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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문경군 읍지 (附 인근읍지, 상주군읍지) [ 전식 全湜 ]
작성자 관리자 [2022-09-08 17:4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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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湜

 

 

沃川人  進士薦授察訪  文科  官至吏曹參判  常在經筵  校理任叔英  常稱  通古今鄭經世  達事理全湜  後朝京師時  遼路塞航海萬里  忽風作舟危  人皆喪精  公獨不變  俶有兩大鰍  舟而行近陸入逝  咸以爲神助云  中朝見者  皆稱有德宰相  丙子之亂倡義  於學問德業  爲世所重  號沙西  諡忠簡  有文集  享玉洞書院

 

옥천전씨이며 진사 때 찰방(察訪)으로 천거 받아 제수되었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항상 경연에 진강(進講) 하였던바 교리 「임숙영」이 늘 말하길 고금을 통달한 분은 「정경세」이며, 사리에 통달한 분은 「전식」이라고 하였다.

 

후에 사신으로 행차 시에 요동의 길이 막혀서 바다로 만 리를 항해하게 되었다. 홀연한 돌풍으로 배가 위험에 처하였을 때 대부분 수행원은 정신을 상실할 정도였으나 공(公)은 홀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홀연히 두 마리의 큰 물고기가 배 옆에서 안내하였으며 배가 순조로이 항해하여 육지에 가까워지자 사라졌다. 모든 사람이 이는 신령이 돕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중국조정에서 덕이 있는 재상이라고 칭송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학문과 덕업이 당세에 중후한 평가를 받았으며 호는 「사서」이고 시호는 「충간」이다. 문집(사서집)이 있으며 옥동서원과 목담서원에 배향되었다.

 

[출처] 문경군 읍지 (附 인근읍지, 상주군읍지)

자료제공: 문경문화원장 전홍석

 


 

 


 

◎ 전식(全湜)

정의

조선시대 대사간,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전팽조(全彭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혼(全焜)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전여림(全汝霖)이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로 참봉 이신(李信)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해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김응남(金應南)의 추천으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607년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람해 세칭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라 일컬어졌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위하자 예조정랑에 이어 수찬·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천안에 이르러 집의가 되었으며,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하였다. 이어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승진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대사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했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와 예조참판에 임명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陞階)했으나 사양하였다.

1638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순검사에 명해 하삼도의 수군을 정비하게 했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1642년 자헌(資憲)의 품계에 오르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상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식 [全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경세 [ 鄭經世 ]

개설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하거(荷渠)·승성자(乘成子)·석중도인(石衆道人). 조선 중기 여러 관직을 겸한 행정가이며 중앙과 지방행정에도 남다른 능력을 발휘하였다. 정치관은 충효사상을 바탕으로 덕치주의와 왕도정치를 지향하였다. 상주에 도남서원을 세우는 등 예학에 깊은 조예를 가졌으며 1608년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만언소를 올려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물의 전형을 공정하게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유가적 학문관을 견지하여 강릉부사를 재임하면서 흥학비가 세워질 정도로 지방예학의 진흥에도 진력하였다.

 

가계

부친은 좌찬성을 역임한 정여관(鄭汝寬)이다.

 

생애

어려서부터 남다른 기질이 있어 유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78년 경상도 향시에 응시하여 생원과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1586년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588년에는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과 통사랑대교로 승진하였다. 1596년 이조좌랑, 영남어사, 홍문관교리, 이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598년 2월 승정원우승지 3월에 좌승지 4월에 경상감사로 나갔다. 1600년 영해부사, 1607년 대구부사, 1609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병부에 글을 올려 화약의 매입을 예년의 갑절로 교섭하여 가선대부의 칭호를 받았다. 그 해 10월 나주목사, 12월 전라감사로 영전되었으며, 1613년 강릉대도호부 부사로 왔으며, 1623년 3월 홍문관부제학으로 제수되고, 대사헌, 승정원도승지, 의정부참찬,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인재를 널리 취하는 등 국정에 최선을 다하였다.

 

활동사항

강릉부사로 1613년 4월에 왔다가 1615년 9월까지 재직했다. 생존 시 관아에 사우를 세우다 불행히 중도에 그만 두었으나 1823년 순조 계미년에 연곡면 퇴곡리에 우복사를 건립하였다. 이를 일명 도동사(道東祠)라 하며 박돈검·신석필 등이 주도하였다. 권필교·최하현이 옮겨서 지을 것을 주장했고 성조유사인 권유교·최동현과 사림유사인 심지간·김계례가 주도하였다. 1833년 화재로 강당이 탄 것을 1848년 다시 세웠으며 1868년 11월에 철폐하고 위판은 우복사 뒷산에 묻었다.

 

학문과 사상

주자학 경전에 본원을 두고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평소에 주자를 흠모하였다. 따라서 주자와 퇴계를 평생의 모범으로 삼고 이들의 학설을 많이 따랐다. 그가 쓴 『양정편(養正篇)』과 『주문작해(朱文酌解)』는 주자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주자학에 밝아 후진교육이나 경연에서 강의할 때 주자의 견해를 적극 밝히고 주자가 편찬한 『소학』과 이황의 『주서절요』를 인용하였다.

 

정경세는 경전에 밝고 예학을 소중히 여겨 강릉대도호부 부사로 재직하면서 유시문을 내려 지역의 위례패속(違禮敗俗)을 고치게 하자 강릉향교 홍문 안에 권학흥교비(勸學興敎碑)가 세워졌다. 강릉에 세운 우복사의 비문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선생이 계축년(1613) 봄에 우리 고을에 부임 그 행정에 풍속을 교정하는 일을 선무(先務)로 하시고 곧 모든 선비를 초치하사 "혼상(婚喪)은 예 중에도 중대한 것인데 이곳은 문헌지방(文獻之邦)이면서 혹 위례하는 절목이 있음은 심히 부끄러운 일이다." 하시고 2~3명의 선비와 더불어 가르침의 방책을 설정하고 『효경』, 『소학』을 힘써 가르치며 미진한 몇 개 절목을 평정(評定)하니 고을의 혼상에서 그릇된 일들이 거의 바르게 되어 민속이 돈후하고 예교가 갖추어졌으니 선생의 가르침이 크도다. 우리 고을 선비 있음은 오래로되 교수하는 방법도 오히려 진흥치 못하였더니 다행히 선생에게 힘입어 오늘이 있게 되었으니 그 어찌 선생의 권학흥교의 뜻을 감히 잊으리오. 어리석은 나는 감히 적노라. 선생의 휘는 경세요, 자는 경임이요, 호는 우복이니 진양인이시다.

무공랑 전행공릉참봉 김지안(金志顔) 근서 통훈대부 전행강서현령 이상빈(李尙馪) 근찬.”

 

저술

『우복집(愚伏集)』, 『상례참고(喪禮參考)』, 『주문작해』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강릉부사를 역임하면서 예학에 밝고 교화로써 다스려 지역 사류의 호평을 받았다. 생존 시 강릉에서는 살아있는 사람의 사당(生祠堂)인 도동사를 세울 정도였으며 사후에 추모의 열기를 더해 연곡면 퇴곡리에 퇴곡서원과 우복사를 세웠다.

후에 정경세가 억울하게 죽은 진이서낭당을 세워준 설화와 관련된 연곡현감의 관탈민녀형 설화가 전하고 있으며 지금도 진이서낭당 내부에는 정경세 내외와 진이의 영정이 걸려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경세 [鄭經世]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임숙영 [ 任叔英 ]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자는 무숙(茂叔), 호는 소암(疎庵)이며, 초명(初名)은 상(湘)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급제하여 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이 되었다. 1611년(광해군 3) 별시문과에 응시하여 척신들의 무도함을 공박하는 대책문(對策文)을 써서 급제하였으나 이를 본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급제자 명단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였다. 이를 두고 여러 달 동안 삼사(三司)가 간쟁하고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 주장하여 다시 급제자가 되었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와 박사(博士)를 거쳐 주서(注書)로 있을 때인 1613년(광해군 5) 계축화옥(癸丑禍獄)가 일어나자 신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검열(檢閱)에 등용되어 사관을 겸하였다. 이어 부수찬 등을 지내고 사가독서(賜暇讀書;유능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한 제도)한 뒤 지평(持平)을 지냈다. 사후 부제학에 추증되었고,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소암집(疎庵集)》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숙영 [任叔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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