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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경공 諱 보문 행장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20: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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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휘()보문(普門)이요. 성은 全氏로 계통은 정선에서 나왔으니

시관조(始貫祖) () ()이 봉익대부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정선군(旌善君)에 봉작(封爵)되었으므로 자손이 정선으로 관향(貫鄕)을 삼았다.

 

그 후 8세에 이르러 휘() 이갑(以甲)의 호()도원(桃源)이며 고려 태조를 쫓아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축조하여 양주(楊州) 광주(廣州) 청주(靑州)등지의 적종(賊從)을 평정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여 여러 공신을 책훈(策勳)함에 이르러 공()에게 상서복야(尙書僕射)의 관직을 내렸다.

아우 죽산군(竹山君) 충강공(忠康公) 의갑(義甲)과 더불어 팔공산(八公山) 동수(桐藪)에서 견훤(甄萱)을 토벌하다가 함께 순절하였다. 태조께서 매우 슬퍼하시어 의경익대정사공신(毅景翊戴定社功臣)을 추봉함과 아울러 삼중대광(三重大匡)을 가증(加贈)하시었다. 또한 충렬(忠烈)의 시호(諡號)를 내리시고 충렬사(忠烈祠)를 창건(刱建)하여 제사를 지내 주었다.

조선 정조 무술(서기 1778)에 대구에 한천서원(寒泉書院)을 건립하여 숭절(崇節)賜額을 받아 충강공과 함께 향사(享祀)하였다.

 

누대(累代)를 전하여

 

() ()은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니 공()에게 고조(高祖)됩니다.

 

증조(曾祖)는 휘() 정경(禎卿)이니 금오위좌별장(金吾衛左別將)이요.

 

()는 휘() 일장(日長)이니 감문위상호군(監門衛上護軍)이요.

 

()는 휘() 자공(子公)이니 순문위상호군(巡門衛上護軍)이시다.

()께서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으며 장성함에 행동이 단정하고 침착하였으며 학문을 익히고 문장을 닦아서 명망이 널리 드러났었다

또 어버이를 섬김에 사랑과 공경을 겸하여 지극하였으니 친상(親喪)을 당하여 슬퍼함이 예제(禮制)를 넘어 거의 본성을 잃을 정도였으며,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슬퍼하면서 죽()을 먹으면서 시묘(侍墓)를 살면서 상기(喪期)를 마치었습니다. 당시에 순수한 효자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고려사를 살펴보니

공민왕 2癸巳(서기 1353)에 공()이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어 조일신의 반역을 꾀한 죄를 탄핵하여서 마침내 조일신이 주살(誅殺)되어서 조야(朝野)가 크게 기뻐하였다.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승진하고 곧바로 하정사(賀正使)로 선임되어 원나라로 들어가서 상주(上奏)에 능하고 응대(應對)에 민첩하였다.

원조(元朝)의 대신들이 모두 입을 모아 칭송하였고 서로 다투어 교류(交遊)를 청하였다. 환국(還國)하는 날에는 시를 지어 주며 도문(都門)밖까지 전송하는 분이 많았다.

 

공민왕 5丙申(서기 1356) 삼사좌우사(三司左右使) 좌우복야(左右僕射)에 제수(除授)되었습니다.

 

공민왕 7戊戌(서기 1358)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 平章事)에 제수(除授)되었습니다.

그 후 외직으로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나가 재물을 탐하고 백성을 혹사하는 수령을 축출(逐出)하고 민생을 도탄에서 구제하니 이속(吏屬)과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공민왕 14乙巳(서기 1365)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제수되었습니다.

이듬해 丙午(서기 1366)에 다시 하정사(賀正使)로 원나라에 갔습니다. 원나라 황제가 공()의 예모(禮貌)의 공손함과 언의(言議)의 정당함을 사랑하사 특별히 한림 시강학사 지제고 동수국사(翰林 侍講學士 知製誥 同修國史)를 제수하셨으니 그 총애와 예우가 지극하였다.

 

이 해(서기 1366) 5庚子일에 공()께서 졸()하시니 주상(主上)께서 몹시 슬퍼하시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부의(賻儀)를 내리시고 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토록 하시었다. 안경공(安敬公)으로 증시(贈諡)하셨으니 그 뜻은(諡法) 이러 하였다. 백성들이 그 덕을 힘입어 편안함이 이요 선행이 법도에 합당함으로 이니라

隱卒(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는 것)의 은전(恩典)이 지극하여 남은 유감이 없다고 이르겠다.

묘소 및 배위의 생졸(生卒)은 자상하지 않다.

 

一男을 두어 우화(遇和)이니 예문관대제학 삼중대광 문하시중 평장사(藝文館大提學 三重大匡 門下侍中 平章事)이며 추충보절동덕 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 贊化功臣)이다. 옥천황씨(沃川黃氏) 영삼사사(領三司事) 덕보(德甫)의 따님과 결혼하였으며, ()의 위계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에 봉해졌다.

 

3명의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 ()은 호는 두암(杜庵)이고 도첨의좌참찬 보문각대제학(都僉議左參贊 寶文閣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평간공(平簡公)이다.

 

차남 ()은 호가 수헌(睡軒)이며 생원으로 문과에 등제하여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성산백(星山伯)을 봉받았으며, 고려의 국운이 다함에 이르러 성산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그 사는 곳을 이름하여 사와동(謝臥洞)이라 이르니 목은 이색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멀지않은 성산이 어느 곳이뇨?

남도로 와서 두문동(杜門洞)을 다시 보겠도다!

라고 하였다.

 

차남 (+)은 문하시중 평장사이다.

 

증손, 현손이하는 심히 많아 기록하지 못한다.

 

()은 타고난 자품(姿禀)이 영특하고 활달하였으며, 온후함이 양옥(良玉)같았으며 순수함이 정금(精金)같았다. 정성스런 마음가짐이 있기에 인자함과 관용을 정신을 지니고 있었으며, 앞장서서 실천하는 곧은 기개를 지내고 있었다. 덕성에 근본하고 학문을 닦아 심지(心志)를 세우고 행실을 절제함이 다 규도(規度)가 있었다.

 

집에 있어서는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리는 도리에 힘쓰고, 고을사람들과 관계에 있어서는 남을 폄훼(貶毁)하고 칭찬하는 입을 경계하였다. 초상을 치름에 있어서는 불도(佛道)의 장례를 행하지 않았으며 조정에 출사해서는 꺼리지 않고 바른 말을 하는 절도(節度)를 다하였다.

 

비록 재상(卿相)의 지위에 있었으나 의복과 거실은 선비로 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집안 식구들은 춥고 배고픔(飢寒)을 면치 못하였지만 공()은 달리 부귀영화를 누릴 뜻을 두지 않았다.

그 청렴 검약함이 이와 같아서 세상에 한번 뜻을 얻어 아름다운 비단을 밟고 다니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거들먹거리며 이빨을 쑤시는 사치를 즐기는 자와는 거리를 멀리 했으니 학문의 독실함과 소신을 지키는 확고함이 아니라면 어찌 위와 같이 처신하였겠는가?

 

살아서는 세상의 추앙을 받았고 돌아가셔서는 易名(시호를 받음)의 특전을 받았음이 고려사 및 가보(家譜)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백세(百世)에 증명하고 믿음이 되어(徵信) 훌륭한 덕의 칭송이 더욱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찌 행장을 문자로 기록하여야만 무궁히 전해지겠는가?

 

대개 선현의 행장을 기술함에 있어서는 마땅히 언행(言行)이 법도에 맞는 군자의 훌륭한 글이어야 합니다. 돌이켜 보건데 경환(瓊煥)은 그럴만한 사람이 못되니 어찌 후손의 청탁을 감당하겠는가? 이에 굳이 사양하였으나 끝내 사양을 얻지 못하고 가져온 가장(家狀)을 삼가 간략히 바로잡아 위와 같이 서술하였다. 후인(後人)들의 고증(考證)을 하는 바 참람하고 망령된 죄를 도망할 수 없도다.

 

庚午(서기 1990) 5월 하순에 礪山 宋瓊煥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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