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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문각 대제학 전우화(全遇和) 묘소를 다녀와서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18:2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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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과 대화하는 고갯마루를 찾아서(星摩嶺)

 

성마령에 있는 신비한 묘소를 참배하기 위하여 20191108일 금요일 09시경 적십자회관 앞에서 전선집 강릉회장님과 전남표 기자님을 만났습니다.

 

 

 

움푹 파인 구덩이에 위치한 묘소의 전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오륜은 고려시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가 조선시대가 들어섬에 따라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새로운 왕조에 협조하지 않았으므로, 관향(貫鄕)인 정선에 가서 한양으로 출입하지 말라는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本鄕安置)

그래서 연로하신 할아버지를 모시고 정선의 새로운 안거지(安居地)를 찾아 정선군 용탄면 행마동 성마령을 넘게 되었습니다. 그때 고려시대 예문각 대제학과 문화시중 평장사를 역임하였던 할아버지(全遇和)가 노환으로 병이 깊어져서 임시로 초막을 짓고 머물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극진한 간병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부인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시장을 보러가게 되었는데, 도중에 거의 아사(餓死) 직전의 노스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상중(喪中)이라 그냥 지나치려다가 사람의 생명을 회복시키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여 자신의 젓을 짜서 종기에 담아 스님께 공양하였습니다.

기력을 차린 노스님은 고마운 마음에서 묏자리를 점지(占地) 해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800m 정도를 가면 삼거리가 나오고 삼거리 위쪽 큰 소나무가 있는데 소나무 앞 15m지점에 묘를 쓰면 대대로 백성의 존경을 받는 공직자와 학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여 주었습니다. 다만 몇 가지 주의점할 점을 덧붙여 알려주었습니다.

우선 땅을 파다가 바위가 나올 것이니 그 바위를 치우지 말고 그 위에 관()을 올려놓고 묘()를 써야 하고, 시간적으로 조금 늦추어 안장하되 내가 성마령을 다 넘을 정도가 되거든 하관(下棺)을 하라고 신신당부(申申當付)하였습니다.

그러나 유족들의 소통부족과 노스님의 예언을 믿지 않고 지관을 더 믿어서 바위를 일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큰 이변(異變)이 생겼습니다. 그 밑에서 살던 왕벌 3마리가 날아가고, 그중 한 마리는는 성마령 고갯길을 거의 다 넘었던 노스님한테 달려가 쏘아서 즉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묘소자리가 쿵하는 큰 소리가 나면서 땅이 내려앉게 되었습니다.

전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려사(高麗史)기록에 의하면 고려 말 전보문(全普門)은 판도판서, 판삼사사를 역임하고, 전오륜(全五倫)은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습니다. 지금의 장관을 두 명이나 배출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씨는 60명의 문과 급제자가 배출하었으며, 그 중 채미헌파에서는 전효우(사헌부 감찰), 전순인(군자감정), 전방경(용궁현감)이 문과 급제하였으나 장관급에는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노스님이 이야기한 대로 실천하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 보았습니다.

정말로 예언대로 백성들의 존경받는 공직자와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을까?

사헌부 감찰, 군자감정, 용궁현감보다 더 현달하여 장관급에 승진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상상을 하면서 자동차 안에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20191104일에 평산부사 전공간묘소를 찾기 위해서 오봉리를 찾았던 후일담(後日譚)으로 후손이 끊긴 사연이 있음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평산 부사의 장례식이 진행되고 있을 때의 에피소드(episode)입니다.

지관(地官) 김승(金昇)이 지금의 장소를 점지(占地)하였는데, 지관 최윤(崔胤)은 극구 반대하였습니다.

실제로 장례식 진행 중에 목표지점 바로 20m전에 이르렀을 때 지관 최윤(崔胤)은  여기에 묘소를 써야하고 지관 김승(金昇)이 점지한 곳에 묘소를 쓰면 후손(後孫)이 끊긴다고 울면서 호소하였습니다.

결과론이지만 지관 최윤(崔胤)의 주장을 수용하였으면, 지금처럼 후손(後孫)이 없어 외손봉사(外孫奉祀)를 받는 일이 없지 않았을까? 라는 상상도 해 보았습니다. ‘한 번의 선택이 10년이 좌우 한다.’라는 광고를 본 적이 있는데, 묘소의 장소 선택은 500년을 좌우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문중 묘소는 강릉시 왕산면 왕산리에 있는데, 왕산면 한자 표기에 대한 의견 교환을 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왕성할 이라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분은 임금 을 써서 王山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강릉시 왕산면사무소에 문의한 결과 일제의 잔재로 旺山으로 표기되었는데 원래 의미대로 王山面으로 개정하고 공고하였으므로 이제는 임금 를 써야 한다는 유권해석을 받았습니다.

젊은 시절 한 3년 동안 살았던 임계를 지나면서 회상에 잠기기도 했습니다.

정선 임계 시절 어느 날, 시장 안 큰 신배나무가 있는 집에 살았는데 아내가 주인집에 잠깐 들어오라 해서 들어가 보니 어떤 할아버지가 동네 사람들 사주(四柱)를 보아 주고 있었습니다.

얼떨결에 사주를 보게 되었는데, 금년 9월에 강릉으로 이사가 예정되어 있고, 앞으로는 틀림없이 교육장이 될 것임을 예언하였습니다. 이 예언이 실천 안 되면 송아지 한 마리를 저에게 준다고 하였습니다. 그 해 9월에 강릉으로 이사 가게 되었으나, 그 후 은퇴할 때까지 교육장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가끔은 아내와 임계 할아버지한테 송아지 받으러 가야 한다는 농담을 하곤 합니다.

그밖에도 몇 분의 저에 대한 예언을 더 이야기하면서 정선군 여량면에 접어들었습니다.

 

 

 

다리가 없어서 아우라지를 버스가 배를 타고 건넜던 기억을 되살아났고, 그 때 보다 획기적으로 변화한 여량 우회도로를 지나갔습니다.

여량을 지나면서 1978년 무렵 젊은 시절 2년을 보낸 구절리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동행한 분들이 향교 장의(掌議) 출신 유림(儒林)이므로 자연히 구절리 노추산 이성대(二聖臺)와 얽힌 노추산 산신령님과 밀당을 하였던 일화를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노추산(魯鄒山)은 공자님의 노()나라와 맹자님의 추()나라에서 연유된 지명이므로 유림(儒林)과 관계가 깊습니다. 노추산과 이웃한 산이 4명의 달사(達士)를 배출할 장소라는 의미로 사달산(四達山)입니다

 

 4자리에서 이미 두 명(신라시대 설총, 조선시대 이율곡)은 충원되었고, 두 명의 빈자리가 있다는 전설을 듣고 지도에 의지하여 남자 3명이 정선 구절리 방향이 아닌 강릉 왕산 대기 방향으로 1차 원정을 가게 되었습니다. 산촌이라서 물어볼 사람이 별로 없어 지도상의 사달산(四達山)이라고 추측한 곳으로 등산하게 되었는데, 산의 2/3쯤을 올라갔는데 이곳이 사달산(四達山)이라는 확신도 없고 비가 와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노추산(魯鄒山)을 찾긴 제대로 찾았는데, 비로 인해 실패한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영험한 산은 산이 허락하지 않으면 입산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노추산(魯鄒山) 산신령이 입산(入山)을 불허(不許)한 것으로 추측해 보았습니다

 

2차 원정대는 멤버를 바꾸어서 강릉 왕산 대기로 노추산(魯鄒山)을 올라갔었는데, 노추산(魯鄒山) 산신령이 거부하는데도 무리하게 올라갔는지 내려오는 길에 두 팀으로 갈라져서 산을 헤매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일행 두 명이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있어서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출발하였는데, 조금 내려가서 야호! 하니 호응이 있었는데 내려올수록 멀리서 들렸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중간지점에서 다시 올라가서 일행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간 정도에서 못 만나서 다시 베이스캠프로 내려오는데 나와 한 팀인 일행이 갑자기 길이 안 보인다고 하여 멈춰 섰었습니다. 나도 약간은 선뜻하였는데 잠시 정신을 차려 길을 찾았습니다. 나도 길이 안 보였으면 두 팀이 산을 어둡도록 헤맸을 것으로 추측하였습니다. 또 다시 일행을 찾아 올라갔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하다가 저녁 무렵이 되었습니다.

배도 고프고, 산을 헤매는 사람 중에 내일 직장에 출근해야할 여성도 있어서 신고를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아 고민 속에 있었는데, 저쪽에서 우리가 찾던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너무 반갑고 오늘 하루가 스쳐지나가서 하마터면 울 뻔 했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산이 원뿔처럼 생겼는데 원뿔을 나사처럼 내려가서 딴 곳이 나와서 헤매다가 왕산대기와 정반대 방향 정선구절에서 산판차를 만나 타고 왔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니 노추산(魯鄒山) 산신령이 입산을 불허하였는데 무시하고 들어가서 이렇게 헤매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헤매게 되었는지 원인을 되짚어 보고자 3차 원정대를 다시 꾸며서 강릉을 출발하여 왕산대기 정상을 조금 지나니 갑자기 차가 멈추면서 차가 안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농담인가 하였는데 정말 배터리가 방전되어서 강릉에서 정비소 차량을 불러서 배터리를 충전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차를 정비하고 예정대로 노추산(魯鄒山)으로 가자고 하니 산을 헤맸던 멤버들은 고개를 흔들면서 못가겠다고 하여서 강릉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때 멤버들은 노추산(魯鄒山) 산신령의 존재를 긴가민가하면서도 약간의 경외감(敬畏感)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노추산(魯鄒山)에 두려움을 느꼈던 멤버를 제외하고 다시 4차 원정대를 꾸며서 이번에는 정선 구절리쪽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구절리쪽에는 안내판이 잘 되어 있어서 산을 헤맬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다만 비가 와서 골짜기 통과하는 길이 보이지 않아서 조금 헤맸습니다. 그날따라 안개가 끼고 약간 경사가 있어서 일행들이 중간에서 돌아가자고 하였으나, 설득하여 올라가고 있었는데, 안개사이로 이성대(二聖臺) 처마가 보여서 굉장히 환희하였습니다. 이성대(二聖臺)는 바위가 병풍처럼 에워싸고, 바위에서 물이 끊임없이 내려오고 있어서 신비하게 느껴졌습니다.

설총선생과 율곡선생님의 위패를 모신 이성대(二聖臺)에 도착하니 어떤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반갑게 마중 나왔습니다. 본인은 이성대(二聖臺)에서 기도하면서 머물고 있고, 오늘 아침에 노추산(魯鄒山) 산신령이 아주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걸쳐 올라오는 분이 있으니 극진히 대접하고 하룻밤 주무시게 하라는 현몽을 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입산 불허로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은 것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신기하기도 했지만, 하루 숙박할 생각은 없어서 그 사람의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후일담(後日譚)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 때 그 호의(好意)를 받아들였으면 지금 굉장한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사람도 주위에 있습니다

 

여량에서 정선까지도 옛날에 살던 때와는 전혀 다르고 넓게 도로포장이 되어서 있어서 정선에 도착하여서 주과포를 구입하여서 성마령식당에 도착하였습니다.

전남표 기자님과 친분이 두터운 정선 전씨 채미헌파 전경석회장님과 성마령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전정석 종인이 마중 나왔습니다.

정선시내에서 용탄면 성마령까지는 전경석 회장이 안내하였습니다. 차안에서 족보 수단 작업에 대한 의견도 교환하고, 옛날 인연 있던 전위선생님의 가족들의 근황도 들었습니다. 그의 가족 중에 전주수는 춘천시장 후보로 나선 적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꾸불꾸불한 1차선 도로에 진입하였습니다. 헬기착륙장등을 지나면서 비포장이고 삼거리 길도 나와서 이곳 토박이고 여러 번 묘소에 다녀와서 익숙한 전경석회장님도 1번 정도 길에 대한 확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일반 승용차처럼 낮은 차로는 접근 가능하지 않고 중간에 차를 만나면 후진하여야 하는 오지(奧地) 도로였습니다.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가능하지 않고, 도보로 시간을 많이 투자하여 등산은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꾸불꾸불한 도로를 덜컹덜컹 흔들리면서 전설이 어린 신비한 성마령 묘소에 1130분께 도착하였습니다.

 

 

 

차를 세운 곳에서 한 15m 정도를 올라가니 거북바위가 있고 움푹 파인 구덩이에 묘소가 보였습니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와는 다른 감동이 다가왔습니다. 전설에는 펑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꺼졌다고 나와 있으나 석회암지대에 있는 작은 (돌리네) 분지였습니다.

작은 연못 같은 곳인데 비가 왔을 때 어떻게 물이 처리되는지 궁금하였습니다.

준비한 주과포를 차려놓고 간소한 제례를 봉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구덩이를 나와서 언덕에 있는 의 자제인 全賁의 묘소도 촬영하였습니다.

사비를 들여서 두 묘소를 성역화 하는데 공헌한 사람은 전석룡’公이었고 두 분의 시향(時享)은 음력 0915일에 정선군 남면 낙동리 중시조 묘소 시향이 끝나고 오후에 봉행한다고 들었습니다. 요즘은 신비한 묘소로 많이 알려져서 경향각지(京鄕各地)의 시인 묵객(詩人墨客)들의 방문이 많아졌다고 들었습니다.

별빛과 교류하는 마루에 위치한 신비한 묘소 방문을 마치고 종인이 운영하는 성마령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음식은 산초기름으로 구운 두부였습니다. 옛날 평창군 계촌리에서 직장 생활할 때 먹어본 후 오랜만에 먹어보았습니다.

 

전선집회장님의 권유로 정선군 지족산으로 이동하였더니 1430분이 되었습니다. 지족산 입구에서 한 10분정도 걸어가니 숭록대부 全子建묘소가 있었습니다. 묘소 주위에 후손들의 묘소 약 30기가 있었습니다. 묘소 촬영 후 오늘의 정선 일정을 마감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임계에도 잠간 들려서 요즘 품질이 좋다고 소문난 임계 사과도 구입하고 나서 강릉으로 내려와서 오리구이식당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1725분경 일과를 마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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