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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歡城君 全公 諱 聶 祭壇碑銘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19:5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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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성군 전公 諱 섭 제단비명

(歡城君 全公 諱 聶 祭壇碑銘)

 

! 전씨는 동방(東方)의 대성(大姓)이요, 정선의 세가(世家 : 대대로 나라의 중요한 자리에 있거나 큰 녹을 받았던 집안)이다.

상조(上祖 : 선조)는 환성군(歡城君) () ()이니 백제(百濟) 때 십제공신(十濟功臣)의 한 분으로 그 자취와 훈업(勳業)의 성대(盛大)함은 세월이 오래 지나 자세하지 않다. 자손이 번성하여 널리 나라 안에 가득하니 그 여러 대()가 쌓여왔음을 가히 증험(證驗)할 수 있다.

 

어느 날 단천의 전군(全君) 시봉(時鳳)이 집안의 아저씨뻘 되는 치암(恥菴) 덕무(悳懋)가 지은 가장(家狀 : 한집안 조상의 행적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멀리서 와 나의 집 문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선조(先祖)의 유택(幽宅)을 세월이 흘러 중도에 없어져 알 수 없게 되어 봉사(奉祀)할 수 없는지가 이미 오래 되었다 하고, 관북(關北 : 함경북도 지방을 두루 이르는 말) 단천(端川)에 있는 일가(一家)들이 또한 번성하였으나 참으로 보본(報本 : 태어나거나 자라난 근본을 잊지 않고 그 은혜에 보답함)함이 없어지니 항상 시달(豺獺 : 승냥이와 수달)의 아행[雅行 : 반포지효(反哺之孝]을 칭송하다가 여러 종친(宗親)들이 협의하여 망묘위단(望墓爲壇 : 조상의 묘를 잃어버려 단을 세우는 것)하는 옛 예법에 의거하여 단()을 세우고 해마다 향사(享祀)하려고 비()를 세워 그 일을 돌에다 새기려 하니 원컨대 몇 줄 제단비문(祭壇碑文)을 부탁한다 했으나 아! 나의 견문(見聞)이 좁으니 어찌 감히 이 예()를 감당하리오하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 이는 참으로 예()를 지낸지도 오래고 세대(世代)가 지난지도 오래돼 선묘(先墓)를 잃어버림은 어쩔 수 없는 일이요 거조위단(去祧爲壇 : 먼 조상의 신주를 합사하여 단을 세움)함은 또한 옛 법도에도 있으니 다시 무슨 이유를 찾겠는가. 시봉(時鳳)은 나와 사귀고 노닌지 수년이라 그 일을 주선(周旋)함이 가능할 뿐더러 추원(追遠 : 조상의 덕을 돌이켜 생각함)하는 정성에 감탄하여 끝내 차마 사양할 수 없었으므로 물에 손을 씻고 다음과 같이 찬()한다.

 

오호라 환성군(歡城君) 전공(全公)은 백제 때의 명신(名臣)으로 높은 덕()을 지니시고 큰 공()을 세웠으니 그 빛나고 높은 업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없으나 이제 수 천 년이 지나갔다. 세월이 오래 흘러 유택을 잃어버림이요 문헌에 증거가 없으니 배위(配位) 또한 알 수 없어 향사(享祀)가 끊어진 지 또한 누백년(累百年)인데 중엽(中葉)에 이르러서는 북()으로 분파(分派)하여 시달(豺獺)의 보본(報本)에도 능히 따르지 못함에 괴로움이 몹시도 크도다. 자손의 신체(身體)는 조상의 기맥(氣脈)이요, 반드시 둔석(窀穸 : 무덤)으로부터 나온 것이니 추풍춘우(秋風春雨) 할 때마다 그 슬픔이 심히 깊도다.

 

거조위단(去祧爲壇)의 예()는 예부터 내려온 것이니 이와 같이 단()을 모셔 제사지냄은 가능하리라. 이제 깨끗이 쓸고 단()을 쌓아 심히 엄숙하고 삼가며 조심스럽게 우러러 바라보며 숙연(肅然)히 머리 숙이니 조상과 자손이 모두 함께 있는 듯하구나. 공손히 제수(祭需)를 바치고 신[: 선조(先祖)]을 부르니 영령(英靈)이 단상(壇上)을 오르내림하고 단() 옆에서는 날랜 말이 달리는 것처럼 힐향[肹蠁 : 소리를 아는 벌레, 즉 영감(靈感)이 감통(感通)하다]하니 충만하여 살아계시는 듯 하여 마음이 처연하다. 뿌리를 생각할 제 선조(先祖)의 높고 크나 큰 공덕(功德)을 감히 그르칠까 두렵지만 엄숙(嚴肅)하고 위엄(威嚴)있는 의용(儀容)은 푸른 창공(蒼空) 위로 솟아오르더라.

 

용집 기미 중양절(서기 1859년 음력 99) 서원 한서교 삼가 짓고

완산 이진수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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