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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만언소(萬言疏)와 장원급제(壯元及第)
작성자 관리자 [2023-03-19 21: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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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언소(萬言疏)와 장원급제(壯元及第)

 

학송 전유형

 

이로부터 벼슬에는 뜻이 없고 과거(科擧) 보는 것을 일삼지 않아 이어서 두 번이나 과거를 보지 않았다.

 

1603년(계묘년) 봄에 만언소(萬言疏)를 올리니 이 당시의 병폐에 그대로 맞는 말이었다. 앞일을 내다보는 밝은 지혜와 혼자서 터득한 충성을 부지런하고 지성스럽다고 족히 말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조정의 붕당(朋黨)에 대해서 깊이 살핀 것과 오랑캐들이 들어와 노략질하는 것을 예방하는 계책 등은 모든 사람이 미처 알지 못한 것을 말한 것이었으니 이것이 한편의 가장 주된 중요한 뜻이었다.

유형(全有亨)이 오늘 근심하는 것이 미리 수십 년 앞을 헤아린 것이라. 수십 년 후에 취할 것이 마치 부절(符節)을 맞추는 것과 같았고 눈으로 보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붕당(朋黨)의 무리가 이것으로 인해 더욱 시기하고 자주 헐뜯어서 평생 불우하고 험하게 살다가 덕이 많으신 임금님을 만나서 은덕과 행복이 끝이 없으니 한 번 죽더라고 이 은혜를 갚으리라. 임금님의 은혜는 자나 깨나 감히 잊지 못하겠구나.

 

하루는 문득 꿈에 감동을 한 일이 있었고 또 선고(先考)께서 돌아가실 때 손바닥에다 문자를 써서 남기신 훈계가 생각나 다시 과거를 보러 나갔다.

1605년(을사년) 6월 25일에 정시(庭試)에 응제하여 장원하였고 이것이 6월 28일에 판명이 났다.

1605년 7월 3일 사복주부(司僕主簿)를 제수받고 감찰 중의 수망(首望)이라는 점찍힘(受點)을 받았다.

1605년 7월 13일 사간(司諫)이 임금님께 잘못되었다고 간했으나 윤허하지 않으시다가

1605년 7월 15일 문과 갑과 제1인 급제 출신자라는 교지를 내렸다. 두 번 간하니 윤허하시어 드디어 관직록에서 이름을 삭제당하였다.

1606년(병오년) 9월 중순에 특별히 관직을 준다는 명이 있다는 것을 들었는데 권세를 가지고 농간하는 한 사람이 침실 중에 감추어 두었었다고 김정탁(金正鐸)이 말하였다.

1607년(정미년) 6월 27일에 상소한 것을 물리치시고 임명서를 도로 주시며

1607년 12월에 벼슬을 준다는 명을 내렸다.

 

1608년(무신년) 2월 1일 선조 대왕께서 승하하셔서

1608년 3월 서울로 올라가 경운궁 동문 밖에서 곡(哭)하였다.

 

 

[原文]

癸卯春上萬言疏無非正中時病之語也先見之明獨淂之忠勤勤懇懇皆足可稱而其中深察朝庭朋黨之說預備奴酋入寇之策皆知人之所不知言人之所不言最爲一篇之宗旨以有亨當日之所憂觀於浚日則預料於數十年之前取必於數十年之浚如合符節無異目見朋黨之徒以此尤嫉數被詆毁一生坎軻而遭遇聖明恩幸罔極願爲一死以報聖恩食息不敢忘也一日忽有夢感之事又思先考臨終時掌心書文字遺訓乃復赴擧乙巳六月二十五日應製庭試居首二十八日判名七月初三日除司僕主簿是日首擬監察受點十三日司諫論啓不允再啓允遂削去仕版丙午九月間聞有特敍之命而有一權姦從中寢閣之金正字鐸言之丁未六月二十七日被疏放還給職貼十二月敍命下戊申二月初一日宣祖賓天三月上京哭于慶運宮東門外

 

[출처] 학송일기

 


 

 

◎ 붕당 [ 朋黨 ]

요약

조선 중기 학맥과 정치적 입장에 따라 형성된 집단을 일컫는 말.

 

한국에서는 조선 중기에 성립되어 서로 대립하고 공존하면서 정치를 이끌어 갔다. 지방에서 성장한 사림파(士林派)는 15세기 말 이후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훈구파(勳舊派)로부터의 심한 탄압을 이겨내고,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뒤 중앙 정계를 장악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서인과 동인으로 분파되었다. 근본적 원인은 당시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훈구 정치를 어떤 속도와 방법으로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후배 세대와 선배 세대의 입장 차이에 있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중앙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역량과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관직을 둘러싼 경쟁이 집단화되어 나타난 현상이었다. 중국과 조선의 군주체제에서는 신료가 붕당을 결집하는 것은 범죄로 인식되었으며, 《경국대전》에는 거기에 대한 처벌 규정이 들어 있다. 그러나 중국 송대(宋代)의 신유학에서는 구양수(歐陽修)와 주희(朱熹) 등에 의해 군자끼리 모인 ‘군자당’이 소인의 집단을 누르고 정치를 주도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제시되고, 조선의 사림파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특히, 학문과 정치가 결합된 상황에서 붕당은 학통의 차이와 정치적 입지에 따라 많은 분기를 보이면서 정치 세력 결집과 권력 행사에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붕당 본문 이미지 1

서인은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중심이 되었으며, 동인은 주로 이황(李滉) ·조식(曺植)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로 구성되었다. 이 중 구성이 복잡한 동인은 이황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남인과 조식, 서경덕을 중심으로 한 북인으로 분기되며, 북인은 다시 대북 ·소북 등 여러 분파를 낳았다. 각 붕당간의 부침이 심한 선조 때를 지나 광해군 즉위에 공이 큰 대북이 정권을 잡았으나, 서인 ·남인을 크게 배격하면서 영창대군(永昌大君) 살해와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유폐 등 무리한 정책을 편 끝에, 정변을 일으켜 인조를 앞세운 서인에 의해 숙청되었다. 이리하여 북인은 정파로서의 의미가 소멸하였다.

17세기 중반에는 서인이 주도권을 잡은 상태에서 남인과 경쟁하고, 반대당의 존재와 상호 비판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정치방법론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경쟁이 점차 가열되어 자기 당의 절대성과 반대당 축출을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붕당론이 경직되는 가운데, 17세기 말 숙종 때에는 일거에 정권담당자가 교체되는 환국(換局)을 몇 차례 겪은 뒤 서인의 우세가 확립되었다. 그 즈음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기하고, 경종 때에 왕위 계승 문제를 쟁점으로 격렬한 정쟁을 겪으며 서로에 대한 보복과 탄압, 사사 행위 등 붕당정치의 한계를 드러냈다.

18세기 중 ·후반의 영조와 정조 때에는 국왕의 절대성을 추구한 탕평책(蕩平策)으로 말미암아 정치세력이 국왕의 정책에 대한 지지 여부에 따라 재편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신료들 내부의 쟁점과 입장 차이를 두고 대립한 기존 붕당의 변질을 뜻하는 것이다. 붕당은 한때 조선의 망국을 초래한 원인으로 격렬히 비판되었으나, 그 나름대로의 정제된 이념과 정치운영 장치를 갖추고 폭넓은 여론을 반영하며, 후대로 내려와서는 사회 정책에도 독자적 입장을 지닌 정치집단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조선시대 군주체제의 틀 안에서 지배세력인 사족의 이해를 반영하는 데 그침으로써 현대의 민주 정당과는 명백히 구분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붕당 [朋黨]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부절 [ 符節 ]

표준국어대사전

1.예전에, 돌이나 대나무ㆍ옥 따위로 만들어 신표로 삼던 물건. 주로 사신들이 가지고 다녔으며 둘로 갈라서 하나는 조정에 보관하고 하나는 본인이 가지고 다니면서 신분의 증거로 사용하였다.

 

◎ 정시 [ 庭試 ]

정시는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에 경축할 일이 있거나 문신중시가 실시될 때 시행되는 문과와 무과의 한 종류이다. 정시 문과는 유생들의 권학을 목적으로 실시되어 녹명 절차가 느슨하였으며,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급락이 결정되어 시관 상피제, 시권 역서 등이 적용되지 않아 채점의 공정성, 응시생 통제 등이 문제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영조 대에는 정시 문과에 초시를 설치하고, 전시에서 시권을 역서하여 채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시 [庭試]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수망 [ 首望 ]

① 관리를 임명하기 위하여 이(吏)•병조(兵曹)에서 관원 후보자 3인을 주의(注擬)한 3망(望) 중 첫 번째 후보자, 또는 임금이 친필로 점을 찍어 택한 사람.

② 시호(諡號)•능호(陵號)•글제 등을 결정할 때 그 대상 세 가지를 임금에게 올리는데, 그 첫째의 이름이나 제목.

[네이버 지식백과] 수망 [首望]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수점 [ 受點 ]

2품 이상의 관원을 선임할 때 이조나 병조에서 삼망(三望)을 올려 임금으로부터 낙점을 받던 일.

[네이버 지식백과] 수점 [受點]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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