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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산부사 전공간(全公侃) 묘소를 다녀와서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19:3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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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정선 전씨 족보(庚子譜) 수권 사진 등재를 위한 촬영을 진행해 오고 있었습니다. 강릉지구에 거주하는 석릉군파, 채미헌파, 임하군파 묘소의 촬영은 거의 다 하였으나, 한 장소가 빠져있었습니다.

이조정랑, 개성판윤, 평산부사를 역임한 전공간(全公侃)묘소였습니다.

몇 달 전부터 관심을 갖고 장소를 알고 싶어서 석릉군파 종인에게 문의한 적이 있었으나, 답변은 후손이 끊겨서 외손인 문화 류씨(文化 柳氏)들이 묘소를 수호하고 시제(時祭)를 지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外孫 奉祀)  

 

가까운 방계손(傍系孫)은 수도권으로 대부분 이주하여 묘소를 알고 있는 분이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음에 갑갑함을 품고 있었는데, 20191029일 양양군 3대 명당에 모신 성균 생원 전공신(全公信)의 묘소 촬영가는 자동차 안에 이 문제를 제기하였더니, 춘천교대 학장을 역임한 전성탁 종인이 뜻밖에도 묘소를 가 본 적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설명을 들어보니 강릉시 성산면 식당거리에서 왕산면쪽 다리를 건너자마자 얼음을 저장하던 창고를 지나서 앞산 북면을 따라 올라가면 정상부근 남향에 묘소가 있다는 설명을 하였습니다.

1101일에 수권 작업을 하고 계신 전영래회장님으로부터 강릉지구 묘소 사진 중 평산부사, 이조정랑의 묘소 사진이 빠졌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1104일 정선 전씨 강릉지구 회장인 전선집 종인과 함께 묘소를 찾아보기로 하였다고 답변하였습니다.

 

드디어 오늘 약속한 날이 와서 회장님 차에 동승하여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로 향하였습니다. 학장님의 설명대로 움직이지 않고 오봉서원에 주차하여 남면에서 정상으로 등산하면서 찾아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산에서 묘소를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고, 2시간 정도는 시행착오하면서 찾아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서광(曙光)이 있었습니다. 나는 별로 못 느꼈는데 강릉회장께서 운전하면서 신호등에 한 번도 서지 않고 파란 불로 무사통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1015분경 오봉서원에 도착하여 주차하여 강릉향교에서 장의로 활동한 바 있는 강릉지구 회장님이 오봉서원 두 개의 건물이 있는데 한 곳은 공자 진영(孔子 眞影)과 또 다른 한 곳은 강릉부사 함헌을 기리는 곳이라는 설명을 하였습니다.

오늘 마침 동네주민과 문화재 지킴이들이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인 할머니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본인은 잘 모른다고 옆 집 사람에게 문의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0m를 가서 마침 마당에서 청소하고 계신 분께 문의하였습니다. 본인이 뒷산을 다니다가 전씨 묘소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길을 따라 위쪽으로 가면 한 1000평정도의 밭이 있고 조금 더 지나면 대나무 숲을 지나서 산등성이로 들어가면 등산로가 있고 그 길을 따라 한 500m를 가면 있다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촬영을 할 수 있느냐고 하였으나 고사하여서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성함을 여쭈니 전인주(全寅周)’이고 채미헌파라고 하여서 더 반가웠습니다.
 

설명에 따라 산을 오르다가 비교적 산 중턱에서 넓은 밭도 보고 멋진 별장 같은 집도 보면서 산중에 이런 풍경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1035분경 등산로에 진입하여 가다가 산 정상을 지나 8부 능선쯤에서 쉽게 묘소를 발견하였습니다. 비석을 보니 通訓大夫 行 平山府使 旌善全公 諱 公侃之墓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큐브퍼즐(Cube puzzle) 에서 마지막 퍼즐이 딱 맞추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 번도 시행착오 없이 찾을 수 있었으니 파란 불로 무사통과한 서광(曙光)의 의미가 되새겨졌습니다.

 

 

묘소가 양명한 곳에 위치하였고 특이한 점은 문관석의 코가 다른 곳과 다르게 밝게 빛나는 점이었습니다.

외손봉사하는 묘소라서 벌초가 안 되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는데 벌초가 되고 우리가 통과한 길의 반대쪽의 산길도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별로 못 느꼈는데 강릉회장님은 산길이 다른 산의 길보다 2배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어서 묘소 관리와 수호를 열심히 누군가가 하고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회장님은 높은 벼슬을 하고 효자로 정부로부터 표창도 받은 선조(先祖)가 이 산을 소유하고 있다가 아들이 없어서 사위 문화 류씨에게 물려주어서 그 외손들이 묘소수호와 봉사(奉祀)를 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습니다.


500년전 어느 날 도인(道人)이 이조정랑에게 말씀드리기를 대감께서 돌아가신 후 502년 지난 후 어느 날 3명의 방계손과 종인이 대감의 묘소를 찾을 것입니다.”고 예언하였다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내년에 다시 올 때를 생각하여 우리가 온 길의 반대쪽으로 내려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잘 정리되고 트인 길을 따라 한 300m를 내려가니 오봉암이라는 암자가 있었습니다. 암자를 지나 한 100m정도 내려가니 성산에서 오봉저수지로 가는 도로가 나왔습니다. 도로를 따라 차가 있는 오봉서원에 도착하니 1115분정도가 되었습니다. 묘소 찾기 탐사가 1시간 정도 걸린 결과가 되었습니다.

수권등재 사진을 찍고 계신 전남표 기자분과 다음에 미팅하여 묘소 사진을 촬영하기로 예정하고 점심 먹으러 출발하였을 때 마침 남표 아저씨로부터 전화가 와서 그 간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더니 오늘 시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정말로 서광(曙光)의 의미가 또 한 번 되새겨졌습니다.

 

입암동에서 남표아저씨를 픽업하고 내곡동 하나로 마트에서 강릉회장님 주과포를 사가지고 아침과 반대 방향으로 접근하여 오봉암을 지나고 있었는데 창문을 열고 스님이 어디를 가느냐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묘소에 간다고 말씀드리고 올라가서 사진촬영을 끝내고 주과포를 진설하고 3명이지만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를 갖추어 봉행하였습니다

 

간소한 제례를 끝낸 후 내려오는 길에 오봉암 스님이 은행나무 열매와 잎을 쓸고 있었는데. 인사를 하고 난 후 스님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스님의 말씀의 요지는 30년 정도 오봉암에 있었는데 통훈대부 묘소에 다녀가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네이버지도를 보니 오늘 통과한 길 말고 더 적합한 루트가 있어 보였습니다. 외손들이 봉사(奉祀)할 때 그 길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처음 보았을 것으로 추측해 보았습니다.

그 스님은 오봉암도량에 오기 전에 춘천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에 도인(道人) 2분이 나타나서 강릉 오봉산 부근에 가서 도량(道場)을 만들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이다.’ 라는 말씀을 듣고 이곳에 왔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봉암 부근에 묘소가 비교적 많이 있는데 후손들이 잘 다니지 않는 묘소를 본인이 벌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연유를 질문하니 오봉암도량 주위에 묘소들도 잘 돌보아주면 오봉암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서 그리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제일 정상부근에 있는 통훈대부 묘소를 벌초할 무렵에 제일 먼저 벌초를 하고 앉아서 쉬다 보면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한 10분 정도 더 투자하여 벌초하곤 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산길이 다른 곳보다 넓게 관리하였다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외손들이 다른 루트로 와서 벌초하고 시제도 시행하였을 수도 있고, 스님이 더 보충하여 벌초하였을 수도 있을 것으로 추측해 보았습니다.

아무런 연고가 없고 지역적으로 같은 권역에 있다고 관리해 주심은 부처님의 자비심외에 다른 설명을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너무 고마워서 스님의 법명(法名)을 여쭈었더니, “본명(本名)을 알 필요가 있겠습니까?” 라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스님 법명을 알고 싶습니다.”라고 다시 말씀드리니 보현이라고 하였습니다.

보현스님께 정말로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고 우리 중에 평산부사의 방계손인 강릉회장님도 문중회의에서 이 내용을 보고하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오늘 아침 자동차의 신호가 늘 파란 불로 바뀌었던 서광(曙光)이 완성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성산에서 장어탕을 먹으려고 하였으나 월요일은 휴무라서 제비리에 있는 풍경소리식당에서 새싹비빔밥과 만둣국을 먹고 오후 4시경 오늘 하루 일과를 마치었습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하늘과 땅, 조상의 가호(加護)가 있었다는 생각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500년전의 어느 도인(道人)의 예언이 실현되는 하루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 추기

정선전씨 석릉군파 '정랑公 문중'에 확인한 결과

문화 류씨에게 소유권을 이전한 것이 아니라 관리권을 인정해 주었고, 소유권은  '정랑公 문중'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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