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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랑공 전인권 묘갈명(正郎公 諱 仁權 墓碣銘)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19:5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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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랑공 전인권 묘갈명(正郎公 諱 仁權 墓碣銘)

[1360.03.09---1441.03.15]

 

()은 신라조(新羅朝) 봉 정선군(旌善君) () ()의 후손(後孫)이다. 선조의 휘() ()가 관동안찰사(關東按察使)로 있을 때 스스로 명주(溟州)는 사대부(士大夫)의 기북(冀北)으로 여기고 이로 인()하여 이 고을에 살았다.

 

()의 휘()충의(忠義)이니 통의대부 행 상의봉어동정(通議大夫 行 尙衣奉御同正)이요 비()는 옥천이씨(沃川李氏)이니 동정(同正) ()의 따님이다.

천성(天性)이 인후(仁厚) 강직(剛直)하며 항상 대덕(大德)을 지녔다.

 

공민왕 경자(庚子) 39일에 공()이 탄생하였는데 휘 인권(仁權)이요. ()는 이지(履之)니 호()는 임금이 성취옹(醒醉翁)으로 지어주었다.

()은 재예(才藝)가 출충(出衆)하고 문필(文筆)을 일찍이 승습(承襲)하여 아주 잘 하였으며 문 갑과(文 甲科)에 급제하여 관()이 이조정랑(吏曹正郎)에 이르렀다.

려말(麗末)에 충신(忠臣)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節介)를 지켜 길야은(吉冶隱)과 나(원천석)와 함께 벼슬하지 아니하고 물러나 강릉(江陵)에 들어갔다.

위로부터 명() 받들어 관심정(寬心亭)을 강릉(江陵) 경포(鏡浦) 남록(南麓) 모안곡(慕顔谷)에 짓고 조석(朝夕)으로 서경(西京)을 향하여 절하고 망국(亡國)의 한()을 달랬다.

중양가(重陽歌)를 지으니 원근(遠近)에 전파(傳播)되었고 스스로 시주(詩酒)를 좋아하여 음송(吟誦)함을 그치지 않았다.

강릉(江陵) 향교(鄕校) 창건(創建)할 때는 아들 우정(遇禎)과 함께 전자(篆字)를 쓰고 위판(位版)을 감조(監造)하는데 참여하였으며 그 때에 현유(賢儒)들이 수임(首任)으로 추대(推戴)하였음을 임영지(臨瀛誌)에 실렸고 또 자손(子孫)에게 계언(戒言)을 남겼다.

세종 신유(辛酉) 315일에 졸()하시니 향수(享壽)82세라

 

()은 흥해배씨(興海裵氏) 이판(吏判) 상지(尙志)의 여()를 취()하였는데 지정 신축(辛丑) 53일에 출생하시어 영락 을미(乙未) 95일에 졸()하시니 1남을 두셨는데 우정(遇禎)이오. 영락 신묘(辛卯)에 진사하고 군수 최덕유(崔德濡)의 여()를 취()하니 경흥부원군 필달(必達)의 후손(後孫)이다.

 

3남을 두었는데 장의 ()은 문과에 올라 구례현감(求禮縣監)이요. 연일 정씨(延日鄭氏) 생원(生員) ()의 여()를 취()하니 포은(圃隱) 몽주(夢周)의 후손이다.

차왈(次曰) ()이니 봉사(奉事). 영해이씨(寧海李氏) 양무(良茂)의 여()를 취()하였고 차왈(次曰) (+)니 무과에 급제하여 군수로 강릉김씨(江陵金氏) 대길(大吉)의 여()를 취()하였다. 이제 강릉(江陵) 경포(鏡浦) 증산(甑山) 임좌원(壬坐原)에 합장(合葬)하였다.


()는 조사(早死)하고 손() ()이 이제 공()의 명()을 청()함이 재삼(再三) 그치지 않으니 나 천석(元天錫)이 그 조공(祖公)의 영명(榮名)을 가상(嘉祥)하고 인()하여 비문(碑文)을 짓고 그 명()을 하여 가로대


()이 날고 봉()이 춤을 추는 하늘이 이 산을 지었도다.

땅이 살찌고 샘물은 달아서 태양의 언덕이로다.

()이 두터이 흘러 빛남이 사후 편안히 극락왕생하시고

자손들이 만년(萬年)이 가도록 복록(福祿)이 길이 이을지어다.

 

정통8(서기 1443) 계해 방춘

[正統8年 癸亥 芳春]

성균생원 문하성 주서 운곡 원천석 찬

[成均生員 門下省 注書 耘谷 元天錫 撰]

통훈대부 행 구례현감 만퇴당 륜 전

[通訓大夫 行 求禮縣監 晩退堂 崙 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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