 제대로 평가해야 미래가 보일 것이다 

 오늘자 조선일보 최보식 칼럼을 읽고. 

오늘자 조선일보 [최보식 칼럼]에서는 全두환 前 대통령의 치적 한가지를 소개했다. 全 前 대통령이 집권하고 미국을 방문하면서 있었던 외교비화다.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고 첫 해외 정상 초청자로 한국의 全두환 대통령을 선택했고, 全 대통령은 이 기회에 레이건 대통령을 움직여 일본으로부터 100억달러라는 거금의 안보차관을 얻어낼 획기적 발상을 했고, 결과는 40억달러를 얻어냈다는 내용이다.      全 대통령의 논리는 이랬다고 한다. "세계 2차대전 패전국인 일본이 어떻게 이런 풍요를 누릴 수 있게 됐나. 국제 공산 세력의 팽창 전략으로부터 한반도가 저지선이 돼준 덕분이 아닌가. 6·25의 특수(特需)까지 톡톡히 누리지 않았나. 따져 보면 일본의 평화와 번영에 대한 비용을 우리가 대신 지불해온 것 아닌가."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논리의 개척이요, 외교적으로 누구든 반박하기 어려운 논리다.     또한 이런 논리도 폈다고 한다. "한국의 안보는 동북아 안정에 기여하고 미국의 국익에도 도움이 된다. 주한미군을 철수하면 소련은 극동 지역에 주둔시키고 있는 군대를 유럽으로 이동시킬 것이다. 그러면 미국의 세계 전략도 수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주한미군의 주둔비를 50%이내에서 해결할 수 있었던 중요한 논리로 보인다. 아는 것과 현실화 시키는 것은 다르다.     全두환, 그는 지금 이 나라에서 국민적 왕따가 되어 있다. 단순한 왕따만이 아니라 틈만 나면 누구든지 나서서 해코지 하려 든다. 그의 장남은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양서(良書)들을 펴내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지만 전두환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대를 이은 왕따가 되어 있다. 본인의 비리로 감옥까지 갔다 온 김대중의 아들이 최근 야당 대표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다니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국가 기강과 도덕성이 엉망진창이다.      어디서 본 "우리나라 정치는 국회가 망치고, 경제는 노조가 망치고, 미래는 전교조가 망친다. 거기에 언론이 선동으로 나라를 쑥대밭 만든다"는 글이 생각난다. 그리고 보니 全두환 정권 때는 국회, 노조, 선생들, 언론이 건전했다. 지금의 국회, 노조, 전교조, 언론과는 너무나 많이 달랐다. 어용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는 이를 국익우선이라 말하고 싶다. 어용이든 뭐든 거짓이 아니라면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좋으면 좋은 것이다. 지금 저 국회, 저 노조, 저 전교조, 저 언론의 행태가 만족스러운가? 아마도 불만이 많을 것이다. 全 대통령은 국민들 대신에 저것들을 길들인 것이다. 국가와 국민들을 위하여.     덧붙임)    오늘 아침 최보식 기자는 용기있는 글을 썼고 조선일보는 용기있게 이 글을 올렸다. 대한민국에서 全두환 전 대통령의 치적을 긍정적으로 조명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이 기회를 살려 앞으로 5공화국에 대한 진실된 후속 조명이 있길 바란다. 내가 보는 5공화국은 功9 過1이다. 全두환이 나타나지 않고 兩金이 일찍 득세했더라면 朴정희의 노력은 제대로 펴 보기전에 꼬꾸라졌을 지도 모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97년 외환부도'와 '헬조선'이 그만큼 빨리 왔을 것이다.   

2016.5.6.

 

 

전두환 前 대통령의 회고록 출간을 기다리며 

 그의 회고록 출간이, 전후 사정이 밝혀지고 진실과 오인이 가려져 억울함이 풀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전두환 前 대통령(이하 존칭 생략)이 회고록을 준비하여 연내에 출간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반갑다. 설렘이라 할까, 약간의 흥분을 느끼게 된다. 한 시대를 달려오며 근현대사를 이끌기도 한 주역중의 한 사람이다. 그의 일생과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사람들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할 것으로 보인다. 한차례 뜨거운 논쟁이 벌어질 것이다.     전두환은 시대의 부름을 받기 전까지 훌륭한 학창시절과 훌륭한 군인의 길을 걸어왔다. 특히 軍 생활의 일화들을 살펴보면 힘들고 어려운 훈련에도 항상 대원들 앞에 서고 솔선수범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러 표창을 받았고 동료와 선후배간에 신망이 깊었다는 것이 그를 아는 사람들의 대체로 일치된 증언이다.    오래 전에 어느 전라도 출신 지인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전두환이 정치는 참 잘했는데…사람만 안 죽였으면." 사람을 죽였는지 안 죽였는지는 차치하고 그도 전두환이 분명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대를 직접 경함한 사람들 중에는 이런 사람이 많다.    그렇다. 그는 훌륭한 군인이요, 훌륭한 대통령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향해 (5.18사태의) "살인자"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고, "추징금 미납자"라는 손가락질을 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은 철이 든 사람이라면 대개 알 것이다. 그러나 그를 변호해 줄 사람은 보이질 않는다. 나 같은 장삼이사가 그게 아니라고 떠들어 봐야 비웃음만 산다. 안타까운 일이다.    얘기를 좀 바꿔 보자. 조선시대 학자이자 강직한 관료로 이름 있는 김려(金鑢)라는 사람이『한고관외사(寒皐觀外史)』라는 저서에서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선조 때 정승을 지낸 정탁(鄭琢)이라는 사람을 치하하는 내용으로 그가 이순신 장군을 구했다는 얘기(증언)다.     <-前略- 통제사의 이름은 순신(舜臣)으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천거하였다. 정읍현감으로부터 호남좌수사로 제배되어서는 계속해서 적함을 섬멸하였다. 그러나 서애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여러 방면으로 그의 단점을 말하였다. 때에 조정이나 재야가 바야흐로 왜장의 술수에 빠져 마침내 통제사를 군기(軍機)를 잃었다고 계청(임금에게 아룀)하여 잡아 와 국문하였다. 서애 역시 잘못 천거하였다는 죄를 받았다. 조정의 신하로서 감히 이순신을 변호하는 자가 없었는데, 유독 약포(藥圃) 정탁(鄭琢)만이 차자(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올려 억울한 상황을 지극히 진달하였다. 마침내 죽음은 면하였다. -後略->    이순신 장군이 개죽음 당할 뻔한 문턱까지 갔다 온 장면이다.     억울함이 있으면 밝혀져야 한다. 전두환 재임 시 일부에서는 '독재타도'를 외쳤지만 또 많은 국민들은 안전하고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다고 그를 칭송했다. 재임 중 두 차례 총선에서도 여당인 민정당이 지금 새누리당보다 좋은 성적을 얻었다. 국민 모두가 그를 미워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특정 세력에 의해 오랜 시간 지속적인 낙인 찍기에 이제 국민적 왕따가 되고 말았다. 그의 회고록 출간이 전후 사정이 밝혀지고 진실과 오인이 가려져 억울함이 풀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정탁(鄭琢) 같은 사람이 나타나길 바란다.    덧붙임)    박근혜 대통령도 그러는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 어떤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현직 대통령으로서 전직 대통령에게 그렇게 모질게 대하는 게 아니다. 나는 박 대통령에 대해 큰 두 가지 불만이 있는데 하나는 反日 문제고 하나는 바로 이 反전두환 문제다. 이 두 가지에는 다른 듯하지만 같은 맥이 있다. 독하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표독한 일면이 여실히 드러난다. 군주는 엄격하게 보여야지 독하게 보이면 곤란하다. 이런 면이 알게 모르게 국민들에게도 차갑고 독하게 느껴져 정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2016.4.22.

 

 

전두환 前대통령, 외교·안보에도 탁월한 안목 

 한국의 안보균열(韓美동맹 무력화)을 최종목표로 하는 북한과 이를 추종하는 친북좌익 세력의 수법(韓日간 이간질)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전두환 前대통령은 탁월한 안목으로 제대로 된 보좌진(김재익 경제수석)을 발탁하여, 국가경제를 질적으로 레벨업시키는 탁월한 업적을 올렸다. 그런데, 17일 외교부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전두환 前대통령은, 경제분야에서만 탁월한 게 아니었다. 문서는, 한국의 안보균열(韓美동맹 무력화)을 최종목표로 하는 북한과 이를 추종하는 친북좌익 세력의 수법(韓日간 이간질)을 전두환 前대통령이 훤히 꿰뚫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1980년대 외교문서에는 전두환 前대통령이, '(對日 역사교과서 공세는) 북한이 조총련과 일본 좌익계 노조 및 지식인 등을 이용해 韓日간의 이간을 노리는 것이니 한국 언론은 이에 편성(편승?)하지 않도록 협조하시오'라고 자필로 쓴 것이 나온다. 아울러, 일본 內 교포 등의 反日활동(지장 날인 반대) 또한 韓日간 이간목적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신중한 대응을 요한다는 내용을 자필로 썼다.일본의 명백한 역사왜곡(교과서)과 일본 內 교포들의 인권관련 이슈(지장 날인)는 가볍게 볼 수 없는 문제지만, 전두환 前대통령은 아울러 그 이면에 도사린 불순 세력의 나쁜 의도를 충분히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전두환 前대통령은 경제뿐 아니라 외교·안보에 있어서도 탁월한 감각이 있었던 셈이다. 만약 전두환 前대통령이 오늘날 임기중인 현역 대통령이라고 가정해 본다면, 일부 단체에 의해 추진된 '위안부 문제 이슈화'에 대해서는 초반부터, '韓日간 이간질로 韓美日 공조에 균열을 낸 후, 미국과도 멀어지게 하려는 속셈이 보인다. 절대 놀아나면 안된다'고 단호하게 대처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과 같이, 한국이 美國과 소원해지고, 日本과 멀어지는 일도 결과적으로 없었을 것이다. 탁월한 안목으로 좋은 보좌진을 기용하여 성공하고 불순세력의 韓日간 이간책에 넘어가지 않은 전두환 前대통령은, 오늘날 박근혜 대통령이 이상한 노선을 표방한 보좌진을 임기 초부터 가까이 하고 일부 단체가 의도한 韓日간 이간책에 사실상 휘말린 것을 바라보면서, 큰 한숨을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라에 功이 많은 이러한 전두환 前대통령이, 이런 수준의 박근혜 대통령 정부에 의해, 모진 고초(재산 압류 등)를 당했으니, 세상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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