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문헌유물, 유적
유물, 유적
제목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작성자 관리자 [2020-02-06 14:13:48]
첨부파일
첨부된파일갯수 : 0

문화유산 알아보기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인간적인 미소를 띤 보살상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모습

극락정토에 대한 염원

 

불교에서는 인연에 따라 생물이 태어나는 방식이 네 가지 있다고 한다. 물벌레와 같이 물에서 태어나는 습생(), 병아리와 같이 알에서 깨어나는 난생(), 사람과 같이 태 속에서 자라는 태생(), 그리고 연꽃에서 태어나는 화생()이 그것이다.

아버지 심학도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판 심청이는 효도한 보답으로 화생하여 왕비가 되었고, 경조()의 아들 김대성(, 불국사와 석불사 창건자)은 작은 밭을 절에 보시한 공덕으로 신라의 재상 김문량()의 아들로 태어나 부귀영화를 누렸다. 같은 인간이지만 심청이는 화생으로, 김대성은 태생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알다시피, 유가()와 도가()가 주류를 이루었던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불교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내세()를 보장하였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정토 세계라는 많은 내세를 제시하였다. 정토 세계 중에서 사람들은 죽은 후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정토에 태어나는 것을 가장 원했다. 이곳은 천상에서도 서쪽에 있어서 서방극락정토라고 한다.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 772-846)는 말년에 죽음을 앞두자 거금 3만전을 들여 서방극락세계도(西)를 발원하고 직접 찬문을 지었다. 그가 발원했던 그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찬문은 전해진다.

“극락세계의 청정한 땅에는 여러 악도와 중생들의 고통이 없네.
이 몸과 같이 늙고 병든 사람들이 함께 무량수불이 계시는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네.”

극락세계청정토 極樂世界淸淨土 무제악도급중고 無諸惡道及衆苦
원여아신노병자 願如我身老病者 동생무량수불소 同生無量壽佛所

극락정토에는 팔공덕수(, 여덟 가지의 공덕을 갖춘 물)로 가득 채워진 아름다운 연못이 있다. 사람들은 이생에서 쌓은 공덕으로 죽은 후 이곳의 연꽃에서 태어난다. 백거이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극락정토에 태어나기 위하여 공덕을 쌓은 것이다.

많은 죽음을 경험한 후 유행하는 정토신앙

 

정토신앙은 많은 죽음을 경험한 후 유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토신앙이 지역적인 특징을 지니는 것은 그러한 경험은 특정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7세기 후반, 충청남도 연기 지방에서도 그러한 경험을 겪은 모양이다. 아미타불의 정토신앙과 관련되는 불상이 많이 조성된 것을 보면, 그러한 상황을 추측할 수가 있다. 1960년대에 이 지역에서 발견된 몇 개의 존상은 모두 정토신앙과 관련된다. 이들 상은 신라의 67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689년까지 이어진다. 물론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만, 아미타정토신앙이라는 같은 분위기에서 조성된 것임은 틀림이 없다.

이곳에서 발견된 불상들은 모두 비석 형태의 돌 네 면에 불상을 조각하고 명문을 새긴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불비상()이라고 부르는 이 형식은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지역만의 특징이다. 비록 660년, 백제가 신라에 병합되었기 때문에 이들 불상은 편년 상 신라시대의 것으로 간주되지만,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높이 43cm, 폭 27.6cm, 두께 17cm)의 명문에 보이는 백제의 관직명과 대표적인 백제 성씨인 전씨()를 통하여 백제 불교 신앙의 전통을 여전히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 불상의 좌측면(왼쪽)과 우측면(오른쪽)

판독이 가능한 166자의 명문에 의하면, 불비상은 673년 4월 15일에 국왕과 대신,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하여 조성한 것이다. 병합 과정에서 전씨 가문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의 극락정토왕생을 기원한 것 임에는 틀림이 없다.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에는 정면의 아미타불상을 중심으로 보살상과 4존의 비구상, 2존의 금강역사상이 조각되어 있다. 양 측면 위 부분에는 극락정토를 표현한 듯 각각 4존의 기락천()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정면 쪽을 향하고 있는 용이 새겨져 있다. 불비상의 뒷면에는 20존의 불좌상이 같은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일본의 [부상략기()]에 의하면, 이미 백제 성왕() 때인 552년에 아미타불상과 관음보살상, 세지보살상 등 금동삼존불을 일본에 보내 왔다는 기록이 있어서 백제에서의 아미타정토신앙은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유행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명문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표현한 것이라는 것은 같은 지역의 비암사()에서 발견된 신라 689년에 조성한 기축명() 불비상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아미타불상과 권속(, 따르는 무리)들은 극락정토 연못[보지()]의 팔공덕수에서 피어난 연꽃 위에 표현되어 있다.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없다면, 불가능한 표현이다.

우리는 백제가 신라에 병합되는 과정에서 겪었을 전씨 가문의 어떤 고통을 673년의 불비상을 통하여 느낄 수 있다. 그나마 마음 편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곤 이러한 불상을 만드는 것 정도였을지도 모르겠다. 백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최후의 불상인 불비상을 보면서 그들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이미지 목록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뒷면

기축명 불비상

관련이미지 7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충청남도 세종시(구 연기군) 비암사(碑巖寺)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다. 앞면 상부에 이중의 주형광배와 광배의 중심에 아미타불삼존상과 권속들을 조각하였다. 설법인을 취하고 있는 아미타불은 통견의 법의를 입었는데 법의가 대좌를 거의 덮어 흐르고 있다. 협시보살상들은 본존 쪽으로 몸을 약간 튼 자세로 연화좌 위에 서 있다. 명문에 의하면, 계유년(673년) 전씨 일가의 발원에 의하여 조성된 것이다. 통일신라, 673년, 높이 43㎝, 국보 제106호.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위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출처사이트 게시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사용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발행일

발행일 : 2013. 08. 09.

출처

제공처 정보

  • 배재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하버드대학 방문학자, 대통령실 정책자문위원(문화재), 용인대학교 문화재대학원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당대불교조각](2003), [중국의 불상](2005), [동양미술사](2006, 공저), [세상은 연꽃 속에](2006), [연화장세계의 도상학](2009) 등이 있다.

  • 자료제공 문화재청헤리티지채널 문화재청헤리티지채널 로고

    [네이버 지식백과] 계유명 전씨 아미타불비상 - 인간적인 미소를 띤 보살상 (문화유산 알아보기, 배재호, 문화재청헤리티지채널)


 

이전글 ...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