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忠臣 全敏俊 墓碑文 | |||
작성자 | 관리자 [2020-02-03 20:01: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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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을에 임진왜란(壬辰倭亂)때 홀로 대적(對敵)하다가 적의 총검(銃劍)에 비참(悲慘)히 쓰러진 충의사(忠義士)가 계셨으니 좌수(座首) 전민준(全敏俊)공(公)이다. 공(公)은 려말(麗末)72현의 1인이신 채미헌(採薇軒)선생의 현손(玄孫)으로 위인이 호매담대(豪邁膽大)하였다.
왜적(倭敵)이 백복령((白伏嶺)을 넘어 창졸간(倉卒間)에 이 고을을 침략(侵略)하니 방비(防備)없는 땅이 되어 적의 예봉(銳鋒)을 막기에는 역부족(力不足)이었다. 이에 정사급(鄭思伋)군수는 공(公)에게 일시 피신(避身)하였다가 다시 도모(圖謀)하기를 강권(强勸)하였다. 나팔공굴(喇叭孔窟)에 관민(官民)을 피난(避難)시켰다.
공(公)은 혹자(或者)가 적의 위협(威脅)에 못 견디어 군수(郡守)의 행방(行方)과 곡창(穀倉)을 가르쳐줄까 염려(念慮)하여 홀로 관아(官衙)를 지키다가 적을 만났다. 적이 군수(郡守)의 거처(居處)와 곡창(穀倉)의 소재(所在)를 말 하라고 강요(强要)함에 공(公)이 크게 왜(倭)의 만행(蠻行)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적의 흉검(凶劍)에 쓰러지셨다. 적도 그 충의(忠義)에 감동(感動)되어 그 자리에 조선충신(朝鮮忠臣)이라 표목(標木)을 세우고 퇴각(退却)하였다.
장하도다! 그 충(忠)이여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일편단심(一片丹心) 그 의(義여) 나를 버리고 남을 살렸으니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
공(公)이 가신지 385년이 되는 이 해에 불초(不肖)에게 비문(碑文)을 청하므로 고사(固辭)치 못하고 대략 충의(忠義)의 편영(片影)만을 찬기(撰記)하고 전민준(全敏俊)공(公)이야 말로 우리들이 후세(後世)에 기리 전하여야 할 충신(忠臣)임을 되새기면서 모름지기 후인(後人)은 이를 본받아 충성(忠誠)된 국민이 되기에 힘쓰기 바라노라.
서기 1976년 병진 8월 일
정선군수 박수균 찬(旌善郡守 朴壽均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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