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모선재 중수기와 상량문 | |||
작성자 | 관리자 [2020-02-03 20:15: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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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임영(강릉)은 곧 나의 12대 조고이신 문천공(文川公)이 처음으로 입향한 고을입니다. 臨瀛府(강릉부)의 동문 밖 용지촌(龍池村)에 그 옛터가 있다는 사실이 읍지(邑誌)에 등재되어 있다. 公이 돌아가시고 나서 비로소 산소(山所)를 강릉부의 북쪽 오리쯤 되는 곳 정동면(丁洞面) 죽현리 행정상동(杏亭上洞) 술좌(戌坐) 언덕에 모셨고 석물을 세워서 묘도(墓道)를 갖추었다. 2세를 전하여 공의 손(孫) 진사公과 교리公(전순인)이 또 선고(先考) 통덕랑公(전계현)의 산소(山所)를 정동면(丁洞面) 대전(大田) 남록 곤좌(坤坐)에 모셨으며 그 어머니 공인 삼척심씨도 합장하였습니다. 이 산에 산소(山所)를 모시었기에 우리 일가의 대대로 산소(山所)를 모시는 터전이 되었습니다.
그 후 진사公은 임영부의 남쪽 옥계면 천남리(川南里)로 이사해 살고 교리公은 정동면(丁洞面) 지상리(池上里)에 집을 짓고 살았으므로 자손 대대로 살게 된 고향이 되었습니다. 公께서 자손을 위하여 계획함이 깊고 원대하였으나 후손들이 못나서 아직도 재실을 마련하지 못하고 비록 제사는 받들지만 제수 바치는 절차나 산소에 참례하는 날에 오히려 걱정한지 오래되었다. 옛 계갑년(癸甲年) 선고(先考)와 뜻을 같이 하는 한 두 분께서 조상을 받드는 정성이 있어서 일가들과 힘을 합하여 이 재실(齋室)을 지었습니다. 이 재실을 지은 지도 벌써 70여년이(약1864년) 지났으므로 기와의 이음새가 벌어지고 서까래가 무너져서 비바람의 피해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마다 애석하게 여겼고, 후손들이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걱정하고 한탄하였습니다.
지난번 갑자 대동보를 수보(修譜)하기로 약정한 날에 시조 환성군의 ‘숭인제’를 중건하기로 결의하였으니 이는 우리 종중에 지극히 중요한 일이며, 고금의 드문 예입니다. 예라는 것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통달하는 것이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데로 미치는 것입니다. 이 강촌(江村)의 일가로 하여금 먼저 멀게는 조상을 정성으로 사모하고, 가깝게는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게 권유하였습니다. 그 조상을 위하는 도는 원근친소(遠近親疏)의 구별 없이 고르게 하여야 합니다. 이를 실천하는 조상이 있으면 또한 자손도 그러한 모범을 본받게 됩니다. 모든 일가들이 협의하여 대전동 재실을 중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일의 규모가 크고 힘이 모자랐으나 여러 일가들이 정성을 다하여 돈을 모으고 힘을 합하여 재목(材木)을 운반하기도 하였습니다. 집을 단시일 내에 지으려고 계획하고 추진하여서 애로점이 좀 있었으나 조상의 도와줌에 힘입어 차츰 정돈되었습니다. 길가는 사람의 손가락질과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모면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지금 이 고을에 사는 후손들이 옛날 조상들의 훌륭하게 한 일을 이어받아 중수를 완성하면 이 재실은 영원히 보존되어 제사를 모시는 곳이 될 것입니다.
감히 육위(六偉)의 상량문 동서남북상하의 송(頌)을 지어 그 전말을 기록하노라 아름답도다! 대전의 빼어난 곳 옛터에 기초를 쌓고 이에 영세(永世)의 규모를 새로 만들어 기둥을 세웠네. 겸하여 짧은 기간에 이를 이루려고 도모하니 선경(仙境)에 기본계획은 훌륭하나 기와가 무너지고 기둥이 섞어서 비바람의 해를 비껴나기 어렵네. 이에 여러 일가들이 일하려 나오고 목수들이 나무를 깎고 다듬어 상량대를 올리고 서까래를 얹어 집을 지으니 그 위용이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도다.
동쪽의 사랑채와 서쪽의 정자는 각각 재실의 중심부를 이루고 조상들의 음덕으로 면면히 십수대(十數代)를 번성하게 내려온 일가들이요. 조상들의 영령은 양양하게 300여 년 동안 자손들의 배례를 받던 언덕을 오르내리네. 수목(樹木)은 사람과 같을 수 없으니 어찌 다만 이평천의 모범만 하리오. 텃밭으로 족히 일가를 구원하였으니 범고소의 의장을 부러워하였네 하물며 수천 년 동안 못 이룬 ‘숭인제’를 지어 단향제(壇享祭)를 지내고 많은 자손이 조상의 음덕을 추모하여 제사를 지내고 자기가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를 갚으려는 정성으로 ‘서운재’를 중건하는 일을 겸했으니 이것이 우리 할아버지가 후손들에게 전해 준 것으로 800년 동안 후손들이 편히 살고 번성하도록 보호하는 생각을 냄이라
금일 여러 자손들이 정성을 바칠 수 있는 일이 생겼으니 조상들의 보우(保佑)로 아름다운 일이 항상 나타날 것입니다. 이에 감히 산소(山所)에 영령을 편안히 모시는 집을 만드니 봉황이 춤추고 난(鸞)이 날아서 산허리에 정기를 모으니 풍수지리의 명당을 이루어 아들이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받아 선열(先烈)의 혁혁함을 계승하고 자손이 창성함을 이어받아 때를 찾아 제사지내고 터전에서 스스로 효자가 태어나리라 생각하지 말고 교육시키고 화합하여 화목하게 살면 오래토록 길할 것이로다.
감히 작은 송(頌)을 지어 들보를 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동쪽] 들보를 동으로 던지니 바다 빛이 영롱하고 새벽해가 붉어오네 경치 좋은 땅 천년에 신비스러움을 감춘 지 오래이니 경포호수가 당겨지고 주변으로 감싸지네
[서쪽]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성산(城山)[강릉시 성산면]은 푸르러 구름다리에 접하였네. 봄가을로 서리와 이슬이 땅을 적시니 선영에 배례함이 오히려 슬프네.
[남쪽]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상산(商山)의 푸르름이 쪽(藍)보다 더 푸르네. 영령이 천고(千古)에 오실 것이니 운기(雲氣)가 어슴푸레하고 달그림자에 잠겼네
[북쪽]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시루봉에 빼어난 빛이 하늘 끝에 닿는구나. 정문이 깊숙하여 먼지와 연기로 뒤범벅되어 희미하게 보이니 수성한 잣나무와 드문드문 서 있는 소나무가 빛을 내는구나.
[상방] 들보를 위로 던지니 바로 구름과 하늘을 향하여 먼 곳을 생각나게 하네 후손이 계승하여 혹시 허물이 없을까? 생각하며 앞으로도 제사 잘 드리기를 기원하네
[하방] 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떼 지어 모이는 꽃과 나무가 들판에 가득하네 해마다 끊임없이 자손에게 교훈을 주면 이에 감동하여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고 영원히 복 받으리라.
마지막으로 엎드려 원 하건데 상량 후에 종중이 형통하고 절기마다 제사를 시행하기를 바라고 상량대를 쳐다볼 때마다 조상들의 정성을 생각하고, 조상들을 공경하는 마음이 오래도록 전해지기를 바라며, 자손들이 화목하고 번성하기를 기원하고 상전(桑田) 중턱 언덕이 영원히 보존되기를 희망합니다.
후손 광호(光浩) [ 1857. 09. 26~ 1938. 02. 29 ] 평생 성내동에서 서당훈장을 지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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