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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계서원 상량문(道溪書院 上樑文)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20: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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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서원 상량문(道溪書院 上樑文)

 

선생(先生)의 정의(正義)로운 기운이 하늘에 뻗쳤으니, 진실로 후인(後人)의 믿음이 되고 이같이 굉장한 건물(建物)을 세워 남녘에서 글방을 경영하니 선비들이 넉넉히 의지할 곳이 있게 되었다. 비록 고금(古今)의 세대(世代)는 다를지언정 추모(追慕)에 차별은 없으니 어찌 본고장에서만 제사(祭祀)할 뿐이리오. 이에 지방유지(地方有志)들과 함께 추모(追慕)하여 이 서원(書院)을 세워 장차 전통윤리(傳統倫理)를 선양(宣揚)하려면 이런 일이 아니면 손쓸 곳이 없다 하겠다.

 

공손히 생각하건데 우리 전충렬공(全忠烈公)과 전충강공(全忠康公) 두 선생(先生)은 같은 형제로 정선군(旌善君)의 후손이며 고려(高麗) 개국(開國)의 명경(名卿 : 널리 이름이 알려진 뛰어난 정승)이시다. 태어날 때 신()의 몽조(夢兆)가 있었던 바대로 골상(骨相)도 보통사람과 달랐거니와 남달리 가정교육(家庭敎育)을 충분히 받으시어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비(兼備)하였더니 마침 나라가 미약한 때에 즈음하여 이같이 형제가 한 집에서 배출된 것이다.

 

궁예(弓裔)의 반란에는 투철한 이념(理念)으로 국운(國運)을 바로잡았고 견훤(甄萱)의 침략(侵略)에는 역전(力戰)으로 대결하다가 동수(桐藪)에서 순절(殉節)하니 참으로 선생(先生)의 충성(忠誠)과 공훈(功勳)은 한()나라의 장군(將軍) 기신(紀信)을 방불케 하고 이같은 형제의 이름은 당()나라의 의사(義士) 안씨(顔氏)와 견주어도 손색(遜色)이 없을 것이다. 다만 험난한 시대에 은퇴(隱退)하여 물러나지 못하시고 순절(殉節)한 것이 아쉬우나 거룩하신 이름으로 고려 8태사(太師)에 끼었으니 후인(後人)을 위한 공덕(功德)이 더욱 크다고 하겠다.

 

우주(宇宙)를 총망라(總網羅)하여 살펴보면 선생(先生)같은 이가 있었기에 국민(國民)이 안정(安定)된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우주에 강상(綱常)이 유지될 수 있었다.

선생(先生)에게 증직(贈職)과 시호(諡號)를 하사(下賜)한 지 이미 고려 초기였다. 정선군(旌善君)과 죽산군(竹山君)이 있어 그 충성(忠誠)과 공훈(功勳)을 권장하는 은전(恩典)이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도 있었으니 서원(書院)에 배향(配享)되고 자손들이 음직(蔭職)으로 출사(出仕)하였다.

 

선생(先生)의 사적(史蹟)이 고금(古今)에 밝게 나와 있는바 일월(日月)같은 충절(忠節)을 언제나 연구(硏究)할 수 있으나 다만 한()이 되는 것은 공산(公山) 표충사(表忠祠)에 두 형제분을 병철(並腏 : 나란히 모심) 못했다는 것이다. 대개 정선(旌善)은 관()이 한가지이므로 지방(地方)을 가릴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며 우울한 심정(心情)을 도계서원(道溪書院)에서 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도덕(道德)을 숭배하고 충렬(忠烈)을 표창(表彰)하는 일은 천지신명(天地神明)께도 합당한 일인바 서원(書院)을 건립(建立)하고 사우(祠宇)를 세움은 후세(後世)의 선비들이 지당한 일로 여겨왔다. ()나라의 사가(史家)인 사마천(司馬遷)을 담읍(潭邑) 제향(祭享)을 올림으로써 그 분의 거룩한 사적(史蹟)이 묻히지 않았고 한()나라 명장(名將) 제갈량(諸葛亮)을 촉도(蜀都)에 배향(拜享)한 욕의[縟儀 : 절차를 갖춘 제례(祭禮)]는 본받을만한 것이므로 이에 선생(先生)의 후손을 주축(主軸)으로 하여 추모의 정성을 펴고자 하는 바 일반(一般)이 모두 말하기를 천년동안 미처 못했던 일일뿐인데 그 누가 불가(不可)하다 하겠는가 하였다.

 

착공(着工)을 서두르고 책임을 분담(分擔)하여 맡아 완공(完工)된 이 탁상(卓床)은 형제분의 영혼을 타향(妥享)할 곳으로, 보는 사람마다 신통하게 여겼다. 건축재목(建築材木)은 한결같이 후한 것만을 선택하였으나 규모는 대개 검소함을 위주로 하였다.

선생(先生)의 영정(影幀)을 집안에 모시게 되니 풍우(風雨)에도 걱정없고 선생(先生)의 굳센 넋을 향내음으로 달래고 제물(祭物) 또한 풍성(豊盛)하게 마련하였다.

 

높으신 그 모습 언제나 나약한 사람에게 용기(勇氣)를 고취(鼓吹)시키시니 일평생을 그려볼 때 공경하는 마음 금치 못하리라. 많은 선비가 행사(行事)하는 즈음에 새로이 인심(人心)이 화합(和合)하고 단결(團結)될 수 있으니 만인(萬人)이 축하하는 자리에 감히 변변치 못한 글월로 상량문(上樑文)을 짓고자 한다.

 

어기여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올리니 증봉방박진지웅(甑峯磅礡鎭地雄)이라

위설자산신비호(爲說玆山神秘護)하니 불휴천사고인공(不虧千禩古人功)이라.

 

어기여차 대들보를 남쪽으로 올리니 황강형여벽공함(黃江瀅如碧空涵)이라

만래약득진금세(挽來若得塵襟洗)면 특입인간료불참(特立人間了不慚)이라.

 

어기여차 대들보를 서쪽으로 올리니 십리청계로불미(十里淸溪路不迷)

구원신사휘영지(舊院新祠輝暎地)하니 춘추관패가상휴(春秋冠佩可相携).

 

어기여차 대들보를 북쪽으로 올리니 요빙구현첨신극(遙憑龜峴瞻宸極)이라

빈빈유화대동방(彬彬儒化大東邦)하니 첨득은인탄곤핍(沾得恩人殫悃愊)이라.

 

어기여차 대들보를 위쪽으로 올리니 직향운소흥원상(直向雲霄興遠想)이라

막위영령거불회(莫謂英靈去不迴)하니 흘금풍운영인앙(迄今風韻令人仰)이라.

 

어기여차 대들보를 아래로 올리니 일지화수천년사(一枝花樹千年社)

유인종차습방비(遊人從此襲芳菲)하니 암포심흉다차과(暗抱心胷多且寡).

 

엎드려 원()하오니 도계서원(道溪書院) 상량(上樑) 후에 춘추향제(春秋香禮)

길이길이 계속되기는 바라며 사림(士林)이 추모(追慕)하고 의지할 곳은 언제나 있게 하옵소서.

 

높으신 인격(人格)을 여기서 함양(涵養)할 수 있는바 전열[前烈 : 전대(前代)의 위인(偉人)]

빛난 얼을 받들어 후진교육(後進敎育)에 두루 힘쓴다면 국가(國家)에만 도움될 뿐만 아니라

 

향리(鄕里)에도 영광(榮光)되리니 더욱 유종(有終)의 미()를 거둘 것이니

호국정신(護國精神)을 길이길이 이어 받으리라.

 

수찬 김상직 삼가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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