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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중윤 [ 全仲潤 ]
작성자 관리자 [2020-02-04 15:2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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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중윤(全仲潤)

 


 

출생-사망 : 1919830, 강원도 철원 - 2014710

 

가족 : 아들 전인장

학력 :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

경력

2010.03 삼양식품 명예회장
1997.01~1997.12 이북도민회중앙연합회 대표의장
1982.02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
1981.03~2010.03 삼양식품 대표이사 회장

전씨중앙종친회 13~14대 회장

 

실업가. 전 삼양식품 명예회장. 1919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61년 삼양식품을 창업하고 상공부로부터 5만 달러를 받아 라면공장을 세워 국내 최초의 라면인 '삼양라면'을 생산했다. 1967년 경희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88년 강원대학교에서 명예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57~61년 동방생명보험() 부사장, 1961년 제일생명보험() 사장, 1969~76년 한국식품공업협회 회장, 1970~86년 이건식품문화재단 이사장, 1974~83년 학교법인 진명학원 이사, 1975~80년 한국기업목장협회 회장, 1979~80년 명덕문화재단 이사장, 1981~88년 전씨중앙종친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80년대에는 삼양식품을 종합식품기업으로 성장시키고 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2010년 장남 전인장 회장에게 경영권을 승계하고,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대통령표창, 산업포장, 동탑·은탑·금탑 산업훈장 등을 받았다.

[출처 다음백과에서]

 

삼양식품 전중윤 회장의 청년시절 이야기

전중윤은 1919년 김화군 임남면에서 부유한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는 친구들과 장난치다가 골절상을 당해 1년간 요양치료를 하게 되었다. 그는 요양원에서 기독교를 접하면서 크리스천이었던 호사카 히사마츠라는 일본인을 알게 되었다. 호사카는 경성방송국의 3대 이사장을 역임해 조선의 방송을 발전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골절이 거의 회복되자 호사카는 총명한 전중윤을 경성으로 안내했다.
청진과 영등포에서 우체국장을 한 적이 있는 호사카는 전중윤을 경성의 한 우체국 서무과에 일하게 해주었다. 전중윤은 선린상업학교 야간학부에서 공부를 병행하면서 2년 뒤 조선총독부 체신국 보험과에 발령을 받았다. 이는 그가1950년대 동방생명이나 제일생명 등 한국 보험업계를 이끌어갈 경영 수업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난 지 10년이 되던 1944년 두 살 위의 형과 형수가 전염병으로 급사했다. 전중윤은 철원 근처 우체국으로 전근을 지원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노쇠한 아버지는 의연한 표정으로 둘째의 나약함을 질타하고 혼란한 시기에 가문을 지키고 동포를 이끌 수 있는 길을 걸어가라고 격려했다. 이를 계기로 전중윤은 지방 명문가 차녀인 이계순과 혼례를 올렸다.
다음해 해방이 되자 총독부 체신국에 근무했던 경력 덕분에 전중윤은 미군정하에서도 체신부행정관으로서 자재공급업무를 담당했다. 서울에 살면서 수시로 강원도를 오가며 부모님과 조카를 챙겼다. 그러나 북쪽 토지개혁이 시작되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토지가 몰수되자 전중윤은 체신부에 사표를 내고 훗날 이천 전자공업이 되는 도시바 전기 공장에 일자리를 잡았다. 신생국의 장래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으나 연로한 부모를 북에 남겨둔 채 신사업에 몰두하기 어려웠다.

6.25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반동분자로 몰려 처형됐다. 어머니와 조카는 국군의 북진에 쫓겨 더 북쪽으로 옮겨간 후 행방이 묘연했다. 1.4 후퇴 때 전중윤은 영등포역에서 간신히 기차를 잡아타고 아내와 딸과 함께 전북 이리(익산)로 향했다. 체신부 시절의 동료가 그곳 우체국장으로 재직 중이었기 때문이다. 수중에는 20만원(지금의 700만원)이 전부였다.
 

전중윤은 삼양라면의 창시자다. 전쟁이 끝나고 10년도 안 됐을 당시, 서민들은 꿀굴이 죽을 먹으며 말 그대로 목숨을 연명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음식을 모두 섞어 되직하게 끓여낸 5원짜리 꿀꿀이죽, 이것 하나도 사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전중윤은 남대문 시장에서 배곯는 서민들이 꿀꿀이 죽을 먹는 광경을 보고 식량문제를 해결에 나서야겠다는 다짐했다.

그는 번뜩 과거 일본에서 라면을 먹었던 경험을 떠올렸다. 밀가루 가락 반죽을 튀겨낸 라면은 맛있으면서도 조리가 간단해 보였다. 즉시 일본의 묘조(明星)식품을 찾아간 전중윤은 한 달가양 라면 제조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일했다.

뜬금없이 공장에 찾아와 라면 제조법을 가르쳐달라며 일하는 한국인 사내에게 비법을 전수해주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묘조(明星)식품의 오쿠이(奧井) 사장을 만나 한국의 식량 사정을 이야기하며 도와달라고 간청하였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많이 생각했다. 나는 한국에 가본 일도 없고 아직 국교정상화도 안 됐지만 한국 전쟁이 일본 경제를 재건해준 셈이다. 당신들은 불행했지만 우리는 한국전쟁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 내가 민간 베이스로 기술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시설도 싼 가격으로 제공하겠다.”

 

오쿠이 사장은 한 라인에 6만 달러라던 라면 제조시설을 두 라인에 25000달러로 즉석에서 발주해 주었다고 합니다.

면과 스프의 배합에 관한 일화도 있습니다.

전중윤은 일본 현지에서 라면제작의 전 공정을 배우지만 일본인 기술자들은 끝내 면과 스프의 배합 비율은 가르쳐주지 않더랍니다.

전중윤씨는 끝내 비율을 못 배우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오쿠이 사장은 전중윤의 열정에 감명 받아 그가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비서실장을 시켜 공항에서 봉투 하나를 전종윤씨에게 전해줍니다.

비행기에서 뜯어보라는 그 봉투 안에는 기술자들이 펄펄 뛰며 비밀로 했던 면과 스프의 배합비율이 적혀있었습니다.

드디어 1961년 삼양식품을 창업한 전중윤은 관련부처를 설득해 어렵게 5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그는 1963915일 비로서 삼양라면을 출시했다.

이때 삼양라면 출시 가격은 10원이었다.

 

5만 달러 지원의 일화

전중윤은 재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미수복경가도민인 개성상인 실력자 이정림을 찾아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찾아가보라는 조언을 듣는다. 전중윤은 정보부에 근무하는 지인을 통해 중앙정보부장실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김종필이 말했다.

전 사장, 자기 배만 채우려는 생각밖에 없는 사업가들을 보는 것은 구토가 나지만, 국민의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헌신하려는 당신 같은 경제인들은 얼마든지 대환영입니다.”

JP의 점잖은 말투와 인상을 보고 순간, 거칠고 다혈질인 군인일 거라는 선입견이 순간에 사라졌다.

전중윤은 이야기를 돌려서 하기보다 김종필 정보부장을 만나자마자 샘플로 들고 온 제품을 직접 보여주었다. 어눌한 언변보다는 훨씬 효과적일 것 같았다.

가방 안에서 일본 인스턴트 라면을 꺼낸 전종윤은 시식을 권했다. 김부장은 전중윤이 시키는 대로 그릇에 끓는 물을 붓고 잠시 기다렸다가 면 한 젓가락을 입에 가져갔다. 그 순간 정치권력의 각축장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표정을 띠며 입고리가 찢어질 듯 탄성을 질렀다.

오오! 그동안 일본을 몇 번이나 갔는데 이런 것 처음이요. 박정희 의장한테도 한번 드셔보라고 할까. 아주 마음에 들어 하실 것 같은데.”(: 실제로 면류를 즐겼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6년 가을 어느 날 삼양라면 맛을 본 뒤 한국 사람은 국물이 얼큰한 것을 좋아하니 고춧가루가 좀 더 들어가면 좋겠다.”는 조언을 했습니다.(삼양식품 사사(社史에 기록된 내용)

국민들 배 곯리지 말자는 전중윤씨의 호소에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세도를 가진 JP는 마침 농림부가 가지고 있던 10만 달러 중 5만 달러를 전중윤씨에게 사도록 도와줍니다.

 

이후 삼양라면은 1969년 업계 최초로 베트남에 라면을 수출하는 기업이 되었다. 그 후 세계60여 개국에 삼양라면을 수출함으로서 세계화에 기여하는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삼양식품은 연매출 2,493, 영업이익 310억의 실적을 달성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삼양식품주식회사(三養食品株式會社)대한민국의 식품회사로 1961년에 설립되었다. 대한민국 최초로 라면을 생산한 회사이다. 창립자 전중윤이 국민들의 배고픔 해결을 위해 한국 최초로 일본에서 라면생산기술을 도입해 공장을 세웠고, 대관령에 삼양목장을 세워 한국축산 산업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출처] 삼양식품 전중윤 회장의 청년시절 이력|작성자 강원 김화군홍보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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