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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중봉 조헌 선생을 애도하는 제문 [ 인봉 전승업 ]
작성자 관리자 [2023-02-14 21: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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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 조헌 선생을 애도하는 제문, 둘(대상제문)

 

인봉 전승업

 

해는 갑오년(1594년) 8월 18일

전승업은 삼가 변변치 못한 제수를 차려놓고

조선생님 궤연 앞에 통곡하며 절합니다.

아!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두 돌이 돌아왔으니

이는 바로 금계(錦溪)에서 분출하는 충성심으로 혈전을 하던 날입니다.

700의사(義士)의 집도

모두 오늘의 아픔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진중(陣中)의 막료 중에서 살아남은 자이니

어찌 슬퍼서 목이 메지 않겠습니까?

괴롭고 괴롭습니다.

선생님의 삶과 죽음을 말한다면

하늘은 처음에 선생을 이 세상에 내실 때

다른 재주와 덕을 익히지 못하게 하시고

어찌 태어나 충성을 다하다 원수에게 죽게 하시었으며

또한 절개로 항거하다 화를 초래하게 하였습니까?

평소에 앞을 내다보는 지혜는

참으로 신명(神明)하셨는데

헛되게 괴기(怪奇)한 자들의 꾸지람을 얻었으며

전생이 끝난 공로는

곧 장순(張巡)과 허원(許遠)같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적을 가볍게 여겼다는 조롱만 초래하였고

먼저 난리가 날 징조를 보고 이를 우려해서

앞서 미리 방비하였는데

이것이 무슨 죄가 된다고

기필코 선생님의 생애를 치욕스럽게 하였으며

그리고 깊은 울분으로 천하의 악당을 쏘아서

급히 군부(君父)의 원수를 토벌함이

어찌하여 큰 벌을 받으며

돌아가신 뒤의 제사마저도 쓸쓸하여야 합니까?

살펴보면 자가의 사리만을 쫓는 매국하는 간사한 무리는

오히려 큰 총애를 받고

의기(義氣)를 가장하여 넘치는 공을 세운 무리는

세상을 빛냈다는 영광을 누렸으되

유독 우리 선생께서는

좋지 않은 일을 당하셨으니

선악과 화복의 이치가

진실로 이와 같은 것입니까?

저 푸른 하늘은

앞으로 어떻게 신자(臣子)가 된 자에게 착함을 권하고 악함을

징계하겠습니까?

보잘것없는 몸으로 선생님을 알게 된 뒤로

정의는 가장 두터웠으며

함께 창의(倡義)한 뒤에도 살아남았으니

정녕 홀로 살아남음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외로움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뿌렸습니다.

성자(成子)의 분택(分宅)함을 사모하여

장차 선생의 자손으로 더불어 죽고 삶에

대대로 좋은 의(義)를 맺어서

영원히 사모하는 곳을 흉내 내려 하오니

영령께서는 이를 기뻐하실지 않을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현재 저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

책임을 다할 수 있을지를 모르겠습니다.

기왕에 선생님의 도덕과 문장과

신명(神明)한 지혜와 장엄한 절개를

천지간에 들어내지 못하였고

또한 모든 벗들의 충혼과 의백(義魄)으로 하여금

포상을 받고 정려를 세우는 은전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말씀이 여기에 이르니

부끄러움이 진실로 많습니다.

그러나 근래는 진원룡·박명윤과 같이

간초(諫草)와 잡저(雜著)를 수집하고

이 한 건을 옮겨 베껴서

인쇄하여 널리 배포하였으니

선생님의 도학(道學)에 해당하는 정성에 다 이르지는 못하였으나

그러나 선생님의 강상(綱常)의 뜻과

맑고 깨끗한 지조와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상설의 절개를 세워놓았으니

이제는 선생님의 업적과 학문이 후세에 없어질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原文]

祭重峰文 其二

 

歲次甲午八月丙午朔十八日癸亥

全承業謹具薄尊

痛哭再拜于曺先生靈几之前

嗚呼先生之再朞已回耶

此乃錦溪奮忠血戰之日

七百義士之家

皆有今日之痛

愚以幕中之餘生

安得不感愴而哽塞

苦哉苦哉

先生之生死也

皇天之肇降先生

似不閑他才德

奈何生旣貢忠而作仇死

又抗節而賈禍耶

平時先見之智

則眞箇神明

而徒得怪奇之誚

亂後保障之功

則實是巡遠

而反招輕敵之譏

先憂釀亂之兆

而撤桑陰雨之前者

是何大罪

而必使困辱其生也

深憤射天之惡

而急擊君父之讐者

有何大罰

而寂寞身後之事乎

觀夫懷利賣國之奸

尙紆金章之寵

假義濫功之輩

多享赫世之榮

而獨我先生

逢此不祥

善惡禍福之理

因如是乎

彼蒼者天

將何以勸懲其爲人臣子者乎

余之無狀

辱知最厚

同事後生

愧程嬰之獨存

撫孤泣下

慕成子之分宅

將與令嗣死生以之

庶結世代之好

擬爲永慕之地

不識英靈能喜否乎

愚在人間

無以塞責

旣不使先生之道德文章

神知壯節

暴著覆載之間

又不使諸友之忠魂義魄

得蒙褒旌之典

言念到此

愧負良多

近與陳元龍朴明允

搜集諫草與雜著

傳寫一件

壽榟廣布

庶幾使先生格非當道之誠

夫植綱常之志

氷淸玉潔之操

松篁霜雪之節

不至於泯滅於後而已

嗚呼痛哉

 

[출처] 인봉 전승업선생 유고

[ 옥천전씨송정공파종회 발행 국역 전규호 ]

 


 

◎ 조헌 [ 趙憲 ]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영규 등 승병과 합세해 청주를 탈환하였다.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뛰어난 학자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하여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헌 [趙憲]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전승업 [ 全承業 ]

옥천의 인물 전승업칠백의 총을 세운 의병 참모장 인봉(仁峰) 전승업(全承業 : 1547 ~ 1596)

옥천 출신의 인봉(仁峰) 전승업은 임진왜란 때에 금산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700 열사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중봉 조헌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전승업의 자는 효선(孝先), 호는 우재(愚齋)인데 만년에는 인봉(仁峰)으로 불렸다. 본관은 옥천이며, 선산 곽씨를 어머니로 하여 1547년(명종 2)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났다.

옥천 출신의 인봉(仁峰) 전승업은 임진왜란 때에 금산에서 장렬히 최후를 마친 700 열사들의 무덤을 만들어 주고 중봉 조헌의 시신을 수습한 인물이다. 전승업의 자는 효선(孝先), 호는 우재(愚齋)인데 만년에는 인봉(仁峰)으로 불렸다. 본관은 옥천이며, 선산 곽씨를 어머니로 하여 1547년(명종 2) 옥천군 동이면 적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본디 과거를 보는데 필요한 글들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어버이의 명으로 과거 공부를 하여 1568년(선조 2) 증광초시에서 장원하고 선조 5년에 또 급제하였으나, 거듭 회시에서 낙방을 하고, “선비가 참됨을 잃는 데는 과거 시험을 자주 보는 것 같은 게 없다” 하고 과거 공부를 집어 치우고 자신의 인격을 닦는 학문에 힘썼다. 이후, 천거에 의해 중학교수?동문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의 병이 더욱 심해져 사양했다.

벼슬을 그만두고 보은에 와 있던 조중봉은 1584년(선조 17) 옥천 안내에 은둔하고 있었다. 이에 인봉은 조중봉이 있는 곳을 왕래하며 도의를 강론한다. 인봉은 본디부터 산수를 즐겼는데 조중봉과 서로 당시의 상황에 우려를 표하고 왜란이 있을 것을 미리 예측했다. 1592년 4월 임진란이 일어나고 왕이 수도를 떠나자 그는 인봉정사에 있다가 통곡하며 ‘임금이 피난을 갔는데 신하가 집에 있다고 앉아서 바라만 볼 수 있겠는가?’ 하고 큰 아들을 중봉에게 보내 거의(擧義)할 것을 약속했다. 이어 건장한 종 100여명을 모으고 잡곡 등 100여석을 모아 우선 군량미로 충당한 다음 청산?영동에 격서를 보내 군량미를 모았다.

8월 선생과 중봉은 1,500명의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 서문 밖에 진을 쳤다가 적과 싸워 크게 승리했다. 이를 왕에게 알리기 위해 사람을 보냈는데 관군과의 충돌로 인해 전달되지 못하자 직접 글을 왕께 전하고자 길을 떠났다. 그러나, 조중봉이 금산의 적을 치다가 전군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봉사(封事)를 곽현에게 주어 전하도록 하고 곧바로 금계의 싸움터로 돌아와 700 의병과 승군 300의 시신을 거두어 큰 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중봉의 시신을 수습하여 옥천으로 돌아와 장례를 지내고 중봉이 나라에 올린 글과 기타 잡저를 모아 조중봉의 유고집을 만들었다. 이후 중봉의 모부인과 아들을 인봉초당에서 함께 지내게 하였고 마음을 다해 도왔다.

인봉은 평소 병이 있었는데 임난을 격을 후 더우 심해져 날마다 약을 복용하면서도 금계에서 조중봉 등과 함께 죽지 못했음과 왜적을 섬멸하지 못했음을 한으로 여기다 1596년 봄에 정사에서 갑자기 세상을 떴다. 묘소는 동이면 금암리에 있다.

[출처] 옥천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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