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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절사 겸 동지사로 북경에 가는 전식(全湜)을 봉송하며
작성자 관리자 [2023-04-27 20:2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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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奉送聖節兼冬至使全公赴京(봉송성절겸동지사전공부경)

芝峯 李晬光(지봉 이수광)

 

日當南至慶流虹(일당남지경류홍)

妙簡詞臣謁帝宮(묘간사신알제궁)

許國忠誠危可仗(허국충성위가장)

登途氣槩老猶雄(등도기개로유웅)

 

雲帆曉破三山色(운범효파삼산색)

玉節秋橫萬里風(옥절추횡만리풍)

惟有故人傷別意(유유고인상별의)

不堪愁病海天東(불감수병해천동)

 

 

성절사 겸 동지사로 북경에 가는 전식(全湜)을 봉송하며

글쓴이/ 지봉 이수광

 

()이 남지[冬至(동지)]를 당하매 경사가 무지개처럼 흐르는데

사신(詞臣)이 제궁(帝宮)에 배알하도다.

나라에 바친 충성은 위태함을 가히 붙잡을 것이오

길에 오르는 기개는 늙어도 오히려 웅강하도다.

 

구름 돗대는 새벽에 삼산(三山빛을 파()하고

옥절(玉節)은 가을에 만리(萬里바람에 비끼도다.

오직 고인(故人)의 이별을 애달파하는 뜻이 있어

수심(愁心)으로 병(됨을 견디지 못하겠네 바다 하늘 동쪽에서

 

 

☆ 이수광(李晬光, 1563~1628) :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峯). 아버지는 병조판서 이희검(李希儉)이며어머니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이다. 1578(선조 11) 초시에 합격하고, 1582년 진사가 되었다. 1585(선조 18)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589년 성균관전적을 거쳐 이듬해 호조좌랑·병조좌랑을 지냈고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 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611년 왕세자의 관복(冠服)을 주청하는 사절의 부사로 다시 명 나라를 다녀왔다이때 유구(琉球사신과 섬라(暹羅타이사신을 만나 그들의 풍속을 듣고 기록하였다.

 

☆ 전씨관면록(1960) 46쪽 인용

 

 

【주】

1. 부경(赴京) : 경사(京師)에 사신으로 가는 일.

2. 묘간(妙簡) : 잘 골라 뽑음.

3. 사신(詞臣) : 문사(文詞)를 담당한 신하를 말함.

4. 허국(許國) : 나라를 위(爲)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힘을 다함.

5. 등도(登途) : 길을 떠남.

6. 운범(雲帆) : 멀리 구름 사이로 보이는 배.

7. 옥절(玉節) : 옥으로 만든 부절(符節)인데, 천자의 사신을 옥절사(玉節使) 혹은 옥절랑(玉 節郞)이라고 한다.

8. 별의(別意) : 딴 뜻.

9. 고인(故人) : 죽은 사람. 오래전부터 사귀어 온 친구(親舊).

10. 해천(海天) : 바다 위의 하늘. 바다와 하늘.

11. 전식(全湜, 1563년~1642년) :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전팽 조(全彭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혼(全焜)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전여림(全汝霖)이 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로 참봉 이신(李信)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장현광(張 顯光)의 문인이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해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김응남(金應南)의 추천으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 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 식년 문과 에 병과로 급제해 1607년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이 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람해 세칭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라 일컬어졌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위하자 예조정랑에 이어 수찬·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 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천 안에 이르러 집의가 되었으며,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 하였다. 이어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승진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대사 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했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와 예조참 판에 임명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陞階)했으나 사양하였다.

1638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순검사에 명해 하삼도의 수군을 정비하게 했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1642년 자헌(資憲)의 품계 에 오르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 다. 그 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상주 백 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처] 전식선생의 사행시(槎行詩)를 통해 본 사행재조명 [ 전재몽 편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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