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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선전씨 중시조 旌善君 諱 愃 (全 愃) 시향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18: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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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전씨 중시조 旌善君 諱 愃 (全 愃) 시향

 

 

20171103일 금요일 오늘은 음력으로 0915일 우리의 중시조이신 (全 愃) 선조의 시향일입니다.

소풍가는 아이처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옷차림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날씨가 궁금하여 컴퓨터의 일기예보를 들여다보았다. 정선은 오전에는 갬인데 오후부터 비가 올 확률이 30%이었다.

강릉보다 정선의 비 올 시간이 빠르게 표시되어 있었다. 우산을 가져가야 하는지 망설여졌습니다. 막연히 비가 행사시간에는 오지 않기를 희망하면서도 요즈음의 일기예보의 정확성 때문에 조금은 마음 한구석에 석연찮았습니다.

 

8시에 약속된 강릉 택시 터미널 광장으로 갔습니다. 전찬진 원로, 전찬균 강릉지구종친회장, 전찬정 형님, 전성표 내외와 전우찬 내외, 나를 포함하여 전부 8명이었습니다. 잠시 1호차 차번호를 보니 뒷번호가 10번이었다. 지금 보다 젊었을 때는 차번호를 보고 412510 이라고 전부를 외울 수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력이 많이 떨어져 뒤로부터 두 개의 번호만 기억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을 터득하였습니다.

자가용 2대로 가기로 하였는데. 2호차가 내비게이션을 이용하기 위하여 정확한 지번을 알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래서 전인재씨가 카페 대화하기를 이용하여 정선시향에 대한 안내가 없다고 카페에 올려 달라는 요청을 받아 옛날 시향안내 자료를 보고 정선군 남면 낙동리 산 63번지라고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 기억을 되살려 그 내용을 알려주었습니다.

1호차에 타서 주소를 물어보니 낙동리 산 120번지라고 하였다. 홈페이지에서 본 정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정보가 맞는지 궁금하였습니다.

 

 

정선시향 이틀 뒤 11월 첫째 주 일요일인 1105일에는 광명시에 있는 호성공신 석릉군 全 龍선조 시제에 다녀왔습니다. 내비게이션에 의지하여 수도권에 가까이 갔는데, 새로운 도로가 신설되어서 제2영동고속도로를 통과하고 성남시를 지나서 복잡한 도로에서 잘못 들어 U턴도 하면서 애쓰고 겨우 찾아갔었습니다.

그러나 정선은 단순하고 교통량이 적어서 큰 문제점 없이 정선군 남면 낙동리 선영에 도착하였습니다.

2호차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63번지까지 갔다가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조금은 미안하였습니다. 그래서 접수처로 가서 전제택씨한테 정확한 지번을 알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2007년 정도인가 기억이 가물거리는데 친척들과 함께 자가용 한 대로 낙동리 선영을 참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는 선영 앞쪽으로 계단이 있어서 걸어 올라간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워낙 빨리 도착하여 정류장에 차를 대고 나서 시간이 남아서 선영쪽의 반대쪽으로 700m를 걸어 내려가서, 정선종친회에서 제작 게시한 현수막을 촬영하려고 갔었습니다.

환영현수막과 현판도 사진 찍고 다시 걸어오고 있었는데, 자가용이 멈춰 서서 타라고 하였습니다. 어디에서 오느냐고 물으니 삼척에서 온다고 하였다. 오늘 행사에 참가하는 사람은 모두 종친이므로 어디가나 묻지도 않고 태워주어서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차장에서 내려서 2007년 참배 때를 기억하며 길을 걸어 올라갔습니다. 옛날에는 계단을 따라 정면으로 올라갔는데,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산등성 옆길을 따라 올라가게 돼 있었습니다.

나중에 묘소에 올라가서 원로들에게 질문을 하니 계단이 있었는데 어떠한 이유인지는 몰라도 철거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산등성이 옆길을 따라 오르다보니 나무들이 다른 곳에 비해 훨씬 크게 느껴졌습니다. 옛날 학창시절인 박정희 대통령 때 불렀던 백두산의 푸른 정기.....가 생각났습니다. 울창한 큰 나무들 사이에서 나오는 아우라[Aura] 즉 분위기가 사람을 압도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드디어 도착한 묘소의 첫인상은 묘소의 앞 제절(祭砌) [자손들이 늘어서서 절할 수 있도록 산소 앞에 마련된 평평하고 널찍한 부분]이 엄청나게 넓다고 느껴졌습니다.

요즈음의 대도시 초등학교 운동장은 비싼 땅값 때문에 정규축구장규격이 잘 안 나온다고 합니다. 제가 졸업한 초등학교는 개교 100주년이 훨씬 넘은 학교인데 그 당시 기준에 따라서 정규축구장이 나오고도 남는 넉넉한 운동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집 앞마당은 20정도인데 너무 갑갑함을 느낍니다. 정원과 텃밭이 있는 집 앞을 지날 때 마다 부러운 생각을 많이 하였습니다. 제절이 넓어서 마치 대저택 정원과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대산 적멸보궁은 오대산의 주봉인 비로봉의 기슭에 있는데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시야가 탁 트인 명당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산맥들을 병풍으로 둘러싸여 있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랍니다.

이 자리를 보고 조선 영조때 어사 박문수는 스님들이 좋은 기와집에서 일도 안하고 남의 공양만 편히 받아서 먹고 사는 이유를 알겠다.’ 고 감탄했다고 들었습니다. 둘도 없는 명당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대산 적멸보궁에 실제로 가 보고서 제절이 아주 넓음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높은 산중에 넓은 운동장이 넉넉하게 있을 수 있을까?

명당의 여러 조건 중에서 앞 운동장이 잘 생기고 넓고 토질이 바위가 아닌 마사토(磨沙土)로 넉넉한 것도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오늘 제관으로 처음 참배하는 중시조 묘소의 제절이 오대산 적멸보궁에 못지않게 넓다는 것이 마음을 푸근하게 하였습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사진을 여러 장 찍었으나 표현이 잘 안 되었습니다. 드론으로 항공사진을 찍어야만 현장감을 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넓은 제절을 지키기 위하여 후손들이 노력하였고, 조선시대 정부에서도 공문으로 묘소 범위 내(四山)에 입장(入葬)을 금지하고 화전도 금지하였습니다. 이를 어길 경우 벌금이나 귀양을 보낸다고 선언하였습니다.

 

又從以諤寃 山內犯葬 隨卽掘移後 四山禁護等節後 錄立案成給去乎 以此永久遵行者  

[瑞雲山 完文] 

이런 노력 덕분으로 묘소와 제절이 수호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넓은 제절에는 오늘 행사를 주관하는 분들이 나와서 분주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찬택 종친회 부회장, 오늘의 대축(大祝)인 전선집씨도 만나고 임하군파 전영래 회장도 만났습니다.

분주한 준비 끝에 시향을 올리려고 하는데 이슬비가 내렸습니다.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하기 위해 준비한 큰 천막을 세우고 그 속으로 제관들이 들어갔습니다. 기둥이 없어서 사람들이 손으로 위를 받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문중 일에 솔선수범하는 전인재씨를 오랜 만에 만났습니다. 천막에 들어가지 않고 이슬비를 맞고 있었는데 비교적 큰 우산으로 저를 씌워주어서 종친의 따뜻한 마음이 느꼈습니다. 당황하고 어수선하여 말 그대로 야단법석(野壇法席)이 되었습니다. 그 때 전인재씨가 부인과 아들이 함께 올 때 가져온 편의점에 설치하는 파라솔을 대형 천막 중간에 넣어서 천막을 부풀게 하였습니다. 이런 것을 안성마춤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전인재씨의 준비성도 감탄하였고, 늘 종중행사에 모시고 다니던 부친이 올 해 별세하였다는 슬픈 소식도 전해 들었습니다. 올해는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자녀도 데리고 왔습니다. 이런 열성을 가진 종인이 많아야 종친회가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어떤 종인들이 빨리 하늘에 계신 조상님께 모바일전화라도 하여 행사 진행할 동안이라고 비를 그치게 해달라고 해야겠다는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스치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상념에 빠졌습니다.

물 좋고 정자 좋은 장소는 별로 없다고 들었습니다. 물이 좋으면 정자가 나쁜 경우 등 무언가 빠지고 부족함이 있는 대지가 대부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오늘 이 장소는 풍수학에서 이야기하는 물과 산이 부족함 없이 잘 어울려져서 왼쪽에서 묘소를 수호하는 산맥이 8개라서 8청룡이고 오른쪽에서 묘소를 수호하는 산맥이 9개라고 9백호라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좌청룡 우백호 즉 8청룡 9백호의 명당대지이기 때문에 그 위엄(威嚴)이 비를 잠시 그칠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 보았습니다.

명당대지의 위신력(威神力)인지 정말로 비가 그쳤습니다. 천막을 치우고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처음에 제절을 돌아보니 제관들이 다 채우지 못하였습니다. 멀리 경상도에서 버스를 대절하여 오는 종인들이 도착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습니다. 행사의 중반이 진행되었을 때 돌아보니 그 넓은 대지 제관들로 꽉 차 있었습니다. 나중에 집행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점심도시락 500개를 준비하였는데 350개가 배부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중복해서 받아간 사람들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약 300명으로 추계한다고 들었습니다.

모처럼 양복을 입고 왔었는데, 중간 중간 이슬비가 오다가 그쳤다가 하였는데 젖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날씨가 어느 정도 행사 진행하는데 차질이 없을 정도로 도와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찬택집례의 홀기에 따라 謹具請享祀, 行 盥洗禮, 行 降神禮, 行 初獻禮, 行 亞獻禮, 行 終獻禮, 行 侑食禮, 行 辭神禮 순으로 엄숙하게 봉행하였습니다.

초헌관 全鍾得, 아헌관 全夏洙, 종헌관 全炳文, 大祝 全先集, 贊引 全燦均 이었습니다.

 

丁酉 秋享 獻官 諸執事 分定

薦望

姓 名

備 考

初獻官

全 鍾 得

全氏中央宗親會長

亞獻官

全 夏 洙

全氏中央宗親會 代議員會 議長

終獻官

全 炳 文

釜山地區宗親會長

執禮

全 燦 鐸

宗親會副會長

全 先 集

江陵

謁者

全 桂 先

全氏中央宗親會 事務局長

贊引

全 燦 均

江陵地區宗親會長

奉香

全 相 煥

서울

奉爐

全 炯 燮

釜山

奉爵

全 仁 杓

서울

奠爵

全 柳 集

江陵

司樽

全 東 旭

서울

陳設

全 永 錄

旌善

山 神 祭

獻官

최 양 진

정선 남면 문체위원장

全 今 杓

三陟地區宗親會長

執事

全 在 善

江陵

 

 

모든 행사를 마치고 全鍾得 全氏中央宗親會長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중시조께서는 신라 성덕왕때 외교사절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곳은 우리종친들 마음의 고향이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번 기회에 축문과 홀기를 촬영하고 해석하여 공개하고 싶었습니다.

전선집 축관을 만나 축문은 촬영하였으나, 전찬택 집례를 만났으나 홀기 가지고 계신 것 같지 않았습니다. 홀기 촬영 의사를 말씀드리니 도포 자락에서 홀기를 꺼내 보이셨습니다. 나의 예상을 반전시키는 장면이었습니다. 홀기는 촬영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워낙 길기도 하고 비가 조금 내려서 땅이 축축하게 젖어있어서 펼칠 수가 없어서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습니다.


墓 祭 祝

歲次 丁酉 九月庚辰朔 十五日 甲午

後孫 鍾得 全氏中央宗親會長 敢昭告于

皇中始祖考 奉翊大夫 副智密直司事 典法判書 旌善君府君

皇中始祖妣 貞敬夫人 奈城辛氏 之墓

新羅天朝 褒崇積德 封 旌善君

歲序遷易 諱日復臨 感慕益至 粢盛庶品

謹以 酒果脯醯 恭伸 奠獻 尙

 

 

아뢰옵건대 1년이 지나 정유년 915일 시향날이 다시 돌아옴에

후손 종득(전씨중앙종친회장)은 감히 고하나이다.

중시조고 봉익대부 부밀직사사 전법판서 정선군부군

중시조비 정경부인 내성신씨의 묘

신라조정에서 헌신한 공덕으로 정선군을 봉받았습니다.

한 해가 지나서 돌아가신 날이 다시 돌아와서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지극해져서

정갈한 곡식(粢盛)과 여러 가지 물품을 갖추고

술과 과일과 포와 혜를 삼가 정성으로 올리오니 흠향하시옵소서! 

 

행사가 끝나고 전희경 국회의원의 부친인 전창종 부회장님을 만나서 인사드렸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점심 도시락을 배부 받았습니다. 보통은 밥이 한 개, 반찬이 하나 이렇게 두 개로 구성되는데, 하나의 도시락에 밥과 반찬이 있어서 밥과 반찬의 양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선으로 강릉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시향 참가 소회를 이야기하면서 내려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묘소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나누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왕릉이어야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강릉지방에도 강릉김씨 시조인 김주원 명주군왕릉(溟州郡王陵)은 강릉시 성산면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명문성씨들도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묘소는 손꼽을 정도로 희박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대화를 하며, 중시조의 실묘(實墓)가 전해 내려오는 것은 매우 희유한 사례라는데 전부 동의하였습니다.

전찬균 강릉지구종친회장은 강릉지방 유력 풍수연구가들이 전국 유명한 명당을 돌아본 사람들의 감평을 전해 주었습니다. 앞좌석에서 이야기해서 잘 들리지 않아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명한 명당과도 어깨를 나란히 하는 좋은 곳이다.’라는 평을 전해 주었습니다. 어떤 분은 앞으로 대통령이 한 분 더 나올 명당이라는 이야기도 하였답니다.

나의 선친은 휴전선 이남에서 좋은 명당대지중의 하나이다.’라는 말씀을 늘 하였습니다. 그때 들을 때는 조선8대 명당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장군 묘소, 신안동김씨 공조정랑(工曹正郞) 김번(金璠) 묘소, 청주한씨 중시조 한란(韓蘭) 묘소, 대사간 광원군(光原君) 김극뉴(金克忸)<沙溪先生 5代祖><일명 말명당, 天馬登空形局>, 동래정씨 직제학(直提學) 정사(鄭賜) 묘소<일명 鄭墓><玉女側臥形局>, 반남박씨 시조 반남호장(潘南戶長) 박응주(朴應珠) 묘소<일명 벌명당>, (羅峴마을)-광주이씨 시조 이당(李唐) 묘소, 고령신씨 시조 신성용(申成用)묘소

이 있는데 하면서 반신반의(半信半疑)하였습니다.

 

 

 

 어떤 풍수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정선의 429번 지방도로를 따라 낙동리에, 전씨 묘역의 입구 하마비(下馬碑)에 이르니 사방으로 산이 겹겹이 싸여 있어 그 실체를 알기 어려웠다. 단지 마을 앞 낙동교 밑으로 흐르는 큰 개울, 동남천이 호수처럼 보였다. 후손이 마련해 놓은 계단을 따라 묘역에 이르니 이 호수처럼 보이는 강은 등잔의 받침대에 고여 있는 들기름처럼, 주산으로부터 길게 뻗어내려 결인된 꽃가지는 등잔대로 형상화되었다. 바로 괘등혈(掛燈穴)이 아닌가.

본래 괘등혈은 등잔불이 환하게 앞으로 비치도록 형상화되어야 하므로, 안이 없어야 하며 득수 너머에 촛불처럼 보이는 뾰족한 봉우리가 놓여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해는 서산에 걸려 있으므로 나경(羅經)을 꺼내어 좌향을 볼 필요가 없었다. 뾰족한 봉우리로 줄을 탱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간좌(艮座原)였다. 간좌는 서남향이기 때문에 겨울의 살을 에는 북서풍을 등질 수 있어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어 내었다.

득수(得水)까지는 거리가 멀어 발복(發福)이 느리지만 안산이 겹겹이 싸여 지기가 오랫동안 유지되기 마련이다. 혈처의 앞을 에워싸는 조산의 모양으로 보아 많은 인물이 배출되리라.

 

또 다른 풍수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백두대간(白頭大幹)인 대덕산(大德山)에서 건방(乾方)으로 발조(發祖)한 주룡(主龍)이 노목산(櫓木山), 지억산(芝億山)으로 초초 원행(迢迢 遠行)하여 주산(主山)에 도달(到達)하는 중간 중간에 운소봉황(雲宵鳳凰)이 운중(雲中)을 비래(飛來)하는 듯한 용약고룡(聳躍高龍)이 굴곡(屈曲) 기복 활동(起伏 活動)을 활발(活潑)하게 행룡(行龍)하였다.

좌우 지각(左右 枝脚)을 원원 회포(遠遠 廻抱)하고 홀연 대단 과협(忽然 大斷 過峽)을 형성(形成)한 후 좌우 영송 지각 긴밀(後 左右 迎送 枝脚 緊密)후 충천 자기 목성(衝天 紫氣 木星) 등 오길 존성 탁립(五吉 尊星 卓立)하여 존엄 기상(尊嚴 氣象)을 형성(形成)하였다.

사수 단취(沙水 端聚)하여 내외 수구 중중긴긴 관쇄(內外 水口 重重緊緊 關鎖)를 이루었다.

안산 조산(案山 朝山)이 다정(多情)하여 사면봉만(四面峰巒)이 개면 공립(開面 拱立)함이 가히 명당(明堂)으로 손색이 없다.

주산(主山)에서 전후 참치 개장(前後 參差 開帳)한 중출맥(中出脈)은 정선전씨 중시조 묘(旌善全氏 仲始祖 墓)로 입수(入首)되었다.

개장 좌우 양각(開帳 左右 兩脚)은 진출(進出)하는 용맥(龍脈)을 근거리(近距離)에서 다정(多情)하게 협보(挾輔)하였다.

좌청룡(左靑龍)은 안쪽으로 수조(數條)의 지각(枝脚)을 분출(奔出)하여 중중 회포(重重 廻抱)하였고,

우백호(右白虎) 역시 우선(右旋)하면서 혈처(穴處)를 회포(廻抱)하면서 좌청룡(左靑龍)과 상교(相交)하여 수구(水口)를 중중 관쇄(重重 關鎖)하여 내당수(內堂水)가 소수(消水)함을 불허(不許)하고 있다.

입수 도두처 혈성(入首 到頭處 穴星)을 보면 생고 취래세 웅급자(生股 嘴來勢 雄急者)복장형(覆掌形)의 음룡(陰龍)이고 혈처(穴處) 역시 복장고취자(覆掌股嘴者)로 음룡(陰龍)이다.

즉 음래음수(陰來陰受)하여 태음지혈(太陰之穴)을 결지(結地)한 곳이다.

 

또 다른 풍수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해 봅니다.

9마리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국(九龍爭珠)으로 첩첩산중이고, 圍繞 한 산줄기는 萬疊을 이루어져 開面環拱하니, 수구는 重重關鎖 曲曲緊塞하였으니 가히 兵禍不入之地 이다.

높이 솟은 봉우리는 웅장하고 화려하다. 佳穴大地이요, 어찌 예사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靑龍如意珠를 물고 등천할까! 서로 다투고 있는 것이 장관이다. 당대에 크게 발복하여 9대에 걸쳐 장상(재상)이 연출하고, 부마도 당연히 나온다.

 

정선전씨대동보의 기록도 인용해 보겠습니다.

공이 일찍 석문을 통해 나아가 높은 곳에 올라가 마침 채운(彩雲)이 서남쪽 맥산(麥山)의 양지 바른 산록에서 일어나 덮개처럼 울창하게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게 되었다.

공은 이를 두고 하늘이 나에게 주신 가묘라고 하며 기뻐하며, 묘자리를 정하여 영험함이 후손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자손에게 명을 내려, 제수(祭需)를 갖추고 정성을 다하라고 일렀습니다.

대대로 석문의 안쪽 양지촌에 살게 하고, 이곳을 서운동으로 부르도록 일렀으며, 구름이 일어난 곳을 채운휴장봉(彩雲休杖峰)으로 부르게 하였다

公嘗就采邑由旌善而進登高而望適有彩雲起於西南麥山陰薈蔚如盖公喜曰此天錫我壽藏遂定基墓塋遺命子孫使莫世居于石門內陽地村乃名其山曰瑞雲洞名因之雲起處曰彩雲休杖峰曰鎻雲盖識喜也

 

풍수전문가의 의견은 발복(發福)은 느리지만 지기(地氣)를 오랫동안 유지한다고 하였고, 앞으로 미래시대에 우리나라를 이끌 큰 지도자가 배출되리라는 예언을 하였습니다.

이 예언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지나간 시대의 우리 종중의 인물이 몇 분이 떠올랐습니다.

 

1. 고려시대 전오륜(全五倫)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인용하겠습니다.

[정의]

생몰년 미상. 고려 말의 문신.

[개설]

본관은 정선(旌善). 호는 채미헌(採薇軒). 대제학(大提學) 전분(全賁)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고관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이성계 세력에 의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창업되자,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켜 두문동으로 들어간 인물로서 유명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73(공민왕 22) 과거에 급제하였다. 1391(공양왕 3) 우상시(右常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형조판서(刑曹判書)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392(공양왕 4)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가 조선 태조에 의하여 본향안치(本鄕安置)의 처벌을 받았다. 이때 본향 안치된 인물이 성석린(成石璘이윤굉(李允紘유혜손(柳惠孫안원(安瑗강회중(姜淮中신윤필(申允弼성석용(成石瑢정희(鄭熙)등인데, 이들 중 성석린과 같이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살았던 인물들도 있었다. 뒤에 풀려나서 서운산(瑞雲山, 강원도 정선 소재)에 은거하였다.

두문동 72인 중의 한 사람이며, 뒷날 경상남도 안의(安義)에 소재한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전오륜의 유고(遺稿)와 행적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책이 채미헌실기(採薇軒實記)이다.

 

2. 조선시대 전백록(全百祿)

강희섭씨의 글을 인용합니다.

북방 호걸 전백록(全百祿)을 아십니까?

여기에 지역차별을 딛고 황해도병마절도사까지 올랐던 전백록의 일화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 태조가 서북사람들을 높은 자리에 등용하지 말라고 한 이래 평안도와 함경도에는 500년 동안 벼슬자리에 오른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간혹 과거에 급제해도 현령 정도였고, 무장 중에는 정봉수와 전백록 두 사람이 유일했다. 전백록은 북방 호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위풍당당했고, 청렴결백하고 충직해서 지역적인 차별 속에서도 스스로 빛난 사람이었다. 청렴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어머니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한 여인이 시집 온 지 몇 해 되도록 임신을 못해 고민하고 있던 어느 날,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짜고 있는데 별안간 흰 사슴 한 마리가 울타리 안으로 뛰어 들어와 쓰러졌다.

여인은 틀림없이 무엇엔가 쫓겨 온 것이라 짐작하고, 사슴을 뒤뜰 안에 데려가 물을 먹인 뒤 입고 있던 치마를 덮어 숨겨 두었다. 얼마 안 있어 포수 2명이 헐레벌떡 들어와 사슴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여인은 베틀에 앉은 채로 태연하게 사슴은 온 적도 없거니와 아낙네 홀로 속옷차림으로 일하고 있는 집에 뛰어드는 무례가 어디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포수들은 황급히 사과하고 집을 떠났다. 그들이 멀리 간 것을 확인한 여인은 사슴을 몰래 놓아주었다. 그날 밤 잠을 자는데 꿈에 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 옥동자를 얻으리라고 전했다.

그 후 그토록 기다려마지 않던 아이가 생겼고, 낳고 보니 꿈대로 사내아이였다. 흰 사슴이 주고 간 선물이라며, 아이의 이름을 백록이라 지었다. 그 백록이 자라 현종 임금 시절에 경흥부사가 되었다.

어느 날 백록이 잠을 자는데, 어머니가 몹시 수척한 모습으로 나타나 너무 놀란 나머지 어머니, 어머니부르며 깨어났다. 날이 밝자마자 어머니를 찾아뵈려고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났다. 여러 하인들이 가마를 탄 그의 뒤를 따랐다.

온성 집에 도착한 그는 어머니, 백록이 왔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어머니를 찾았다. 곧 열릴 줄 알았던 대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안에 계신 것을 확인한 백록이 문을 열어달라고 몇 번이나 애원했으나, 어머니는 문을 열지 않았다. 도리어 나는 너 같은 아들을 둔 일이 없다. 에미를 보겠다고 이렇게 바쁜 모내기철에 숱한 하인들을 거느리고 올라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몹쓸 놈 같으니라는 호통만 들었다. 백록은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백성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고, 공직자로서 제 분수를 지키라는 준엄한 가르침이었다. 훌륭한 인물 뒤에는 반드시 훌륭한 어머니가 있다고, 바로 백록의 어머니가 그런 분이다.

우리 온성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훌륭한 분의 이야기를 대대로 전해 들으며 자라왔다.

 

3. 조선시대 계동 전경창(溪東 全慶昌, 15321585) 선생

심후섭씨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근면성실, 안과 밖이 다 부지런하다면 -계동 전경창 선생의 선비 정신

파동에서 용계동으로 나가는 다리인 가창교를 건너기 직전 왼쪽 골짜기로 접어들면 얼마 오르지 않아 양지편에서 무동재(武洞齋)라는 재사를 만날 수 있다. 이 재사는 계동 전경창(溪東 全慶昌, 15321585) 선생을 비롯, 전유성(全由性), 전순손(全順孫), 전익견(全益堅), 전복견(全復堅), 전연(全璉), 전침(全琛), 전응창(全應昌), 전계신(全繼信) 등 옥산전문(玉山全門)의 여러 선현을 모신 재사로서 처음에는 파산재(巴山齋)라 불렀다고 한다.

계동 선생은 판서 백영(伯英)의 후손으로서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재사 당호는 어떻게 무신(武臣)의 느낌을 주는 무동재가 되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함께 모셔진 전연(全璉) 선생이 병조판서 겸 의금부사였고, 전계신(全繼信) 선생 또한 병조판서로서 무신 성격이 더 강해서였을까? 어쨌거나 당초 파산재에서 지금과 같이 무동재로 불리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연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예와 더불어 굳세다, 용맹하다는 뜻을 함께 품고 있으니, 의지가 굳세고 용맹한 분들을 함께 모신 재사라고 해석하면 어떨지 모르겠다.

손처눌(孫處訥) 선생이 찬()한 계동 선생의 행장(行狀)에 따르면 선생이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자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과 약포 정탁(藥鋪 鄭琢), 판서 윤국형(尹國馨)과 판서 권협실(權鋏實) 등이 상여를 호송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다음 해 2월 대구부 수성현 파잠리(巴岑里) 무동(茂洞) 등성에 장사지내니 선영을 따른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무동재는 무동(茂洞)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용계천 동쪽에 산다 하여 계동(溪東)이라는 호를 얻은 선생은 대구 지방의 많은 선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성리학자였다. 향토사학자 구본욱 님은 당시 계동 선생과 교류한 여러 선비들의 문집 등에서 선생의 당시 위상을 밝혀낸 바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계동 선생은 채응린(蔡應麟), 정사철(鄭師哲)과 더불어 조선 중기 대구 지역 성리학의 선구자로서 노력하였다. 특히 계동 선생은 퇴계 문인으로서 손처눌, 이주, 곽재겸, 류요신 등을 문하로 하여 성리학을 전수하는 한편, 채응린을 통해서는 서사원에게, 정사철을 통해서는 그의 아들 정광천에게 성리학을 전하게 하여, 대구 성리학의 중심인물로서의 그 기능을 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동 선생은 학문의 나눔을 실천하였다. 서사원에게는 심경(心經)’, 곽재겸에게는 근사록(近思錄)’을 주면서 학문의 이유는 과거(科擧)에 있는 것이 아니고 존심양성(存心養成)에 있다고 하여 먼저 인격 수양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원리에 충실한 것이다.

그리고 만나는 선비마다 먼저 소학(小學)’을 읽을 것을 권하였다라든지 역학도설(易學圖說)과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얻어 손수 베껴 쓰고, 그 이치를 찾아 사색하는 즐거움을 누렸다라는 구절로 보면 선생은 서로 나누는 삶의 일부로 학문에 임했음을 또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선생은 부지런하면서도 모든 일에 성실하였다. ‘의관을 엄정히 하는 것은 바깥 닦음을 말하고 행실을 순결히 하는 것은 안 닦음을 말하니 안과 밖이 함께 닦이면 누가 귀하게 여기지 않겠는가?’라는 글을 벽에 걸어두고 이를 지키며 평생 근근성실(勤謹誠實)을 실천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또한 계동 선생은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그 우의를 아주 돈독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정사철은 계동 선생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자신과 계동 선생간의 관계를 백아절현(伯牙絶絃)으로 표현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타고난 성품 또한 강직하면서도 단호하였다. 어려서 부친을 잃은 선생은 백부에게 나아가 글공부를 하였는데, 백부가 누명을 쓰고 관가로 끌려가자 옥리(獄吏)와 맞서 그 억울함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굳건한 심조(心操)로 학문을 선구적으로 열고 이를 후학에게 전하였다.

계동 선생의 선비 정신은 더욱 새로이 조명되어야 한다.

 

4. 일제강점기 민족 문화 유산의 수문장,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상징 전형필(全鎣弼)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인용하겠습니다.

정의

19061962. 문화재 수집가.

개설

본관은 정선(旌善).

자는 천뢰(天賚), 호는 간송(澗松지산(芝山취설재(翠雪齋옥정연재(玉井硏齋).

서울 출생. 중군(中軍, 西班, 3) 계훈(啓勳)의 증손으로, 내부주사(內部主事) 및 참서관(參書官)을 지낸 명기(命基)의 아들이다.

증조 때부터 배우개(지금의 종로4) 중심의 종로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10만 석 부호가의 상속권자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휘문고등보통학교(徽文高等普通學校)를 거쳐 일본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에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말살되어 가는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하여 우리 민족 문화 전통을 단절시키지 말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 문화의 결정체인 미술품이 인멸되지 않게 한 곳에 모아 보호하여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오세창(吳世昌)을 따라다니며 민족 문화재 수집 보호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물려받은 막대한 재력과 오세창의 탁월한 감식안 그리고 이런 문화적 민족 운동에 공명하는 많은 지식인들의 후원으로 이러한 소망은 순조롭게 이루어져 갔다.

그래서 장차 우리 미술사 연구의 요람을 건설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당시에는 한적한 교외이던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고(1934), 1938년 일제의 강력한 물자 통제령에도 불구하고 북단장 내에 보화각(葆華閣)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박물관을 설립하였다.

그 사이에 그는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서화에 일가를 이룬 오세창의 측근 문사들과 교유를 가졌다. 권동진(權東鎭민형식(閔衡植고희동(高羲東지운영(池雲英) 등의 전배(前輩)들과 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이마동(李馬銅김영랑(金永郎) 등의 동년배들이 그들이다. 이들과의 교유 속에서 그의 탁월한 예술 감각은 자신의 서화 자체를 가경(佳境)에 이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감식안을 청람(靑覽)의 경지로 향상시켜 놓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자신의 능력을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10만 석 가산을 탕진한다는 비방을 들을 정도로 오직 문화재 수집에만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우리 미술사에서 서성(書聖화성(畫聖)으로 높이 추앙할 수 있는 김정희(金正喜)와 정선(鄭敾)의 작품이 집중적으로 수집되어 그에 대한 올바른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심사정(沈師正김홍도(金弘道장승업(張承業) 등 조선시대 전반에 걸친 화적은 물론, 서예 작품까지 총망라하였고, 고려 및 조선 자기와 불상·불구·와전 등에 이르는 문화재들을 방대하게 수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우리 미술사 연구를 위한 인접 자료인 중국 역대 미술품을 수집하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문헌 자료의 구비를 위하여 1940년부터는 관훈동 소재 한남서림(翰南書林)을 후원, 경영하면서 문화사 연구에 필요한 전적을 수집하여 한적(漢籍)으로 1만 권의 장서를 이루어놓았다.

그리고 당시 국내외에서 발간되는 문화사 관계 서적들도 가능한 한 수집하여 장차 연구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인재 양성이 또 하나의 절실한 문제임을 통감하고 19406월 재단법인 동성학원(東成學園)을 설립하여 재정난에 허덕이는 보성고등보통학교(普成高等普通學校)를 인수하여 육영 사업에 착수하였다.

광복 후에는 잠시 보성중학교장직을 역임하기도 하고(1945.10.1646.10.), 문화재보존위원회 제1분과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으나(1954), 항상 공직에 나가는 것을 피하고 시은(市隱)을 자처하였다.

1960년 김상기(金庠基김원룡(金元龍진홍섭(秦弘燮최순우(崔淳雨황수영(黃壽永) 등과 같이 고고미술동인회(考古美術同人會)를 발기하여 운영의 핵심을 담당하면서 1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1월에 죽자, 그해 815일 대한민국문화포장이 추서되고, 1964년 대한민국문화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그 뒤 그의 자제와 동학들이 북단장에 한국민족미술연구소(韓國民族美術硏究所)를 설립하고 그가 마련해 놓은 연구 자료를 토대로 미술사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해 감으로써 그 유지를 계승하고 있다. 보화각은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으로 개칭되어 연구소에 부속되어 있다.


아직까지 중시조묘소 시향을 참석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꼭 참석하여 정성껏 참배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중간에 이슬비가 내려 약간의 문제점이 있었지만, 300여명의 후손들이 여법하게 시향에 참석하였습니다.

중시조의 업적을 들을 기회가 있어서 후손으로서 존경심과 뿌듯함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묘소의 장엄함도 깊은 인상으로 남는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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