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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용택 처 경주김씨 열녀문 (全龍鐸 妻 慶州金氏烈女門)
작성자 관리자 [2020-02-11 14: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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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열녀문

[慶州金氏烈女門]

 

 

 

 

소재지 :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마차리

 

-연 혁-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전용탁(全龍鐸)의 처()이다. 김씨(金氏)는 남편(男便)이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몇 번이고 기절하였으며, 장례(葬禮)를 치르고는 물 한모금도 간장 한 방울도 입에 넣지 않고 애절(哀絶)해 하였다. 김씨(金氏)는 무덤 옆에서 맨손으로 몇 번이고 무덤을 파헤치다 지쳐서 죽으니 집안사람들이 남편의 무덤 옆에 합장(合葬)하였다. 고종(高宗) 4(1867)에 열녀문(烈女門)을 세워 그 정열(貞烈)을 기렸다.

참고문헌삼척의 충··열 인물, 삼척교지, 삼척지방의 金石文 記文

 

 

전용택 처 경주김씨 찬양문

[全龍鐸 妻 慶州金氏 讚揚文]

 

 

 

바른쪽 찬양사를 살펴보니 강원도 유생들이 추천한 사안(事案)이다. “삼척군 소달면 마차리의 열부(烈婦) 경주김씨는 대대로 고위 벼슬아치들을 배출해 온 고가(古家) 출신으로 사인(士人) 치선(致善)의 딸이고 정선인(旌善人) 전용탁(全龍鐸) ()이다

 

타고난 성품이 총명 단정하고 어릴 적부터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깨달아 한낱 과일이 생길지라도 혹여 먼저 먹는 일 없고 꼭 부모님께 받들어 올렸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라 비록 글을 배운 적 없고 예기의 모든 범절을 대충이나마 해명한적 없지만 나이 겨우 열 살에 남녀같이 놀지 않으며 한 그릇에 같이 먹지 말라는 훈시를 깨우쳐 여자로서의 분수와 의무에서 부엌일에 이르기까지 두루 익히지 않은 것이 없다.

 

나이 열여덟에 시집가 남편 집안에서 칭찬을 한 몸 받더니 불행하게도 겨우 한 해되어 남편이 병으로 사망하였는데, 애통해하고 혼절하는 정황을 차마 마땅하게 볼 수 없더라, 장례까지 물 한 모금도 삼키지 않고 밤낮으로 무덤 옆에서 울부짖으며 수척(數尺)의 땅을 파 해쳐 두 손이 터지고 탄식 소리 잦아지고 기운이 고갈되어 마침내 무덤가에 쓰러져 사망하였다. 그날따라 무덤이 반쯤 갈라지고 음침한 빗발이 스산하니 온 집안이 낌새를 감지하고 급히 달려가 살리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부득이 시신을 수습하여 합장(合葬)하니 그 집안만의 비통함 일뿐 아니라 나아가 군민(郡民) 전체가 애석할 슬픔이라 이것이 어찌 하늘이 감동하고 귀신도 읍 조릴 정열(貞烈)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17년이 지난 지금도 마을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말씀이 마치 어제 일같이 생생하나 현재 법도가 옛날 같지 않아서 정문(旌門) 세우고 포상(褒賞)하는 일이 끊겼으되 공론은 살아 있으니 어찌 열녀문(烈女門) 하나 세우는 것쯤은 못하랴?”해서 본회(慕聖公會)에서는 우선 기록에 남겨 이름을 빛내고 비각을 건설하여 풍속을 바로 세우는 일로 이바지하고자 하는 바이다. 유림공논(儒林公論)의 찬양문(讚揚文)에 의해서 

 

공부자(孔夫子) 탄강(誕降) 2477년 월 일

 

모성공회 회장 판서 김종한

부회장 승지 김병흥,

찬성장 판서 박기양,

고문 보극 민병석,

판서 민영인,

참판 윤영구,

참판 권익상,

승지 김정진,

참서 박희양,

시종 이종태,

찬의장 참령 전면조,

교관 조병필,

도유사 주사 신현태,

부유사 유학 송주헌,

서무유사 위원 정재열,

경학유사 참사 이지복,

전예유사 진사 유진만,

간사유사 교관 최승완,

교원 문종거,

유학 신수보,

참봉 백남규,

주사 전영준,

세 재 무진 3월 일

척주 문묘 직원 최상하 원 간 장의 김원극

 

 

[원문]

全龍鐸妻慶州金氏讚揚文

 

右讚揚事謹按江原道儒薦則三陟郡所達面馬次里烈婦慶州金氏簪組古家士人致善女旌善全龍鐸妻也天資聰敏端一自髫齡知愛親得一園果未惑先其口而獻親生長畎畝之間雖未有學文之資畧解內側諸篇之義生甫十歲已知男女不同席不同器之訓婦道女紅以至酒食烹飪無不嫺宜年十八于歸洽得夫黨之稱譽不幸纔經一年其夫病歾嶊慟霣絶之狀不忍當覩及葬勺水不入口晝夜呼泣于墳側數尺掘地兩手皴裂聲嚘氣盡邃斃於墳側是日封土半坼陰雨晦冥一家覺之疾走救急已無及矣不得已斂屍合窆非惟其家之悲酸至扵州里之所共歎惜是豈非感天泣神之貞㤠乎至今十七載里人口誦有如昨日事噫時制不古縱乏旌褒公議猶存詎無輿菀本會先付繡木而垂芳使建碑閣而樹風之意依儒論讚揚事

 

孔夫子 誕降 二 千 四 百 七 十 七 年 月 日

 

 

慕聖公會 會長 判書 金宗漢

副會長 承旨 金炳興, 贊成長 判書 朴箕陽, 顧 問 輔國 閔丙奭,判書 閔泳璘, 參判 尹寧求, 參判 權益相, 承旨 金鼎鎭, 參書 朴熙陽,侍從 李鍾泰, 贊議長 參領 全冕朝, 敎官 趙炳弼, 都有司 主事 申鉉台,副有司 幼學 宋柱憲, 庶務有司 委員 鄭在烈, 經學有司 參事 李旨馥, 典禮有司 進士 兪鎭晩, 幹事有司 敎官 崔承完, 敎員 文鍾擧,幼學 申壽輔, 參奉 白南圭, 主事 全永俊

歲 在 戊辰 三月 日

陟州文廟 直員 崔相夏

原 幹掌議 金源極

 

 

 

전용택 부인 김씨 열행사실록

(全龍鐸 夫人 金氏 烈行事實錄)

 

 

 

 

김씨(金氏)의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요 사인(士人) 치선(致善) 딸이다.

어릴 적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성질이 청렴 정직하여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웠다.

남녀 간에 조신하였으며 점차 자람에 따라 바느질, 길쌈, 부엌일 등 스스로 습득하여 잘 실천하고,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자질(姿質)을 지녔으므로 앞으로 집안을 일으킬 좋은 며느리 감이라고 이웃이나 친척들이 칭송하였다.

나이 18세에 전씨 집안에 시집 간지 3일 만에 몸소 물이고 방아질하며 손수 부엌일을 부지런히 하였다.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낭군께 예()로 받드니 안방마님들의 모범이 됨이 흡족하다. 그러나 겨우 1년 만에 남편 용탁(龍鐸)이 우연히 병에 걸려 점차 고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씨는 밤낮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며 의원과 의복(醫卜)을 항시 옆에 머물게 하야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며, 한 몸으로 감당키 어려울 정도로 지극 정성껏 보살폈으나 남편은 끝내 회생하지 못하였다.

김씨의 애통해하고 절박한 정황을 사람으로서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실성하고 정신을 놓아 기절했다 깨어남이 두 세 번이었으며, 오장이 내려앉을 즈음에 억지로 시신 옆에 일어나 몸소 염습을 해 집 가까운 곳에 장사지냈다.

매일 무덤에서 부르짖으며 울더니 하루가 지나도 오지 않는 지라 가족이 걱정되어서 가보게 되었다. 땅을 몇 자 파헤쳐서 양손이 피가 흐르는 상태로 묘 옆에 죽어있었다. 그날따라 음산한 비가 내리고 산악도 비참한지 무덤마저 반 갈라진지라 가족이 황급히 살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침내 부인 김씨도 염하여 합장하니 길가는 사람도 보면서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슬퍼하였다.


이렇게 곧은 열녀의 절개는 포상하고 정문 세워서 그 정신을 함께 기리는 것이 당연한 법도일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그 열절(烈節)을 칭송할 뿐 그 행적이 묻힌 지 오래되었다.

용택(龍鐸)의 맏형 봉근(封根)이 제 아우가 요절함을 민망히 여기고 무엇보다, 제수씨의 열행(烈行)이 잊힐까 걱정하여 그러한 사실을 먼저 우리향교에 알리고 또 서울 모성공회 아뢰니 자회(모성공회)에 내린 찬양문이 있고 또 찬양비문도 있어 비각을 건설하고 나서 나에게 기적문(記蹟文)을 요청하였다.

 

! 나의 얕은 소견과 보잘 것 없는 지식으로 그 깊은 오묘한 뜻을 천명하고 그 사실을 상세히 기록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그러나 풍속을 가다듬고 일으켜 세워 더럽게 사느니 영광스럽게 죽어야겠다는 절의(節義)의 장소를 보고 조금이나마 감화(感化)를 받으리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나의 옹졸함도 잊고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세 무진 요하 김휘성 근지

삼척향교 직원 최상하 

 

 

[원문]

 

全龍鐸夫人金氏烈行事實錄

 

烈行 事實錄 懸板

 

 

全龍鐸夫人金氏烈行事實錄

金氏貫慶州士人致善之女也自髫齡容貌端雅性質廉直孝於父母友於兄弟謹於南女梢長針績至工飯饍至供自習以能行隣里親戚咸稱賢閨之姿質而將爲善家之良婦矣年至十八嫁于全氏之家三日以後親操井臼手執羹湯事舅姑以孝敬君子以禮洽爲閨門之謨範纔經一期其夫龍鐸偶罹一疾漸至難離之境金氏晝夜祝天使醫卜不離於側百般救療一身難代竭誠無效竟至不起金氏哀痛迫切之狀人不忍見也失聲失精幾絶而蘓者再三矣五內分崩之際强起於尸側親檢歛襲而葬于近家之地每日號泣于墳一日過度不歸家人怪而往視之掘地數尺兩手出血而死扵墳側是日陰雨濛濛山岳悲慘墳土坼其半家人惶急救死無及矣遂歛而合封行路之人莫不流涕如此卓異之烈節冝有褒旌之典時制異前故至于今頌其烈而潛其蹟者久矣龍鐸長兄封根特憐其弟之夭慘尤感其嫂之烈行以其事實先聞于本郡鄕校又聞于京城慕聖公會自會所旣有讚揚之文又有讚碑之文而碑閣建設後請余記蹟噫以余管豹之淺見蠡海之薄識不足以闡顯其幽微以詳錄其事實然其扵樹風勵俗惡生榮死之地庶幾有觀感之影響故忘拙畧敍云爾

 

歲 戊辰 葽夏 金輝星 謹識

 

三陟鄕校 直員 崔相夏

 

 

전면조 (晩齋 全冕朝)[1871-1942]

1901년 중추원 의관 역임

1904년 보병 7대대장 역임

1905년 참령

1917-1932 전씨대동종약원(全氏大同宗約院) 초대 종약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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