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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부사公 전공간 묘비명(府使公 諱 公侃 墓碑銘)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2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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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전공간 묘비명(府使公 諱 公侃 墓碑銘)

[1488-1552]

 

()의 휘()공간(公侃)이요. ()는 숙평(叔平)이고 호()를 창봉(滄峰)이라 하다. 정선인(旌善人)이요

()의 휘()성명(性命)이니 조산대부 행 동몽교관(朝散大夫 行 童蒙敎官)하고 조()의 휘()민행(敏行)이니 사헌부 감찰(監察)이고 증조(曾祖)는 휘() ()이니 통훈대부 행 구례현감(通訓大夫 行 求禮縣監)이다.

()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참봉(參奉) ()의 따님이다 

 

성종 무신(戊申) 716일에 공()을 낳으시니 재덕(才德)이 과인(過人)하고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두터웠다. 중종 정축(丁丑)에 별시 문과(別試 文科)에 발탁(拔擢)되어 급제하였으니 처음에 주서(注書)로 근무하였습니다.

6품으로 승진(陞進)하여 호조(戶曹) 병조(兵曹) 형조(刑曹) 3조정랑(三曹正郎)을 역임하고 갑신(甲申)에 개성판윤(開城判尹)을 거쳐 경인(庚寅)에 함흥판관(咸興判官)을 배()하고 병신(丙申)에 강동현령(江東縣令)을 거쳐 경자(庚子)에 이조정랑(吏曹正郎)으로 들어왔다가 익년(翌年)에 평산부사(平山府使)를 배()하고 공()은 명종 임자(壬子) 915일에 졸()하시니 향년(享年)65세라.

()은 강릉 김세좌(金世佐)의 따님을 취()하니 명주군왕(溟州君王) 주원(周元)의 후손(後孫)이다. 연산(燕山) 병진(丙辰) 29일 생()이며 명종 경술(庚戌) 1013일에 졸()하시다 향년(享年)55세라.

 

13여를 두시니 남()(,)이라 하고 양주훈도(楊州訓導)지냈으며, 강진사(姜進士) ()의 여()에게 장가들어 2남을 두었습니다.

()의민(義民)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이 이조정랑(吏曹正郎)에 이르렀고 차()의석(義碩)이었습니다.

()는 승지(承旨) 류춘번(柳春蕃)과 그 다음은 도사(都事) 이공권(李公權),그 다음은 판관(判官) 최인좌(崔仁佐)에게 각각 시집보냈다.

()을 성산 내구산 서록 경좌원(城山 內邱山 西麓 庚坐原)에 장사(葬事)하였다.

 

()의 자() ()과 경림(景臨)은 선공(先公)이 교유하신 신잠(申潜)선생 문하(門下)에 같이 수학하였으므로 이경림(李景臨)과는 생사(生死)를 같이 할 수 있는 막역(莫逆)한 사이였습니다. 이제 공()의 명()을 청하는데 어찌 감()히 불문(不文)으로 사양(辭讓)하겠는가? 인하여 제()를 짓고 명()을 하여 말하기를

 

높은 훈공(勳功)과 성대(盛大)한 업적(業績)은 노소(老少)가 다투어 전하고

음덕(蔭德)과 여경(餘慶)은 자손(子孫)에게 서로 어어 졌더라.

푸르고 높은 산과 담담한 찬 샘물은 체백(體魄)을 편안하고

만년(萬年)까지 편안(便安)하게 하리라

 

통정대부 행 평창군수 이경림 찬(通政大夫 行 平昌郡守 李景臨 撰)

 

창봉공 비석 복립기(滄峰公 碑石 復立記)

세대가 오래되고 먼 잠속에 분묘전(墳墓前) 비명(碑銘) 표석(標石)이 불행(不幸)하게도 훼손(毁損)된 지 장구(長久)하여 방손(傍孫)과 외손(外孫)이 상의하여 묘비(墓碑) 재원(財源)을 조성 치석 복립(治石 復立)을 계획하고 설치의 감격을 득()하였노라

 

 

 

고종 갑오(서기 1894) 3월 일

12세손 병주 병권 병집(12世孫 秉柱 秉權 秉楫)

16세손 류규봉(16世孫 柳圭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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