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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택보 [全澤珤]
작성자 관리자 [2020-02-04 15: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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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택보 [全澤珤] = 세계를 꿈꾼 수출산업 개척자




 

출생- 사망 / 19011980(함경남도 문천 출생)

실업가. [개설] 본관은 정선(旌善). 호는 설봉(雪峰).

기독교 신앙인

천우사 사장

 

전택보 사장은 천우사를 창립, 조선일보 대표이사, 상공부장관,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등을 지내며 경제·외교·사회 분야에 업적을 남겼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4년 문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말 부모를 따라 북간도(北間島)로 이주, 용정(龍井)에 있는 영신학교(永新學校) 고등과를 1918년에 졸업하고, 이듬해 모교인 영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0년 용정중앙교회에서 김정신(金貞信)과 결혼 현재(賢宰억재(億宰순재(順宰) 3남을 두었다.

1929년 일본 고베상업고등학교[神戶商業高等學校]를 졸업한 뒤, 함남금융조합·조선일보사 등에서 일하다 간도 교하현(蛟河縣) 부근의 500정보를 구입, 선만주식회사(鮮滿株式會社)라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하여, 194510월 단신 월남하였다.

1945년 미군정청 이재과장을 맡았다 그만두고, 1947년에 천우사(天友社)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사업에 투신, 무역업을 개척하였다. 서울로 환도한 뒤 천우사의 무역업만으로는 발전의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생산업체를 건설할 생각을 굳혔다.

이것이 1954년 대성목재공업주식회사(大成木材工業株式會社조선피혁주식회사를 인수하게 된 동기이다. 그는 국내 동업자끼리의 경쟁보다는 해외시장 개척에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서 19603월 우리나라 최초로 합판을 수출하게 되었다. 그 뒤, 합판 수출은 우리나라 수출의 주 품목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64년 신진완구주식회사·신진수출주식회사(新進輸出株式會社)를 설립하였고, 그 해 천우사는 552만 달러를 수출하여 국내 민간기업 중 1위를 차지하였다.

1965년에는 조선피혁을 강남공업(江南工業)으로 개칭하고, 한국축산개발주식회사와 삼익선박(三益船舶)을 설립하였고, 2회 수출의 날 수출실적 제1위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는데, 이 기록은 1967년까지 이어졌다. 천우사의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탓으로 신앙심이 두터웠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폭넓은 사회활동을 하였다.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이사로 취임한 것을 비롯해서, 1953년 조선일보사 대표 취재역, 1957년 유네스코후원회 회장, 1959년 주한 덴마크 명예영사, 1961년 포풀라협회 회장, 1963년 국제법학회 부회장, 1963년 한국신학대학 이사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였다.

한편, 재계에서도 8·15광복 후 대한상의(大韓商議) 재건운동, 한국무역협회 창립, 한국경제협의회 창립 등에 주도적 역할을 하여 경제계의 지도자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4·19혁명 뒤 허정(許政)과 함께 과도정부 수립에 공헌한 인연으로 상공부장관에 오르기도 하였으나, 35일간의 단명으로 끝났다. 정부는 그의 국민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적과 민간경제외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근대경영 선각 전택보

 

절박한 모습에다 진솔한 마음, 뛰어난 자질에다 경륜 또한 갖추시고 한평생 경제 입국에 앞장을 서졌었네, 이 땅의 모진 풍상 견디시고 이기시며 공익과 봉사 속에 몸 마음 바치시니 그 공덕 눈 봉우리인 듯 드맑은 빛을 뿜네.

<시인 구상이 전택보에게 보낸 헌사이다.>

 

한국 근대경영의 고난과 시련을 오직 강한 의지로 이겨내며 바르게 살다 간 경영인 전택보

(1901~1980) 그는 이익만 탐하는 한낱 장사치가 아니라 기업인으로서 철학과 정신의 지도자였다. 조국의 산업 부흥을 위해 경제협의회를 창설했고 보세가공 등 독창적 수출산업을 개척했으며, 포플러운동 제창자이자 축산 근대화의 선구자였다.

 

전택보는 서울이 수복되자 YMCA 재건에도 힘을 다 했다. 서울 YMCA 건물은 전쟁 통에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그때 뉴욕의 자 YMCA 국제위원회에서 전후 각국 YMCA를 재건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여 500만 달러를 마련했다. 그중 한국에 배당된 금액은 50만 달러였고, 서울 자 YMCA분은 35만 달러였다. 이에 호응해 국내에서도 35만 달러를 목표로 모금 운동을 벌여 이를 뉴욕 자 YMCA모금분과 합쳐 서울 YMCA 건물을 신축하기로 해서, 전택보는 YMCA 재건위원회를 조직하고 필요한 자금을 모집했다.

위원장에는 이용설 박사가 선임됐는데, 이승만 대통령도 자 YMCA 학생부 간사 시절 이래 자 YMCA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기 때문에 그 취지에 적극 찬성했다. 본디 자 YMCA 건물을 크게 짓는다고 7층으로 지었지만 나중엔 호텔경영 등 용도가 많아져 층 하나를 도 높였다. YMCA 건물이 완공된 뒤 전택보는 8년 동안 자 YMCA 이사장으로 일했다.

전택보가 운영하는 천우사는 1960년대 6년 동안이나 줄곧 수출 최고상을 수상, 해외 시장 개척에서 한국의 신용으로 통했다. 1970년대 들어 천우사는 무역업에서 쌓은 경험과 미국 시장에서의 기반을 토대로 수튜어트데이비스사와 손잡고 보잉 707기를 빌려 미국과 서울 간 항공화물 수송을 시작했다.

또한 세계적 전자회사인 필립스와 합작으로 전자제품은 물론 컴퓨터 부품까지 수출해 생산했다. 이미 천우사는 19509.28 서울 수복 직후 필립스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서 처음으로 탁상용 라디오를 만들어낸 일이 있었으며, 그 인연이 이어져 필립스와 기술제휴로 김포 등촌동 공장에서 전자제품과 부품을 생산해 대미 대일 수출을 계속 해왔다.

1970년에는 상공부로부터 TV부품 수입을 승인받아 오류동에 54638m2(16528) 공장 대지를 마련하고 한 해 3만대 생산 목표를 세었다. 그 무렵 한국의 TV생산업체는 모두 도시바 히타치 샤프 산요 등 일본 업체와 기술 합작을 하고 있었는데, 천우사는 필립스와 기술제휴를 함으로서 유럽 회사와 제휴한 첫 업체가 되었다.

 

전택보는 만년에 세상사는 지혜를 이렇게 말한다.

국가 대 국가, 민족 대 민족, 개인 대 개인의 끝없는 다툼과 경쟁 속에서 인류 역사와 문명은 발전해 왔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적자생존의 법칙에 얽매여 있다.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수많은 시험을 치르며 경쟁한다. 바늘구멍 취업문을 뚫는 데 성공해도 끝이 아니며, 일터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해나가야한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외적으로 북한과 맞서고 있으며 중국 일본 러시아 등 강국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 내적으로는 협소하고 각박한 국토에서 5000만 인구가 선진국 수준의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욕망을 갖고 있기에 경쟁은 더욱 극심하다

 

한국에서의 경쟁은 남을 거꾸러뜨리고 자신만 살아남겠다는 경쟁이 대부분이다. 정치인들은 국민을 잘살게 하겠다는 뚜렷한 정책 발표는커녕 구저 경쟁자를 쓰러뜨리기 위한 반대와 공격에만 급급하다.

 

기업인들도 국가 경제 발전에 어떻게 공헌할까를 생각하기보다 동업자를 헤치는 데 열중하는 예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은 세계가 하나가 되어가고 있으며, 우리의 활동 무대는 온 세계에 걸쳐 있다. 남을 짓눌러 없애는 경쟁이 아닌 남보다 커져서 잘살게 되고, 경쟁에서 뒤쳐진 무리까지 끌어안는 인의(仁義)의 경쟁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욕망은 무엇인가, 큰 부자가 되고 싶기도 하고, 절대 권력을 갖고 싶기도 하다. 큰 재산이 있으면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한 뒤에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큰 권력이 있다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움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게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같이 빈곤과 부정이 심한 나라에서 빈곤을 없애고 정의를 구현한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하고 나의 갈 길을 다 달렸다고 말한다. 세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승리자로서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을 느낄 것이다.”

 

1980718일 전택보는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은 기업가 전택보를 이렇게 회상한다.

천우사를 설립하여 이 나라 해외무역의 선구자가 되었고, 건국 이후 최초의 무역사절로 동남아 시장을 개척 헸으며, 한국무역협회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경제단체를 이끌어 경제계 힘을 국가발전에 집약했다. 뿐만 아니라 교육계 종교계에도 그의 도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이 사회가 잘되는 일이라며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온 힘을 다했다. 이러한 선구자적 봉사활동은 실로 신상(神商)이라는 칭송이 아깝지 않다.”

 

현대 그룹을 만든 정주영 또한 인간 전택보를 이렇게 말한다.

언제나 불의나 비리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인생을 진실하게 신의를 지키며 살아갔으며, 사업에 바쁜 와중에도 경제계분만 아니라 정치 언론 문화 종교 자선사업 이민(移民)민간 외교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각 분야에 걸쳐 폭넓은 사회활동을 통해 선각자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의 철학과 고귀한 정신은 오늘에 사는 우리가 본받아야할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설봉전택보전기(설봉문화재단설립준비위원회, 1981)

[네이버 지식백과] 전택보 [全澤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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