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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開國功臣 旌善君 忠烈公 行蹟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19:5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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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공신 정선군 충렬공 행적(開國功臣 旌善君 忠烈公 行蹟)

 

()의 성()은 전씨(全氏)요 휘()는 이갑(以甲)이요 자()는 자경(子經)이니 백제공신(百濟功臣) () ()의 후예(後裔)요 아버지의 휘()는 우상(禹相)이니 신라(新羅) 효공왕(孝恭王)을 도와 벼슬이 광문학사(廣文學士)에 이르고 어머니는 구씨(具氏)니 파진찬(波珍飡) ()의 따님이라.

 

하루는 꿈에 세 신인(神人)이 푸른 옷을 입고 앞에 보이니 꿈을 깬 뒤 태기(胎氣)가 있고 출산일(出産日)에 이르러 서기(瑞氣)가 방 안에 가득한데 또 전에 꿈에서 보았던 세 신인(神人)이 와서 일러가로되 그대가 기특(奇特)한 사내아이를 낳을 것이니 이름은 제일공(第一功)에 오르고 삼한(三韓)을 덮을 것이니 마땅히 삼가 잘 길러야 한다는 말을 마치고 돌아간 뒤 잠깐 뒤에 과연 공()을 낳으니 골격이 비상(非常)하였다.

 

그 이듬해 또 전일(前日)의 신인(神人)이 꿈에 보이더니 곧 태기(胎氣)가 있고 출산(出産)할 달에 이르러 그 형을 낳을 때와 마찬가지로 서기(瑞氣)가 일고 또 아들을 낳으니 공()의 아우 의갑(義甲)이라. 두 형제 나이 14, 5세 때 학문(學文)에 능통하고 힘은 강궁(强弓)을 당기며 지모(智謀)가 출중(出衆)하니 참으로 장재(將材)더라.

 

궁예(弓裔)를 도와 기랑(騎郞)이 되었는데 이때 궁예(弓裔)가 사리에 어둡고 행동이 거칠어 덕()없는 일을 많이 함에 하루는 수 백 명을 척살(刺殺)하니 백성들의 마음이 다 흩어지더라.

()의 형제가 홍유(洪儒) 등과 더불어 깊은 밤에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집으로 찾아가 아뢰기를 삼한(三韓)으로부터 분열된 뭇 도적(盜賊)이 일어났으니 왕()이 큰 소리로 꾸짖어 모든 도적을 멸해 나라를 세우고 도읍(都邑)을 정해야 하나 지금은 끝내 끝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학정(虐政)이 극심(極甚)하여 신민(臣民)이 도탄(塗炭)에 빠져있으니 공()이 어두움을 폐하고 밝음을 세워 은()나라와 주()나라의 고사(故事)를 따르소서 하니 태조(太祖)가 낯빛을 바꾸며 가로되 어찌 나와 같이 부덕(不德)한 사람이 능히 탕무[湯武 : ()나라의 탕왕(湯王)과 주()나라의 무왕(武王)]의 일을 따르겠는가 하였다.

 

홍유(洪儒) 등이 가로되 백성이 독정(毒政)에 빠져 오로지 구제(救濟)받기를 지극히 바라고 있으며 하물며 지금 공()보다 덕망(德望)있는 사람이 있지 않으니 만약 공()이 우리들의 말을 좇지 아니한다면 죽을 날마저 없을 것인데 어찌 독부(毒夫)의 손에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겠습니까 하며 여러 장군들과 더불어 호위(護衛)하여 모시고 나아가 동이 터올 무렵 노적가리 위에 앉히고 사람들을 시켜 말을 달려 나아가 왕공(王公)이 이미 의기(義旗)를 드셨다고 외치니 궁예(弓裔)가 그 소리를 듣고 놀라 달아났다.

태조(太祖)가 공()을 추대공신(推戴功臣)으로 책봉(冊封)하고 태사(太師)로 삼았으며 더불어 개국공신(開國功臣)과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제수(除授)하였다.

 

그런데 문희경(文希卿)이 약을 먹고 자살(自殺)하자 그 화가 공()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물러나 산수(山水)를 즐기며 세상일에 뜻을 두지 않고 시()를 지어 가로되 세상 실정(實情)은 천층(千層)의 파도와 같고 세상일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여있으니 이러한 세상에 처세(處世)하기란 진실로 어려우니 마땅히 바위와 돌 사이에 깃들리라 하였다.

그 후 당()나라 천성(天成) 2(서기 927)에 견훤(甄萱)이 갑자기 신라 왕도(王都)를 침입(侵入)하였는데 그 때 신라왕(新羅王)은 비빈(妃嬪)들과 포석정(鮑石亭)으로 놀러 나갔다가 창졸(倉卒)간에 적병(敵兵)이 이르렀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모두 죽음에 이르렀다.

 

태조(太祖)는 사신(使臣)을 보내 조상(弔喪)하고 제()를 올린 후 친히 정병(精兵) 5천을 거느리고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을 대장(大將)으로 삼고 공()은 부장(副將)으로 삼으니 공()이 감히 사양(辭讓)치 못하고 견훤(甄萱)을 팔공산(八公山)에서 맞아 태조(太祖)를 호위(護衛)하며 싸우다가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 두 대장과 급기야 공()의 아우 의갑공(義甲公)과 함께 전사(戰死)하니 태조(太祖)가 돌아와 심히 슬퍼하여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개국공신(開國功臣) 정선군(旌善君)을 추봉(追封)하고 시호(諡號)를 충렬공(忠烈公)이라 하사(下賜)하고 국령(國令)으로 자손들에게 음사(蔭仕 :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덕으로 얻어 하는 벼슬살이)케 하고 아우 의갑(義甲)을 문하시중(門下侍中) 죽산군(竹山君)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추봉하고 시호를 충강(忠康)이라 하사하니 이 때문에 전씨(全氏) 가문(家門)이 크나큰 위세로 세상을 울렸다.

 

()은 키가 8척이요, 아름다운 수염에 봉()의 눈과 거북의 등을 갖추시어 바라봄에 있어 늠름하시어 감히 범할 수 없었다. 세대(世代)가 까맣게 먼데다 여러 번 병화(兵火)를 겪어 능히 그 큰 공()과 위대한 업적을 다 기록치 못하니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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