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숭인재기(崇仁齋記) | |||
작성자 | 관리자 [2020-02-03 21:05:10] | |||
첨부파일 |
첨부된파일갯수 : 0개 |
|||
숭인재기(崇仁齋記) 맑고 깨끗한 기운(氣運)을 길러 신령(神靈)스러운 광채(光彩)를 발(發)하니 좌해(左海 : 우리나라)에 으뜸이 되는 곳은 오로지 한성(漢城)뿐이다. 이미 옛적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이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이도(移都)하여 이후 웅진(熊津)으로 천도(遷都)하기까지 6백여 년간 도읍이었고, 고려(高麗) 숙종(肅宗)이 남경(南京)을 삼각산(三角山)의 양지(陽地)에 두어 이궁(離宮 : 임금이 궁중 밖으로 나들이할 때 머무는 곳)을 만든 지 3백년이고, 조선(朝鮮) 태조(太祖)가 천명(天命)을 받아 정정(定鼎 : 새로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하는 일)하니 이에 역년(歷年 : 한 왕조가 왕업을 누린 햇수)이 장구(長久)함이 이 땅의 기이함이 예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곧 한성 동문(東門) 밖 있는 이문리(里門里)요, 주산(主山)은 천장산(天藏山)이요, 용마산(龍馬山)을 마주보고 있으니 언덕과 산은 활처럼 둥글게 굽어있고 안개와 노을은 그윽하니 소위 말하는 천견지비(天熞地秘 : 하늘이 감추고 숨겨놓은 땅)로써 그 주인(主人)될 사람을 기다렸다. 비록 성시(城市 : 성으로 둘러싸인 시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나 문득 신선동(神仙洞)에 당(堂)이 있어 엄숙(嚴肅)하고 근엄(謹嚴)하게 나무 우거진 숲 사이에 어울려 있는 것이 숭인재(崇仁齋)요, 단(壇)이 우뚝하니 솟아있어 재실(齋室) 뒤에 있는 것이 환성군(歡城君)을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아아! 옛적 환성군(歡城君) 전공(全公)이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써 백제 온조왕을 도와 잡초만 무성한 곳을 밀어 크나큰 기업(基業)을 닦으니 덕(德)을 심고 인(仁)을 쌓아 모든 후손에게 내려주시지 자손이 번창(繁昌)하여 거의 2천년동안 곳곳에 두루 퍼졌으나 지나온 세월이 아득히 멀어 의리지장(衣履之藏 : 의복 등 소지품을 묻음)마저 상고(詳考)할 수 없구나.
오호라 귀의(歸依)함이 없으면 곧 태만(怠慢)해짐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요, 떨치고 일어나는 자 없으면 거의 망각(忘却)하는 바이니 전씨(全氏)의 여러 종친(宗親)들이 그것을 밝히기 위해 종약(宗約)을 창립(創立)하고 문헌(文獻)을 소구(遡求 : 거슬러 올라가 구함)하여 널리 국사(國史)와 가장(家狀) 및 야사(野史)를 모으기 십수년 만에 파계(派系)의 구분과 소목(昭穆 : 사당에 조상을 모실 때의 순서)의 분별을 대략 정돈(整頓)하여 총보(總譜)를 편찬(編纂)하기 시작하며 사방에 고(告)하기를 지금 우리 종족(宗族)이 각각 문호(門戶)가 있고 향사(享祀)드릴 사묘(祀廟)가 있는 것은 선조(先祖)의 유음(遺蔭 : 조상에게서 받은 은혜)이 아닌 것이 없다. 선조(先祖)의 영령(英靈)이 꾸짖으며 임하시는데도 온당히 향사(享祀)드릴 장소가 없음을 가만히 두고 본다면 어찌 정리(情理 : 인정과 도리)가 편안하겠는가.
묘소(墓所)는 이미 실전(失傳)되었으니 단(壇)을 쌓아 향사(享祀)드림이 의기지례(義起之禮 : 의를 근거로 만드는 예)에도 진실로 합당(合當)할 것인즉 그 땅을 선택함에 있어 더욱 심신(審愼 : 세밀하고 신중함)하니 한산(漢山)은 백제의 옛 수도(首都)이니 당시 공(公)의 장루(杖屢 : 지팡이가 땅바닥을 짚은 자국)가 오르지 않았다고 어찌 알겠는가. 이에 하물며 그 산천은 깊고 오묘하며 또한 정결(淨潔)하니 신명에게 가히 재계(齋戒 :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며 행동을 삼감)하며 음식을 올리는데 마땅하다. 또한 그 위치는 전국(全國)의 중앙이니 각지에서 제(祭)를 올리러 올라오는 도정(道程)이 균평(均平)하니 실로 그 편리를 얻을 것인 즉 제사(祭祀)의 풍예(豊豫 : 풍족하여 즐거움)와 단의(壇儀 : 단소)의 영원함을 미리 알 수 있어 가히 추진(推進)할만하다.
모두가 말하기를 충렬(忠烈), 충강(忠康) 이공(二公)은 고려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이요 이 땅은 송도(松都)와 가까우니 가만히 헤아려 생각해 보건데 당시 천력(踐歷 : 이곳저곳으로 널리 돌아다님)이 필시 이곳에도 많았을 것이다. 나라를 위해 싸우시다 전장(戰場)에서 돌아가시니 이미 그 묘소(墓所)는 실전(失傳)되었고, 달성(達成 : 현 대구)에 비록 사림(士林)들이 향사(享祀)드리는 서원(書院)은 있으나 영역(瑩域 : 산소)가 없으니, 자손들의 참된 정성을 일시(一時)에 합하여 단사(壇祀)를 함께 거행(擧行)하여 신도(神道 : 조상)끼리 서로 의지함이 어찌 예의에 어긋나겠는가.
이에 종의(宗議)가 드디어 하나로 모아져 단(壇)을 쌓고 나에게 그 사실(事實)의 기술(記述)을 부탁하였다. 오호라 숙계지세(叔季之世 : 말세)에 선조(先祖)의 덕업(德業)을 이어받아 지키려는 효성(孝誠)을 지극히 하여 2천년동안 이루지 못하던 사업을 거행(擧行)한 것은 아름다운 성대사(盛大事)라 그 재실(齋室)의 편액(扁額)을 숭인(崇仁)이라 하였음은 숭모조인(崇慕祖仁 : 조상의 어짊을 숭배하고 애모함)의 뜻을 취(取)함이고 또한 옛 지명(地名)도 이와 같이 일렀음을 인용(引用)한 것이다. 병인(서기 1926년) 중양월(9월) 상완(초하루부터 초열흘 사이) 가의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사 원임 규장각직학사 안동후인 김승규 적음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