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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관직편력(官職遍歷)과 삭탈관직(削奪官職)
작성자 관리자 [2023-04-01 20: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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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편력(官職遍歷)과 삭탈관직(削奪官職)

 

학송 전유형

 

1618년(무오년) 정월에 절충장군으로 충무위 부사용을 하고, 4월에 절충장군으로 용양위 부호군을 하고, 5월에는 통정대부로 병조참의가 되었다. 8월에 상소를 올려 오랑캐의 사정을 자세히 고하면서 강화도의 승천(升天)과 갑곶(甲串) 두 곳에 성을 쌓고 진을 설치할 것과 남한산성과 전라도·평안도·황해도 등지에 성곽과 못을 수리하고 쌓아서 나중의 근심을 미리 막을 것을 조목조목 말씀드렸다. 9월에 비변사 당상 이상의와 판서 박정길등이 남한산성을 고쳐서 새로 쌓는 일을 가지고 영의정 박승종에게 말하여 이조에 추천해서 광주목사를 제수받았다.

 

그 다음 해 1619년(기미년)에 공사를 시작하였는데 그 해는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제대로 살지도 못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성 쌓는 일을 광주 백성들에게 단독으로 부담케 하였으므로 상소를 올려 충청도·경상도·전라도의 승군을 지원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말하기를

“승군은 지금 궁궐을 짓는 공사에 가야 한다.”라면서 허락해 주지 않으므로 성 쌓는 공사를 중지하였다. 1619년(기미년)에 가자(加資)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1620년(경신년) 2월에 용양위 부사직을 하고 5월에 용양위 사용을 하였다. 이때에는 이이첨이 16년간이나 문형(文衡)을 맡고 있으면서 시험을 주관하고 과거를 결정하는 것을 장악하여 사람들을 추켜세우거나 떨어뜨리는 것을 방자히 자기 뜻대로 하였으니 세도의 불꽃이 하늘을 찌르는 것 같았고 벼슬의 상하가 거꾸로 되어 삼사(三司)의 높고 중요한 벼슬자리가 모두 그 문하에서 나왔다.

또한 뇌물을 받고 탐욕스레 더러운 행동을 마음대로 하면서 생사여탈(生死與奪)의 권세를 제멋대로 휘둘렀으니 조정이 문란하고 백성들이 매우 곤궁에 처하였지만,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감히 그것을 바로 잡아 주지 못하였다.

 

1621년( 天啓 원년, 광해13년)에 사위 신지익이 상소를 올려서 이이첨이 행한 짓의 잘잘못을 따졌는데 상소문 가운데 말하기를 괴리령(槐里令)의 옛일을 본받기를 바란다고 하니, 이이첨이 말하기를 “신지익의 상소는 전 아무개한테서 나왔다.”라고 하며 사간원·사헌부를 선동하여 합동으로 임금님께 아뢰게 하여 반역의 죄목으로 끌어다가 벌줄 것을 청하였다.

광해군께서 답하시기를 “ 서서히 결정하겠다.” 하시고 바로 윤허하지 않으셨으나 사간원·사헌부 합동으로 아뢴 상소가 오래 머무르지 않아서 마침내 관직을 삭탈 당하게 되었다.

 

[原文]

戊午正月折衝將軍行忠武衛副司勇四月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五月除通政大夫兵曹參議八月上疏細陳奴酋形勢而因爲條陳江華升天甲串兩處築城設陣及南漢山城湖南兩西等城池修築以備後日不虞事九月備邊司堂上李二相尙毅朴判書鼎吉等以南漢改築事言于領相朴承宗薦于吏曹除廣州牧使當於己未年始後而其年大旱民不聊生朝庭使其廣州之民獨當築城故上疏請得三南僧軍則自上以爲僧軍方赴宮闕之役而不許以此停築斯之役己未加資陞嘉善庚申二月行龍驤衛副司直五月龍驤衛司勇時李爾瞻十六年典文衡主試决科在於掌握加騰墜淵肆任已意勢熖薰天倒持太阿三司淸要之官皆出於其門恣苞苴貪汚之行擅生殺與奪之權朝庭紊亂生民塗炭人皆畏首畏尾莫敢矯非天啓元年辛酉壻申之益疏論爾瞻所爲疏中措語願效槐里令古事爾瞻謂申疏出於全某指嗾兩司合啓以反逆爲目請其拿鞠定罪廢主答以當發落趂不允從兩司合啓久而不停終止於削奪官爵

 

[출처] 학송일기

 


 

◎ 이상의 [ 李尙毅 ]

정의

조선시대 좌부승지, 병조참의, 좌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이원(而遠), 호는 소릉(少陵)·오호(五湖)·서산(西山)·파릉(巴陵). 이공려(李公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응교(應敎) 이사필(李士弼)이다. 아버지는 사재감첨정(司宰監僉正) 이우인(李友仁)이며, 어머니는 양천 허씨로 허경(許坰)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 해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정원주서·성균관전적을 거쳐 1591년 사헌부지평이 되고 이듬 해 병조정랑이 되었다. 이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난갈 때 검찰사(檢察使)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어 홍문관부응교·세자시강원필선·사헌부장령·성균관사예·홍문관교리·홍문관전한 등을 거쳐 1594년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다시 필선이 되었다가 보덕으로 승진하고, 사헌부집의·홍문관응교 등을 거쳐 1597년 말에는 진위사(陳慰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 성균관사예·사간·홍문관직제학을 거쳐 이듬 해 9월 통정대부에 오르고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이어 좌부승지·병조참의·대사간·형조참의·도승지·병조참판·홍문관부제학을 거쳐 1602년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듬 해 성천부사로 부임해 백성들을 어질게 다스리고 학교를 크게 일으켜서, 지금까지 그 고을에서 한 명도 내지 못한 소과 합격자를 내어 학구열을 불러일으켰다 한다.

1606년 중앙으로 다시 올라와 성균관대사성·도승지·형조판서를 거쳐 1609년(광해군 1)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 때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재질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 공도(公道)를 칭찬받기도 하였다. 그 뒤 지중추부사·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611년 가을 동궁고명면복주청사(東宮告命冕服奏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2년에 임진왜란 때 광해군을 호종한 공으로 위성공신(衛聖功臣)에 책록되고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져 공조판서가 되었다. 1616년 보국숭록대부에 오르고 여흥부원군에 봉해졌다. 1618년 좌찬성에 올라 세자이사(世子貳師)를 겸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위성공신이 혁파되어, 훈봉이 삭탈되고 1품계가 강등되는 동시에 지중추부사로 좌천되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저서로는 『소릉집(少陵集)』이 있다. 뒤에 선조조의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상의 [李尙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박정길 [ 朴鼎吉 ]

정의

1583(선조 16)∼1623(인조 1). 조선 후기의 문신.

 

내용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양이(養而). 할아버지는 부정(副正) 유경(裕慶)이고, 아버지는 채(綵)이며, 어머니는 장경안(張景安)의 딸이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홍문관의 수찬(修撰)·부교리(副校理),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등을 역임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이조좌랑을 거쳐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고 같은 해에 문신정시(文臣庭試)에 급제하여 겸문학(兼文學)·이조정랑에 올랐다.

1616년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검상에 이어 문신중시(文臣重試)에 을과로 급제한 뒤, 의정부의 사인(舍人), 지제교(知製敎),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거쳐 1617년 홍문관의 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 우부승지를 역임하였다.

당시 만주족의 흥기와 명나라 쇠퇴라는 북방정세의 변동에 따라 군적(軍籍)의 정비와 군역(軍役)의 폐단 시정을 논하였고, 1618년 성절사 겸 진주사(聖節使兼陳奏使), 그리고 동지부사(冬至副使)까지 겸하여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대사성과 동지의금부사를 겸하고 홍문관부제학에 이르렀다.

 

1620년 대사성·공조참판을 역임하고, 1622년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명나라 도독(都督) 모문룡(毛文龍)을 맞이하였다. 1623년 병조참판으로 재직중 인조반정을 만나 폐모(廢母)에 앞장선 죄목 등으로 주살(誅殺)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박정길 [朴鼎吉]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박승종 [ 朴承宗 ]

요약

조선 중기 광해군 때의 문신. 판서 계현의 손자. 광해군 때 우의정·좌의정, 영의정에 오르고 밀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윤인 일당이 인목대비를 죽이려 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저지했다. 폐모론에 반대하였다. 인조반정 때 자결하였다.

 

본관 밀양, 자 효백(孝伯), 호 퇴우당(退憂堂), 시호 숙민(肅愍), 판서 계현(啓賢)의 손자이다.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8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9년 봉교(奉敎)를 거쳐 지제교(知製敎)·병조정랑을 지냈다.

1600년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부제학(副提學)·병조판서를 거쳐 1610년(광해군 2) 형조판서·의금부판사 등을 지냈다. 우의정·좌의정에 이어 1619년 영의정에 오르고 밀양부원군(密陽府院君)에 봉해졌다. 앞서 1612년 이이첨(李爾瞻)의 사주로 윤인(尹訒) 등의 일당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죽이려 할 때 죽음을 무릅쓰고 저지하였으며, 1617년 폐모론(廢母論)에도 극력 반대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손녀가 광해군의 세자빈(世子嬪)이 되어 그 일족이 오랫동안 권세를 누린 사실을 자책, 아들과 함께 목매어 자결하였다. 관작이 추탈(追奪)되었으나,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승종 [朴承宗]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신지익(申之益)

1588년(선조 21)∼1649년(인조 27). 본관은 아주(鵝洲). 자는 순거(舜擧), 호는 양일당(養一堂).

승지(承旨)를 지낸 오재(梧齋) 신지제(申之悌)의 종제(從弟)로 학행(學行)이 있었다. 부친을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였다. 어머니 병환에 목욕재계 후 북두칠성에 빌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였다. 상(喪)을 당해서는 호읍(號泣)하다 혼절하기도 하였으며, 최질(衰絰)을 풀지 않고 집상(執喪)하는 등 효행(孝行)이 높아서 신지익과 사촌 신협(申鋏), 아들 신심(申鐔)과 함께 충북 청원군 미원면 가양리 솔골 삼효각(三孝閣)에 1703년(숙종 29) 효로써 정려(旌閭)되었다. 손자 신응태(申應泰)는 우암(尤庵)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사서제요도설(四書提要圖說)』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행장(行狀)을 찬(撰)하였고, 공(公)에 대한 일이 『삼강록(三綱錄)』에 기재되었다. 청주(淸州)의 검암서원(儉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 이이첨 [ 李爾瞻 ]

요약

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 때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이 적합함을 주장했다. 광해군 즉위 후 조정에서 소북파를 숙청했다.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시켰다. 폐모론을 주장,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인조반정 뒤 참형되었다.

 

본관 광주(廣州)이고,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쌍리(雙里)이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일으킨 이극돈(李克墩)의 후손이다. 1582년(선조 15)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여 광릉참봉(光陵參奉)이라는 말직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릉에 있는 세조 능의 위패를 지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159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1608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하였다. 하지만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경계를 받았다. 시강원(侍講院) 사서(司書)로 있으면서 세자 광해군을 가르치는 교사를 역임하여 신임을 쌓았으며 조식의 제자이자 대북파(大北派)의 영수인 정인홍(鄭仁弘)의 가르침을 받았고 허균(許筠)과 친밀하게 지냈다.

선조가 만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후계로 삼으려 할 때 소북(小北)의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이 이에 찬성하자, 정인홍(鄭仁弘)과 함께 동궁(東宮)인 광해군(光海君)의 적합함을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원배령(遠配令)이 내려졌다. 하지만 선조가 갑자기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예조판서에 올랐다. 당시 선조의 죽음을 두고 독살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는데, 아침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선조가 집무를 보다가 광해군이 올린 음식을 먹고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기 때문에 광해군을 옹립한 이이첨이 김상궁과 함께 선조를 해쳤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다. 원배령을 받았던 이이첨이 유배를 떠나지 않고 이틀 동안 머뭇거리다 풀려난 것도 이런 소문을 뒷받침했다. 선조는 어의(御醫) 허준(許浚)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승하하였으며, 영창대군을 옹립했던 유영경 등은 모두 유배되어 처형되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이이첨은 정운공신(定運功臣)에 녹훈되었다. 이어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臨海君)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한 뒤 사사(賜死)하였으며, 광해군의 조카인 진릉군(晋陵君)도 같은 방법으로 제거하였다.

이어 대제학을 겸임하고, 광창부원군(廣昌府院君)에 봉해지고 과거(科擧)를 주관하게 된 것을 기화로 소북파(小北派)는 완전히 전멸하였으며 서인과 남인들의 입지는 좁아졌다. 이로써 대북파가 조정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여 권력의 기틀을 다졌다. 1613년(광해군 5년) 서양갑(徐羊甲)과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역모를 꾀한다고 자백하게 하여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켰다.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안치하여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하였다. 1617년 정인홍과 함께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여 이듬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켰다. 광해군이 호패법을 실시하려고 하자 정인홍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중단시켰는데, 이는 당시 이이첨과 정인홍이 각각 자신의 근거지에 임진왜란 때 소집된 많은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자 이천으로 달아났다가 붙잡힌 뒤 이튿날 참형되었으며 그의 세 아들도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이첨 [李爾瞻]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괴리령(槐里令) 주유(朱游)

한 성제(漢成帝) 때 괴리령(槐里令)。 자 유(游)。 안창후 장우(安昌侯張禹)가 사부(師傅)가 되어 외척 왕씨(王氏)의 전횡(專橫)을 보고도 직언(直言)하지 못하고 아첨하므로, 글을 올려 ‘원컨대 상방검(尙方劍)을 빌어 간신 장우를 베어지이다。’ 하니, 성제가 노하여 죽이고자 어사(御使)에게 주운을 끌어내라 하니까 주운이 대궐의 난간을 붙잡고 놓지 않으므로 난간이 부러졌음[절함折檻]。 후에 난간을 고치려 하니 성제가 고치지 말라고 명하여 직신(直臣)을 정표(旌表)했음。<한서漢書 주운전朱雲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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