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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밀직부사 감천군 전언, 출척사 판서 전종간 비문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20: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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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씨 시조의 휘는 이시니 백제 온조왕을 보좌한 십제공신으로서 환성군으로 피봉되었고, 2세 휘 호익은 병상(兵相) 벼슬을 지내셨으며 3세 휘 은 한조(漢朝)에 입사(入仕)하여 표기대장군을 배하여 관서홍농후(關西弘農候)로 수봉하시었고 4세 휘 순성은 태부(太傅)벼슬을 지내셨으며 5세 휘 여균 6세 휘 운교 7세 휘 원근은 각각 상서(尙書)벼슬을 지내셨으며 휘 원근이 상서 나홍우의 여()와 결혼하여 휘 을 낳으셨으니 이 분이 8세이며 관이 정선군에 피봉되었다. 묘는 강원도 정선군 낙동리 서운산 간좌원(艮坐原)에 있으며 군부인(郡夫人) 내성(奈城) 신씨의 묘도 동원 상광(同原 上壙)이다.

 

9세 휘 방춘삼사태상경(三司太常卿)이시고, 10세 휘 경지는 통직랑 벼슬을 지내셨으며, 13세 휘 억균은 사정원윤(司正元尹)이시고 14세 휘 천기는 병부랑(兵部郞)과 중서서원박사(中瑞書院博士)로서 2남을 낳으시니 15세 장남 휘 우상은 광문박사(廣文博士)이시고 차남 휘 종도는 승상(丞相)이시다.

 

우상2남을 낳으시니 16세 장남 휘 이갑은 시호가 충렬이며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한 개국공신으로 정선군이시고, 차남 휘의갑은 시호가 충강이고 죽산군이시고 충렬공 휘이갑충강공 휘의갑二忠公 단소는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 卯坐原에 있습니다.

 

17세 휘 보인은 충렬공 휘 이갑로 관이 상서좌복야에 이르고 시호가 문경으로 2남을 낳으시니 18세 장남 은 관이 고려 현종조에 밀직부사였고 차남 은 낭장이셨다. 18세 낭장19세 휘 석조로 관이 병마도통사이시고 20세 휘 은 소윤(少尹)이고 21세 휘 지수는 낭장이고 22세 휘 은 문과 진사이고 23세 휘 유적은 소감(少監)이며, 24세 휘 ()은 감무(監務)이고 25세 휘 원길은 대호군이시며, 26세 휘 은 호부상서이고 27세 휘영의지후우사간(祗候右司諫)이셨다.

 

영의2남을 낳으시니 28세 장남 휘 은 관이 중서사인(中書舍人)이고 29세인 병마사 휘 (+)와 휘이도을 낳으시고 28세 차남 휘 은 밀직부사이시다.

 

29세 휘이도는 공민왕조에 안동병마사, 함주수장(咸州守將), 전공판서(典工判書),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하였다.

30세 휘병마사 휘 (+)의 아들이며, 관이 밀직부사로

고려 충숙왕8(1321) 辛酉 4월에 왕을 배종하여 원나라에 입조한바 있다.

원나라에 있을 때 충숙왕 9(1322) 壬戌 3월에 원나라 황제는 심왕(瀋王)의 참언(讒言)으로 충숙왕을 꾸짖고 국왕인장(國王印章)을 빼앗았다. 이는 고려국을 원의 성()으로서 합병책략이었다. 밀직부사 전언 등 왕을 배종한 신하는 충숙왕을 도와 원나라 황제에게 합병책략의 부당성을 극구 역설하여 좌절케 하고

충숙왕 11(1324) 甲子에 원나라 황제로 하여금 국왕인장을 되돌려 주게 하여 다음해 乙丑에 충숙왕과 함께 환국하게 되었다.

환국한 충숙왕은 충숙왕 13(1326) 丙寅 7월에 전언의 공()을 높이 치하하여 1등공신으로 삼아 토지와 노비를 내리고 부모처자에게도 작()을 주고 감천군(甘泉君)에 봉하였고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에 임명하였습니다.

 

31세 휘 종간(宗幹)은 감천군 휘의 아들로 고려 충렬왕 24(1298) 戊戌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영오(穎悟)하고 골상이 비범하였으며, 성품이 호탕(豪宕)하여 매사에 구애됨이 없었다. 어릴 때에는 수렵을 좋아하였고 성년이 되어서는 향교에 수학하면서 분발하여 독서하면서 작문, 문장구성 등에 월등하였습니다. 정문(程文)에도 능하였다.

 

충숙왕 17(1330) 庚午에 문과 장원하여 승령부(承寜府) 승선비서관랑(承宣祕書官郞)에 제수되었다.

1332 壬申에 국자감 직강,

1334 甲戌에 봉직랑 예문관 응교 겸 수찬관 지제교,

1335 乙亥에 정리정랑(正理正郞),

1337丁丑에 동사랑 좌헌납(同舍郞 左獻納)에서 장령으로 전직되었으며,

1338 戊寅에 우대언(右代言) 전리총랑(典理摠郎)에서 봉상대부 전의사부령(奉常大夫 典儀寺 副令)이 되었으며,

1340 庚辰 지금주사(知錦州事),

1342 壬午에 태중대부 지예부사(太中大夫 知禮部事),

1344 甲申에 간의대부 우사의(諫議大夫 右司議)에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전보되었고,

1345 乙酉에 정순대부 예부시랑(正順大夫 禮部侍郎),

1347 丁亥에 광정대부 지밀직사사 겸 국자감사 예문관 대제학(匡靖大夫 知密直司事 兼 國子監事 藝文館 大提學),

1350 庚寅에 전공판서 판밀직상의 회의도감사(典工判書 判密直商議 會議都監事),

1351辛卯에 출척사(黜陟使)에 임용되었습니다.

 

감천군 휘 와 출척사 휘 종간의 외훈(巍勳)과 위열(威烈)이 소상(昭詳)히 전해지지 못하였고, 묘소와 배위도 또한 실전되었으니 이 어찌 가석(可惜)하지 않으리오.

후손으로서 선조의 대한 추성(追誠)을 다하지 못한 점을 반성하였습니다.

 

이에 종중 결의에 따라 대종계금(大宗契金)으로 손자가 되고 아들이 되는 대사헌 휘 사안묘전에 단비(壇碑)를 세워 고려사전씨보첩’ ‘전씨종약휘보등의 기록에 의거하여 가장(家狀)과 행장(行狀)을 약술하여 추모의 징성(徵誠)을 바치고자 합니다.

 

서기 1984년 음 1006

 

환성군 53세손 감천군 24세손 표두(杓斗) 謹識

환성군 53세손 감천군 24세손 표운(杓運)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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