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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숭인재 상량문(崇仁齋 上樑文)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21: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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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인재 상량문(崇仁齋 上樑文)

 


 

높이 4척의 단소(壇所)는 그 모습이 장엄(莊嚴)하니 이에 옛 의식(儀式)을 참고(參考)하건데 흡족하다. 3일간 재계(齋戒)할 곳을 아름답게 단장하고 이에 현판(懸板)을 거니 광채(光彩)가 생기므로 감히 숭조(崇祖)의 제인(祭禋 : 제사)을 드릴만 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인리(仁里 : 풍속이 아름다운 시골)에 택지(擇地)하여 당부(堂斧 : 묘단)의 상설(象設 : 배치)를 의()를 좇으니 후손들의 추원(追遠)하는 정()을 담게 되었다. 생각하건데 이곳은 한양(漢陽)의명승지(名勝地)요 곧 부여씨(餘氏)의 옛 도읍(都邑)하던 곳으로써 글로는 족히 삼국고사(三國古史)를 상고(詳考)하여 유풍(遺風 : 후세에 끼친 교화)을 전할 수 있고 이름은 이미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좌우(左右)에서 왕실(王室)을 도왔다고 나타나 있다.

 

강산은 옛날과 같아 임금의 수레가 멀리서 임어(臨御 : 임금이 그 자리에 임함)하는 듯이 여겨지며 풍운(風雲)은 마치 칼을 차고 빠른 걸음으로 따라 모시는 듯하니 단소(壇所)를 설단(設壇)하는 곳으로는 가장 적합한 바라 할 수 있고 성() 동쪽의 명승지에 설단(設壇)할 곳을 점쳐 마련하였으니 이 어찌 선대의 현신(現身)하심이 아니겠는가.

 

탄생(誕生) 후 천 년의 이루지 못한 전례(典禮)를 받들게 됨은 마치 오늘을 기다려 온 것과 같은지라 실로 여러 후손들이 정성(精誠)을 다한 것에 힘입음이다. 삼가 생각해 보건데 환성군(歡城君) 전공(全公)께서는 일찍이 좋은 새가 좋은 둥지를 찾는 것처럼 진인(眞人 : 참된 도를 깨달은 사람)은 초매(草昧 : 하늘과 땅이 처음 만들어지던 어두운 세상) 중에서도 어렵고 힘든 상황에 대비(對備)할 줄 아는지라 오간(烏干), 마려(馬黎)와 더불어 황폐(荒廢)한 땅과 가시덩굴을 헤치고 부아악(負兒嶽 : 북한산)에 올라 위례성(慰禮城)에 이르러 주공(周公)이 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는 계책을 세워 오랜 세월을 이어온 것과 유경(劉敬 : 한고조 유방이 낙양에 수도를 정하려 하자 반대의견을 피력한 인물)이 관중(關中)에 도읍을 정할 것을 상주(上奏)한 것처럼 큰 계책을 조밀하게 세우셨다.

 

아아 또한 충렬(忠烈) 전공(全公)과 충강(忠康) 전공(全公), 충달(忠達) 전공(全公)이 정선군(旌善君)의 큰 충절(忠節)을 이어받아 고려(高麗) 개국원훈(開國元勳)으로 아울러 기록된 것은 고려 태조(太祖) 천수(天授) 기원(紀元) 때에 여상(呂尙 : 강태공)의 무공(武功)을 앙양(昻揚 : 정신이나 사기 등을 드높이고 북돋움)하였음이나 불행히도 동루산(桐蔞山)에서 한번 패전함에 문득 기신(紀信 : 한고조 유방을 대신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충신)의 위충(危忠 : 높은 충성)을 본받았으나 세월의 흐름이 아득하고 또한 병란(兵亂)으로 인해 묘소(墓所)가 실전(失傳)되어 어느 곳을 의지(依支)하여 척강(陟降)할런지 향화(香火 : 제사)의 의전(儀典)을 닦을 수 없어 슬퍼하며 추모(追慕)할 곳을 찾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여러 종친들과 협의하여 숭단(崇壇)을 세울 계획을 세웠지만 그러나 장소를 점치기 어려웠으며 실로 영역(瑩域 : 무덤)으로 가히 근거할 곳이 없었다. 타향(妥享 : 평온히 제수를 받음)하실 곳은 반드시 공()이 옛적에 유력(遊歷 : 여러 고장을 두루 거침)한 곳을 살피어 상고(詳考)하고 백제(百濟)가 이곳에 정도(定都)하였음을 상기(想起)하여 그 지역을 측정하는데 많은 심력(心力)을 소모(消耗)하였다.

 

이곳은 전왕조(前王朝)의 경계(境界)에 들어있고 아직 거마(車馬)가 통행하지 않으나 경기도(京畿道)에 인접(隣接)한 곳이다. 불궤지효(不匱之孝 : 다함이 없는 효도)로 매양 이 땅을 밟으면 처연(悽然)함이 마치 영령(英靈)이 계시어 돌봐주시는 것 같았다. 혹시나 상명(爽明 : 영검이 있고 신령스러움)한 이 땅을 타인에게 빼앗길까 두려워 남보다 먼저 선점(先占)하고 혹은 거액의 금전을 아끼지 않아 공력(功力)에 뒤떨어짐이 없게 하였다.

 

성심(誠心)이 해이(解弛)하지 않아 향사(享祀)하게 되니 이는 소위(所謂) 긍구긍당(肯構肯堂 : 선조의 업을 이어 완성함)으로 개탄(慨歎)하며 받들고 흐느껴 울며 계승(繼承)하니 이는 오로지 효()만을 생각함이요, 안에서 치재[致齋 : 제관(祭官)이 된 사람이 사흘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함]하며 밖에서 산재[散齋 : 제관(祭官)이 제사를 지내기 전에 며칠 동안 심신을 깨끗이 하고 언행을 삼가며 부정한 일을 멀리하는 일]하는 법규(法規)에 적절(適切)하다. 대들보를 높이 올리려 함에 두 손 들어 도와주며 감히 즐거이 노래를 부르노니 어기여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올리니 물 넘치는 높은 산에 상서(祥瑞)로운 태양이 붉게 걸렸으니 명승지인 이곳은 천년의 신비(神秘)를 간직한지 오래요 눈에 보이는 것마다 아름다운 기운은 덩굴처럼 여기저기 얽혀있네.

 

어기여차 대들보를 서쪽으로 올리니 낙봉(駱峯)은 뾰족하여 구름과 함께 높이 솟아있고 영령(英靈)은 재실(齋室)에 어둡지 않을 때 내려와서 향화(香火)에 화동(和同)하니 달마저 작게 이지러져 보이네.

 

어기여차 대들보를 남쪽으로 올리니 한강물 흘러내려 쪽빛보다 푸르며 손지(孫枝 : 고목이 다 된 나무에서 새로 돋아 나온 가지)와 자간(子幹 : 새로 돋아 나온 줄기)은 어지러이 얽혀있고 무리진 산을 바라보니 여러 형상을 띠고 있네.

 

어기여차 대들보를 북쪽으로 올리니 설악(雪嶽)은 높이 솟고 하늘은 지척(咫尺)이라 실컷 풍상(風霜)을 겪었는데도 오히려 꺾이지 아니하고 온통 산에 송백(松柏)은 춘색(春色)이 짙었구나.

 

어기여차 대들보를 위쪽으로 올리니 그때 보던 운기(雲氣)는 곁에 와 있고 원컨데 장차 희생(犧牲 : 제향에 쓰는 제물)과 예주(醴酒 : 단 술)와 향()을 피워 해마다 올리니 향사(享祀)가 그치지 않으리라.

 

어기여차 대들보를 아래로 올리니 도량서직(稻梁黍稷 : , , 기장, . 즉 모든 곡물)은 온 들에 잇달아 펼쳐있으니 넉넉한 복록(福祿)이 끝없이 드리우리라.

 

지금 제()를 올리며 부족함을 뉘우치며 엎드려 빌건데 상량(上樑)한 후에는 조두(俎豆 : 제사 때 음식을 담는 그릇)가 천지와 더불어 끝이 없게 하옵시고 재당(齋堂)은 세찬 비바람을 겪어도 오랜 세월 버티게 하옵소서. 향기(香氣)는 제례(祭禮)에 실려 엄숙히 올라가고 송삼(松杉 : 소나무와 삼나무)은 자기 몸으로 둘러싸고 있고 지세(地勢)는 언덕과 산으로 감싸 바뀌지 않도록 끌어다가 화수(花樹 : 종친간의 모임)의 계율(戒律)을 영원토록 보존하며 그치지 않도록 하리니 마땅히 참외의 넝쿨에서 결실이 면면히 이어지게 하소서.

 

정묘(서기 1927)

자헌대부 의정부찬정 시강원첨사 원임

규장각직학사 민병한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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