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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식(全湜)선생 유물의 가치 재조명(再照明)
작성자 관리자 [2022-11-26 20: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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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VWwwl8qas4w 

 

https://youtu.be/dz8TIshy2fY 

 

 

2022년 11월 05일경 제17회 상주 역사문화 학술발표대회 사서(沙西) 전식(全湜)선생 유물의 가치 재조명(再照明)에 대한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사서(沙西) 전식(선조 36년 1603년 식년시), 규천(虯川) 전극항 (인조 2년 1624년 공주정시) 은 부자(父子)로서 과거급제하여서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혼란한 시대에 문신(文臣)으로 활동하였고, 사서(沙西) 전식(全湜) 선생은 바닷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외교관(사신, 성절사 正使)으로 중국(明나라)에 가서 국익을 위하여 외교활동을 한 분입니다. 사서(沙西) 전식(全湜) 선생이 전씨 문중에 차지하는 비중을[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전씨 문중을 대표하는 학자이며 文臣 ] 볼 때 꼭 참가하여 더 많이 배우고 싶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교통편을 검토해 보니 강릉에서 상주로 당일 접근하기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KTX를 타고 서울로 가서 다시 김천이나 영주로 가서 다시 상주로 가는 방안도 있고, 강릉에서 원주로 기차로 가서 갈아타 안동 쪽으로 접근하는 방안도 있었습니다, 1박을 안 하고 접근하기가 만만치 않아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가고는 싶으나 교통편이 마땅치 않아 거의 포기한 상태였는데 대전에 사는 전재몽 종인이 대전으로 오면 자가용으로 상주까지 가는 교통편을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다행히 강릉 대전 고속버스가 있어 환승을 안 해도 되기 때문에 엄두를 내게 되었습니다. 11월 17일 아침 07시 대전행 고속버스를 타고 대전복합터미널에 내려 전재몽 종인을 만나 자가용을 타고 상주에 12시경 도착하였는데 강릉에서 상주까지 5시간이 걸렸습니다.

 

대전에서 상주로 오는 중에 학술발표대회 개회까지 자투리 시간이 1시간 정도 있는데 상주향교를 방문하고 싶다고 의견을 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큰 향교로는 경북 상주향교(尙州鄕校), 강원 강릉향교(江陵鄕校), 전남 나주향교(羅州鄕校)로 알려져서 상주향교를 견학해 보고 싶었습니다. 강릉향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친구가 회원들과 버스를 전세 내서 상주향교를 견학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이번 기회에 꼭 보고 싶었습니다.

 

상주 출신 유명한 학자로는 상사삼로(商社三老)에 알려진 사서(沙西) 전식(全湜), 창석(蒼石) 이준(李埈),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있었으며 이분 중에 우복 정경세(鄭經世)는 강릉대도호부 부사(1613-1615)로 역임한 바 있어서 우복 정경세(鄭經世)를 기념하는 도동사가 강릉에 세워져 기념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서(沙西) 전식(全湜) 선생이 강릉대도호부 부사로 왔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는 의견을 말한 적도 있습니다. 사서(沙西) 전식(全湜) 선생은 경주부윤을 역임한 바 있습니다.

상주(尙州)와 강릉(江陵)의 공통점은 지금도 유학을 숭상하는 도시라는 것 이외도 옛날에는 경주와 상주가 대표도시라서 경상도이고 강릉 원주가 대표도시라서 강원도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신흥 도시에 밀려있다는 것입니다.

 

상주문화원 부근에서 전우석 목사님을 만나서 3명이 함께 점심을 먹게 되었으며, 전화로는 여러 번 통화한 적이 있으나 얼굴은 처음 보아서 반가웠습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먼저 나왔는데 주인이 홍시를 권유해서 홍시를 먹게 되었는데 다른 분들이 숟가락을 이용해 홍시를 먹으므로 처음으로 따라서 해 보았더니 편리한 점이 있었다.

상주시는 예부터 세 가지 흰색 농산물인 곶감ㆍ쌀ㆍ누에고치로 유명해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불렸다고 들었는데 명성 그대로 꿀맛이었습니다. 점심 먹고 제 휴대전화기 화면 사진을 보고, 제 딸 같다고 말하였는데 다른 분은 가수 전유진(全裕珍)이라고 바로 알아보았습니다.

 

이때 전남표 유교 신문 기자가 전화가 왔었습니다.

취재차 방문하였는데 거의 유일하게 혼자 오셔서 상주에서 1박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릉에서 어떤 경로로 왔는지 질문하니 강릉 원주 안동까지 기차로 와서 안동에서 ‘전병만’님을 만나서 함께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의 비(碑)가 있는 인각사를 다녀왔다고 하였다. 생각한 것보다 인각사가 규모가 작았고, 삼국유사를 저술한 일연스님이 속명이 ‘김견명(金見明)’이 아니라 ‘전견명(全見明)’이라고 최근 학계에서 논의가 되고 있기에 취재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문제는 전(全)과 김(金)의 한자가 비슷하여 잘못 읽어 생겨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후손들이 더 노력하여 학자들의 검증을 걸쳐 정설로 만들어 교과서를 비롯한 관련된 내용을 바로잡아야 의무가 생겼다고 이해하였습니다.

본인(기자)이 알기로는 전씨 중에 학술대회를 한 것은 처음으로 알고 있다고 하였으나, 전재몽 종인은 단독은 처음이고 상주 출신 여러 학자 중의 1분으로 학술대회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한학자, 서예가로 유명한 ‘전규호’님을 만나서 인사드렸는데 전번 인터넷에서 한옥을 잘 지으신 것을 보았다고 말씀드렸더니 본인의 것이 아니고 한옥에 주련 등을 본인이 직접 써 주었는데 그 집 주인이 카페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후일담을 들려주었습니다. 인터넷 카페나 SNS에서 많이 보았던 ‘전완하’님, ‘전면엽’ 예비역 장군님, ‘전홍석’ 문경문화원장님, 김해에 사는 ‘전명호’님, ‘전영호’님 등을 처음 뵙고 명함을 교환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학술대회 진행은 상주문화원 ‘전부엽’사무국장이 하였고 대회사는 ‘김홍배’ 상주문화원장님, 축사는 ‘강영석’ 상주시장님이 하였습니다.

 

첫 번째 발표자는 순천대학교 이욱 교수였는데 ‘사서(沙西) 종가 소장 고문서로 본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삶’을 주제였습니다. 발표 자료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지방관으로서 그의 삶을 살펴보자. 1596년 그가 수세차사원으로 가흥창(可興倉)에 있을 때였다. 당시는 창고가 마련되지 않아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노적해 둔 채로 보관하였다. 그런데 부산 왜영(倭營)에 있던 명나라 사신 이종성이 몰래 도망쳐서, 일본군이 그를 추격하는 사건이 있었다. 일본군이 이종성을 쫓아 충청도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놀란 충주의 지방관들은 모두 도망가고 말았다. 그러나 노적해 놓은 세곡의 유실을 걱정한 전식(全湜)은 관사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리(下吏)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 세곡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 위험한 순간에도 수세차사원으로서의 자신의 본분을 지켰다.

중략

이처럼 관료로서의 전식(全湜)의 삶을 살펴보면, 자신 스스로 관료로서의 직무를 다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본인에 국한되지 않고,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되었다.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는 일반 백성들에게 그것을 요구하였고, 언관(言官)으로 재직할 때는 국왕에게도 자주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모두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게 되면 사회는 저절로 안정되고 부강해질 것으로 판단했다고 여겨진다. 이러한 세상이 유학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이기도 했다.』

 

두 번째 발표자는 문화재청 문화재 감정위원 김미경이었으며 ‘조선 중기 상사삼로(商社三老)라 칭송된 사서(沙西) 전식(全湜) 초상’이 주제였습니다. 발표 자료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상주 종가 소장본인 사서(沙西) 전식(全湜) 선생의 초상은 상주 지역의 ‘상산삼로(商山三老)’로 칭송된 유학자로서 그의 위상과 생전의 용모를 살필 수 있는 초상이다. 관련 유물 일괄은 상주 종가에 초본 1점, 초상 1점, 영정 보관함 2점이 잘 남아 있고, 다른 초상 1점도 1987년 옥천의 목담서원 영당에 봉안하기 위해 이안되었음을 밝혀냈다. 아울러 상주의 전식(全湜) 종가 후손의 전언을 토대로 초본은 사서(沙西) 선생의 생전 70대의 모습을 그린 것임도 알 수 있었다. 전식(全湜)은 사후 1714년 상주 옥동서원에, 1819년 옥천 목담서원에 각각 추가 배향되었다. 그러나 영정 제작은 1819년 목담서원 배향 시 옥천 사림에서 상주를 방문하여 이모해 봉안되었다는 것을 사서 선생의 외손이 기록한 「장계세고」의 「제사서전선생영정문(祭沙西全先生影幀文)」을 통해 고증할 수 있다. 1819년 이모본의 저본되었던 초본이 상주 종가 소장본으로 추정됐다.

현재 사서(沙西) 전식(全湜) 선생의 초본 2점은 각각 그 가치를 인정받아 충북과 경북의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특히 이모하거나 정본을 낼 때 모본이 되는 초본과 초상, 영정함까지 일괄 세트가 잘 남아 있는 점에서 조선 후기 공신초상의 형식을 띠는 초상화의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세 번째 발표자는 국립안동대학교 융합콘텐츠학과 이은주 교수였으며 ‘사서 종가 소장 조복에 관하여’가 주제였습니다. 발표 자료 일부를 인용해 보겠습니다.

『전식(全湜)의 조복 구성물 3점은 색상을 확인할 수 있는 최고(最古)의 유물이라는 점에서 다른 유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녔다. 홍색 능직물로 제작한 조복 상의는 가선이 소실된 상태였다. 깃 부분에도 안감만 남아 있었는데 깃 형태는 당코목판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록이나 초상화에 근거하여 흑연(黑緣)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전식(全湜) 조복 상의의 옆선에는 가선 장식이 없다는 점에서 다른 유물들과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가선과 바탕 사이에 끼운 흰색 장식선은 아직 사용되지 않았음을 확인하였다.

중략

전식(全湜)의 조복 유물은 색상이나 형태 면에서 17세기 조복 제도를 구체적으로 반영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 국조오례의서례” “경국대전” 조복 제도의 간략하거나 부정확한 기록을 보완해 주는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다만 현전하는 유물이 한정적이어서 조복 구성물 전체를 살펴보지 못한 한계점이 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발표 후 유물의 기탁(寄託)과 위탁(委託), 기증(寄贈)의 차이점에 대한 질의가 있었습니다. 답변은 기탁과 위탁은 같은 개념이고 원소유자가 반환을 요구하면 반환할 수 있으며, 기증은 반환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지방문화재에서 국가 문화재로 승격 여부도 질문하였습니다. 세 분의 발표를 들으면서 마치 학생으로 다시 돌아간 기분이었으며 세밀한 설명과 전문적인 강의를 듣고 문화재에 대한 안목을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먼 강원도에서 왔다고 교통비에 보태라고 정성을 표하는 두 분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마음만 받겠다고 정중하게 사양하였습니다. 끝나고 기념품으로 고급우산과 떡을 받았습니다. 종손께서 특별히 저에게 우산 하나 더 주시고 소장 자료도 별도로 주시었습니다. 종손께서 특별히 배려해 주시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 분도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유교 신문 전남표 기자와 함께 전재몽 종인의 차를 타고 대전을 경유해서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23:00에 강릉으로 돌아왔습니다.

비록 24시간 중 10시간을 길에 투자하였으나 사서(沙西) 전식(全湜) 선생의 유물의 가치를 배울 좋은 기회였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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