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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호암(湖巖)이병철(1910~1987)
작성자 관리자 [2020-02-26 05: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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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湖巖)이병철(1910~1987)

 

이병철이 누구냐고 말한다면 그는 그 유명한 삼성그룹의 창업주이다.

또 이병철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타고남 장사꾼이며 한국경제에 정주영과 함께 6.25의 폐허 속에서 한국 경제를 일으켜 온 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늘의 반도체가 세계제일의 이름으로 남긴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오늘의 최고 그룹으로 해왔나를 알아본다.

 

이병철 그에게 무엇을 구할 것인가?

이병철은 한국 근대화 이후 최고의 경영인으로 꼽힌다. 그는 1938년 삼성상회를 설립한 이후 1987년까지 48년간 삼성그룹을 경영하며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놓았다. 오늘날 한국은 메모리 반도체와 휴대폰으로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구 두 가지 주력 수출 상품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도 단연 삼성이다.

근래 삼성의 활약이 눈부시지만, 뜻밖에도 한국에서는 기업가 이병철에 대한 논의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이병철에 관한 책을 꼽아보면 본인이 쓴 자서전호암저전과 그의 사후 삼성그룹에서 발표한 호암어록호암 경영철학등을 합해서 채 다섯 권이 넘지 않는다.

 

일본에의 마쓰시다 고노스케에 대해서 출간된 책은 모두 398종에 이른다고 한다. 고노스케 자신이 쓴 책 몇 권을 빼고는 대부분 경제학자, 작가, 저널리스트 등이 쓴 책들이라고 한다. 혼다의 쇼이치로의 경우도 무려 168권이나 나와 있다고 한다.

이것은 앞으로 한국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생각해볼 문제다.

 

오늘날 한국의 주요 수출품은 반도체, 휴대폰, LCD, 가전, 조선, 자동차, 철강들이다. 즉 상인과 공업기술자들이 한국의 경제의 막대한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에겐 아직 한국 경영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못했다. 세계10대 교역국에 들어가는 나라치곤 좀 의외의 현상이다.

다각도로 한국형 경영의 실체를 분석하고. 장점을 승화시켜 미래경영에 접목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삼성의 경영 매뉴얼을 정착시킨 사람은 창업주 이병철이다.

그의 경영의 출발점은 유교경영이며, 이어 일본으로부터 기술과 경영을 배웠고 그것을 글로벌화해 나갔다. 이병철은 체계적이고 선단화 되어 있던 일본식 경영을 배우면서도 한편으론 비판하고 극복해나간 특이한 경우이다. 이병철의 경영 48년은 혼자서 일본식 경영을 극복하기 위한 고군분투의 세월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병철의 어린시절

 

그의 고향은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아버지 이찬우(1874~1957)씨와 어머니 안동 권씨(1872~1941)에게서 4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이병철 씨가 태어난 해는 1910년으로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합병당한 바로 그해이다. 이병철 씨에게는 형 이병각(1905~)과 두 누이 병점과 분시가 있었다.

이병철의 집안을 대대로 중교리의 대지주라고 했다. 풍년에는 2,000, 흉년이 들어도 1,500석정도하는 부자였다.

이병철 씨는 5년 동안 자연스럽게 서당에서 천자문, 서서삼경, 통감, 논어 등을 배웠다.

이병철 씨는 열 살까지 이 마을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진주시 지수면에 있는 지수보통학교를 다녔다.

1927년 그의 나이 열일곱 살 때 결혼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중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일본으로 유학 갈 결심을 한다.

19304월 이병철 씨는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그의 나이 스물한 살이었다.

이병철이 와세다 대학을 중퇴한 이유에 대해서 본인은 각기병 때문이라고 술회했으나 그의 형은 이렇게 회고했다고 한다. 와세다 대학시절 이병철은 상당히 공부를 잘했던 학생이었던 갔다. 본인의 얘기로 대학 2학년쯤 되니 여러 과목에서도 영어, 수학, 일본어가 제일 중요한데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학은 다른 아이들이 도저히 따라오지 못했다고 하며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하여 그만 두었다고 한다.

 

사업을 시작하다.

마산에서 사업 아이템을 찾던 이병철은 마산시의 도정 능력이 현저하게 모자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정미소들의 규모가 상당히 컸으나 한국인의 것은 형편없었다. 하주들은 도정을 선불하고도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는 것이 다반사였고, 정미소의 공터에는 어느 곳이나 도정을 기다리는 볏 가마가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1936년 봄, 이병철은 세 사람이 정미소를 갖추 후 협동정미소라는 간판을 달게 되었다.

도정업은 언뜻 보면 단순해 보이는 사업이다. 벼를 사다가 그 껍질을 볏겨 쌀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사업을 해보니 뜻밖에 첫1년 동안 자본금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2만원이 잠식되었다. 모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원인을 분석해보니 쌀값이 비쌀 때 쌀을 사다가 도정을 해서 쌀값이 떨어졌을 때 내다 팔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도정에서 나오는 이익보다는 쌀값이 비쌀 때 샀다가 쌀값이 싸진 후에 내다 팔았기 때문에 손해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그는 인천 미곡거래소의 쌀값 변동 상황을 소문으로 듣고 사고 팔 때를 결정하고 있었다. 마치 요즘 주식투자처럼 그는 늘 소문을 듣고 상투만 잡았기 때문에 손해가 발생한 것이다. 일단 그는 이러한 결론이 나오자 그는 소문과 정 반대로 움직여야만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쌀값이 비쌀 때 다른 사람들은 더 오를 거라는 기대심리로 쌀을 사들였으나 그는 오히려 내다 팔았고, 쌀값이 내려갈 때 다른 사람들은 더 내려갈지도 모르니까 내다 팔았으나 그는 오히려 그때 사버린 것이다. 그의 작전은 맞아 떨어졌다. 그 이듬해 결산에서는 3만원의 출자금을 빼고도 2만원의 이익이 발생했다. 첫 사업치고는 성공적이었다.

이병철은 경영자로서 쌀의 흐름만 파악한 것이 아니었다. 50여 명의 직원이 무질서하게 일하는 것을 보고 구체적인 업무분담도 지시 했다. 어떤 이에게는 무게만 달게 하고, 또 다른 이에게는 전표업무만 전담하게 하고, 어떤 이는 포장만 하도록 하는 분업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른바 자신이 맡은 바 직무에서 스스로 책임지게 하는 사업 부제를 이때 이미 도입한 것이다. 이러한 사업부제는 훗날 삼성의 경영시스템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이 병 철경영 note

1930년대부터 이미 도입된 삼성의 사업부제 4원칙

 

 

첫째, 일을 적당히 구분하여 담당을 정한다.

둘째, 업무를 분명히 맡겨서 수행해나가도록 한다.

셋째, 결과에 대해 공정하게 평가 한다.

넷째, 사업 전체가 적정이익을 내고 잘 운영되도록 한다.

 

정미소가 잘 돌아가면서 이익이 나자 이병철은 새로운 사업에 착수 한다. 마산에 운송수단 즉 트럭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트럭 운임이 비싸니 트럭을 몇 대 사서 쌀을 운송하는 운송회사를 하나 차리고 싶었다. 이병철은 트럭 10대를 가지고 있던 일본인 소유의 마산 일출 자동차 회사를 구입하고 거기에 10대를 더 보태어 도합20대로 운수회사를 새로 창업했다.

이병철은 이 두 가지 사업을 지배인인 진영주 에게 맡기고 자신은 핵심적인 결정만 내리면 되었다. 시간이 남아도는 것은 당연했고 돈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들어왔다.

 

 

200만평의 대지주

사업이 잘 되어 돈이 넘쳐나자 이병철은 새 사업에 착수한다. 이른바 땅 투기로서 토지를 구입하기로 정한 것이다. 1930년 후반 이었다.

당시에는 논 한 평이 25전으로 한마지기 200평이 50원 하던 때였다.

논 한마지기를 소작 주면 소작료로 한해 벼 한섭 값인 15원이 들어온다. 당시 은행금리는 연 7%, 50원을 빌리면 이자가 1년에 350전이었다. 숫자에 밝았던 이병철은 곰곰이 따져보았다. 논 한마지기를 50원에 사서 농사를 지으면 15원의 소작료가 들어온다. 15원에서 은행이자 350전을 빼고 세금 1원과 관리비 50전을 빼도 10원의 이익이 나온다. 한마지기 당 가만히 앉아서 10원의 이익이 남으니 땅 집고 헤엄치기 였다. 전답에서 나오는 소출에 비해 은행이자가 오히려 더 쌌으므로 은행융자로 땅을 살 수 있기만 하면 가만히 앉아서 떼돈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인 것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수지 계산서를 첨부하여 식산은행 마산지점에 융자를 신청했다. 지점장과는 이미 신용을 쌓고 있었으므로 융자는 순조로웠다. 40만평의 전답을 담보로 융자 받아 땅을 쌌다. 이어 그는 김해 인근에 있는 농토를 모조리 구입하기 시작해 1년 만에 연수 1만석, 200만 평의 대지주가 되었다.

이병철은 약관 20대에 경남 일대에서는 최대의 대 지주가 된 것이다.

 

세 번 흥한 자 ,세 번 망한다.

 

13973,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다.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모든 것이 전시체제로 바뀌었기 때문에 일본정부는 은행의 대출을 중단하고 그간 빌려준 돈을 모두 회수한다는 비상초치를 취했다. 일본의 비상초치가 있자마자 시장경제는 곧바로 얼어붙었고 전답의 시세는 폭락했다. 은행대출을 받아 토지에 투기 했던 이병철은 그간 은행에서 빌려온 돈을 모두 토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때의 일은 그는 청천벽력, 즉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라고 표현했다. 전쟁이나 정변 앞에서 기업인은 무능하다. 이병철은 자신의 능력으로 그 사태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간 사두었던 전답을 값이 더 떨어지기 전애 서둘러 처분했다. 모두 시가 보다 싼 가격이었다. 비싸게 땅을 샀다가 산 값보다 더 싸게 파는 결과가 되니 돈이 부족했다. 하는 수 없이 잘 되었던 정미소와 운수회사도 모두 팔아 은행돈을 갚았다. 그에게 남은 것은 현금 2만원과 전답 10만평뿐이었다. 그나마 남은 것이 다행이지만, 하루아침에 몰락한 셈이 된 것이다.

“3가 있으면 3가 있다”. 이병철의 회고다. 세 가지 좋은 일이 생기면, 세 가지 나쁜일도 생긴다는 뜻이다.

이병철은 다시 술회한다.

교만한 자 치고 망하지 않은 자 없다.’

남의 돈으로 200만평의 대지주가 되었고, 그 소득을 밑천으로 더 큰 돈을 벌어보려다가 망했다는 자책이다. 이병철은 그때의 경험을 상당히 분석적으로 써놓았다. 그 당시의 상황을 통해 이병철이 얻은 교훈은 이렇다.

 

이 병 철경영 note

사업 실패 이후 스스로 내린 결론

 

 

1. 사업은 국내의 정세를 정확히 통찰해야 한다.

2.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3. 요행을 바라는 투기는 무슨 일이든 피해야 한다.

4. 직관적인 연마를 중시하는 한편 제2, 3의 대비책을 강구해야 한다.

5. 대세가 기울어 이미 실패라고 판단되면 미련을 깨끗이 청산하고 차선의 길을 택해야 한다.

 

이병철은 생애에 첫 비게임에서 크게 실패했다. 하지만 낙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실패의 쓰라린 경험을 분석하고 반추하면서 앞으로의 사업에 보탬이 되도록 했다. 1975917일 전경련에서 있었던 최고 경영자와의 대화에서 그는 실패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뜻하지 않던 좌절을 겪어본 기업가는 좌절을 모르고 자란 기업가보다 훨씬 강인한 기업능력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떫은 감도 정성스레 잘만 말리면 단감이 된다. 그러나 급히 서두르거나 정성을 들이지 않으면 감은 달아 지지 않는다. 이렇게 떫은 감을 달게 만드는 데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업가에게는 항상 지난날에 겪은 일들을 돌이켜보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런 마음가짐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경험을 쌓는다 하더라도 살이 되고 피가 되지 않는 것이다.

 

이때 이병철이 얻은 교훈은 훗날 그가 사업을 크게 전개했을 때의 밑거름이 된다. 수십억 달러의 돈을 투자해야 하는 반도체사업을 시작할 때 그는 국내외의 상황을 아주 치밀하고 꼼꼼하게 읽은 후 사업투자를 결심했다. 거기에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는 반도체시대가 될 것이라는 직관도 작용했다.

대세가 이미 기울어 실패라고 판단이 서면 물러난 경험도 있다. 5.16혁명으로 인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일본의 오쿠라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한 적도 있고, 한국비료사건 때는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깨끗이 물러났다.

그 후 이병철은 신규 사업은 무모한 과욕에서 비롯된 것이 거의 없다.

1970년대 초 전화교환대 사업에 진출하고 싶었으나 전문가인 부하 간부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자 깨끗하게 포기하기도 했다.

오늘날 삼성그룹의 사업 중에도 투기성 사업에 진출한 것도 여간해선 찾아볼 수 없다. 말하자면 이때의 교훈이 평생 그를 와신상담하게 만들었다고 보여 진다.

 

 

삼성이란 이름으로

 

못 미더운 사람은 쓰지 말어라. . 일단 쓰려고 결정했거든 모든 것을 믿고 맡겨라

 

자고로 성공에는 세 가지 요체가 있다. (), (), ()이 그것이다. 사람은 능력하나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다. 운을 잘 타야 하는 법이다. 때를 잘 만나야 한다. 그러나 운을 잘 타고 나가려면 역시 운이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일종의 둔한 맛이 있어야 한다. 운이 트일 때까지 버티어 내는 끈기와 근성이 있어야 한다.”

 

1938년 이병철은 사업을 하기 전 많은 시장조사를 하기위하여 여행을 많이 다녔다. 신의주 원산 흥남 등 국내의 도시와 중국의 대도시를 다녔다. 그가 본 만주 시장의 규모는 엄청나게 컸다. 조선의 시장에서는 고작 몇 천원 혹은 몇 만원단위의 거래가 이루어지고 잇는데 비해 그곳에서는 수십 수백만 원이 왔다 갔다 했다. 조선의 시장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이런 과감한 용기와 치밀한 사전조사는 오늘날에도 삼성그룹의 중요한 무형 자산이다. 훗날 이병철이 반도체에 뛰어들 때에도 그는 철저한 사전조사를 통해 결심에 이른다.

마침내 삼성상회를 설립하고 이병철은 무역회사를 세운다. 자본금 3만 원, 상호는 삼성상회이다. 바로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체이다. 이병철이 회사 이름을 삼성으로 지은 것은 숫자 3이 크고, 많고, 강한 것을 상징한다는 점이다. 한국인들이 숫자 3을 좋아하는 이유는 쓰러지지 않는 숫자로 인식된다는 것, 즉 화로나 삼발이가 달려 있는 모든 기구나 기구들은 쓰러지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대기업도 3을 선호한다. 일본의 미쓰비시그룹을 한문으로 쓰면 삼릉(三菱)이다. 미쓰비시 재벌과 쌍벽을 이루고 있는 미쯔이그룹도 한문으로는 상정(三井)이라고 쓴다.

 

삼성상회의 새 사업은 무역과 국수 판매였다. 무역이란 대구 근처의 농촌에서 사과 등의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을 수집해서 만주와 북경등지에 내다 파는 일이었고, 국수는 제분기와 제면기를 가져다놓고 직접만들어서 솜매상들에게 팔았다.

 

성공을 위한 잠시의 칩거

 

1941127일 중일전쟁은 sakclaso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된다. 일본 해군 소속의 가미가제 특공대는 미국 하와이와 진주만을 폭격했다.

이병철은 낙향을 결심한다. 머지않아 식량난이 닥쳐올 것이라는 판단과 식량난에 대비하여 대구 북쪽에 있는 왜관 근처의 신동이라는 곳이 1만평 남짓한 과수원을 사두었다. 삼성상회의 양조장은 지배인에게 맡기고 1942년 봄 그는 고향 중교리로 돌아온다.

 

장사에도 우선은 사람이다

 

사람을 썼으면 실수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무조건 맡긴다.”

 

 

 

이 병 철경영 note

상도의(商道義) 초대 삼성물산의 경영방침

 

첫째, 일정한 자본금의 규모를 정하지 않고 사원이면 누구나 응분의 투자를 하고 이익배당을 투자액에 비례해서 공평하게 받을 수 있는 제도를 채택한다.

둘째, 사장이건 평사원이건 간에 공존공영의 정신으로 일에 몰두하는 것은 능력ㅇ에 대한 대우와 신상필벌의 기풍을 마련한다.

셋째, 사원의 생활안정을 고무하기 위하여 운영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우대하여 가족적 분위기가 항상 유지되도록 한다.

 

당시 이병철이 사원들에게 20%만큼 출자를 하도록 한 것은 출자자들에게 회시의 이익이 곧 자기의 이익이 된다는 것이므로 서로 분배해서 회사를 키울 수 있도록 유도하고자 함이다. 사원이면 누구나 응분의 투자를 하고 이익배당을 받게 되며 지분이 있으므로 모두 내 회사라는 기분으로 열심히 일하게끔 만드는 분위기로 나갔던 것이다. 요즘은 사원들이 회사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일이 비일비재하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병철은 서울사업에 바빠 대구의 조선양조와 삼성상회의 경영에는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몇 년간 버려두다시피 한 양조장과 과수원 등을 이창업이 경영하면서 무려 3억 원의 이익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창업은 3억 원이 담긴 궤짝을 이병철에게 내밀었다. 생각지도 못한 거액 3억 원을 받아 그 3억 원으로 다시 새로운 사업에 나선다.

사람을 썼으면 실수가 드러나기 전까지는 무조건 믿고 맡긴다. 라는 경영 철학의 가장 큰 덕을 본 것이다.

 

6.25전쟁 후 처음 시작한 사업은 고철 수집이었다. 고철을 수집해서 일본에 파는 것인데, 때마침 전쟁 중이어서 고철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포탄 탄피에서부터 망가진 군용차량과 그 부속품들, 폭격 맞은 공장기계 등 고철 수집은 의외로 쉬워 수집상들이 가져오는 고철을 일본에 수출했다.

 

 

의심스러우면 시작하지 마라

 

어떤 사업이든 위험은 있다. 그러나 위험하다고 느낄때는 무언가 문제점이 내제해있는 것이다. 그것을 제거하고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어떤 사업이건 처음부터 실패의 여지가 있다는 불안을 안고 착수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100%의 자신감이 없으면 애초부터 착수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속에 불안을 품은채 착수하면 주저하여 전력투구를 못하게 된다. 배수진을 치고 백척간두에서 단호히 결행해도 예기치 못한 장애에 부딪히거늘, 하물며 출발부터 의심하고 망설이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신목여전(神目如電)의 기업가

 

그는 설탕이나 비료를 수입해서 이익을 붙여 되파는 자신이 과연 사업가인가 자문했다. 사업가란 국민이 원하는 물자를 생산해서 판매하는 사람이지 물건을 수입해서 단지 이익만 붙여서 파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용을 창출하고 국가에도 이익이 되는 그런 사업은 없을까?

이병철은 비로소 사업다운 사업, 즉 제조업에 관심을 갖게 된다. 이병철은 조사에 나서기 시작한다. 사전조사와 타당성 검토는 이병철의 주특기이자 또한 오늘날 삼성그룹의 장점이기도 하다.

신목여전(神目如電)사업에 대한 귀신같은 안목이 마치 번갯불과 같다.” 어느 명리학의 대가가 이병철을 그렇게 평했다. 정보 분석과 평가에 관해서는 대한민국에서 이병철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이병철은 어떤 물건을 생산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사전조사에 들어갔다. 그 결과 설탕, 페니실린, 종이 등 세 가지로 생산품목이 압축되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 전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국가 중 하나였다.

그는 세 가지 물품 중 하나를 국내에서 생산하기로 결심하고 일본의 미쓰무역에 설탕, 페니실린, 종이를 생산하기 위한 공장건설 비용과 설비 비용을 산출해달라고 요청했다. 3개월 후 제당 건설에 필요한 마스터플랜이 도착했다. 이어 페니실린 생산계획서와 제지공장 건설계획서가 도착했다. 세 종류 중 페니실린이 가장 유망해 보이는 사업이었으나 생산에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기가 만만치 않았고 종이 역시 그러했다. 결국 이병철은 설탕을 택했다. 설탕수요는 나날이 늘고 있었으나 만드는 공장은 한 군데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설탕은 종이와 페니실린보다는 단기간에 생산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이 또한 1005 수입되다 보니 국내 가격이 구제가보다 무려 3배나 비쌌다.

 

한국인이 만든 설탕

 

19534월 부산 대교 로에 있는 삼성물산 사무실엔 제당회사 설립을 위한 설립 사무소가 설치되었고 그로부터 두 달 후인 6월에는 발기인 총회가 열다. 휴전협정이 성립되기 불과 한 달 전의 일이다. 자본금 2,000만 환이었고 주주는 친구였던 여상원 외에 구영회(LG그룹의 창업주 구인회 동생), 허정구(LG그룹의 공동창업주) 김생기(훗날 영진약품 창업주) 등이었다. 회사명을 제당공업주식회사정했다.

1953년 첫해에 하루 6.3톤씩 생산되던 설탕은 6개월 후에는 50톤으로 늘어났고, 1956년에는 하루 150(연간 5만 톤), 1957년에는 하루 200(연간 7만 톤)으로 시설이 늘어났다. 매출도 설탕이 생산된 첫해엔 72,200만 환이던 것이 1958년에는 그 여덟 배인 56억 환으로 엄청나게 늘었다. 그에 따라 순이익도 크게 발생하여 1954년도의 순이익은 16,200만 환을 기록했다.

 

상도의(商道義)

 

설탕은 수요가 날로 늘어나고 품질도 더욱 좋아지면서 제일제당의 설탕은 외제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제일제당의 설탕 값은 여전히 외제의 비해 절반도 되지 않았다. 어ㄴ 날 중역회의 석상에서 임원들이 이병철에게 설탕 값을 올리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저희들이 검토한 결과로는 현재 가격에서 50환정도 더 인상해도 판매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현재의 근당 이익을 10환에서 60환으로 끌어올린다면 연간 회사 순익은 엄청나게 늘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병철은 중역들의 제안에 이렇게 대답했다.

근당 이익이 10환에서 60환이 되면 여섯 배라는 이야긴데, 우리는 한해 80억 환의 순이익을 내고 있으니 그 여섯 배면 480억 환이 됩니다. 대체 그렇게 많은 돈을 벌어서 어쩌자는 rudy".

이병철의 말은 정말 뜻밖이었다. 칭찬을 들을 줄 알았던 중역들은 이병철의 반론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역들이 눈치만 살피고 있자 이병철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장사에도 도의가 있는 법이오 상도의(商道義) 상으로도 그런 폭리를 취하면 안 되거니와, 내가 제일제당을 설립해 설탕을 생산한 것은 그 동안 삼성물산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제조업에 투자하여 국민경제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하겠다는 것이었소. 나는 독과점 업자가 되어 사리사욕만을 채울 생각이 추호도 없으니 설탕 값 올리자는 의견은 없었던 걸로 합시다.” 이병철의 이야기에 중역들은 숙연해졌다.

 

이병철은 사업초기에도 상도를 내세워 소비자의 신뢰를 얻는 데 주력했다.

봉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업을 하면 번영하고 이득만을 목적으로 사업을 하면 망한다.“

훗날 제일제당의 설탕 생산량은 세계1위가 된다. 하루 1,200톤의 설탕을 생산하여 일본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일본제당의 일일 생산량인 1,100톤을 웃돌 정도였다.

제당에서 제분으로

 

195710월 이병철은 제일제당 공장 내에 제분공장을 또 세웠다. 제일제당의 경우 설비 자체가 일제였으나 제일제분은 공장 설립을 모두 국산으로 갖추었다. 제분공장 설립은 불과 6개월 만에 완공되어 19585월에는 그 첫 제품이 시장에 출하된다. 제당에 이어 제분, 섬유로 나아가는 본격적인 출발이다.

 

메모광

 

알려진 대로 이병철은 메모광이다. 그는 살아생전에 어떤 사업을 하든지 떠오른 구상이나 전문가의 조언, 해야 할 일 등을 언제나 메모로 정리했다. 그 메모 습관이 시작된 것은 바로 제일모직 건설 때부터였다.

삼성경제연구소장의 최우석 소장은 이병철의 메모를 이렇게 증언했다.

선대 회장의 메모 수첩에는 그날 챙겨야 할 일, 미결 과제, 알아보아야 할 일, 재확인해야 할 일, 만날 사람과의 약속, 점심식사를 같이 할 사람, 전화해야 할 곳, 방문 할 곳, 구입힐 물건, 상을 줄 사람, 벌을 줄 사람, 구입할 책의 제목,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본 자료요약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병철은 그러한 메모를 토대로 삼성 본관 28층 집무실에 출근하면 준비된 메모를 펴놓고 그날의 일과를 진행해 나갔다.

 

 

이 병 철경영 note

사업성 검토의 네 가지 기본 축

 

 

1. 사업성 검토 지침

2. 환경 분석

3. 자금 소요 규모 및 조달

4. 시너지 효과

 

첫 번째는 사업의 내용 검토를 보면 새로 벌이는 사업이 삼성의 경영 이념과 합치하고 있는가, 기업의 목적과도 부합하고 있는가의 여부와 기존제품보다 품질향상의 효과가 있는가, 도 제품이 생산되고 난 후 가격인하 효과가 있을 수 있는가, 국민경제에는 기여할 수 있는가 등의 소 항목으로 구분되어 점검된다.

 

두 번째는 환경 분석이다. 여기에는 과거 10년 전부터 향후 10년에 걸친 국내외 수급실적 및 전망 등이 집중 검토된다.

 

세 번째는 투자에 따른 자금 소요 규모 및 그의 조달이다. 말하자면 설비구매는 최적의 염가로 할 수 잇는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용수의 공급이나 전력의 조달, 항만이나 거점 도시로부터 소용시간 등 입지조건이 검토된다.

 

네 번째는 시너지 효과의 문제인데, 기존에 추진 중인 사업과 수평 수직적인 결함성을 고려해서 생산, 기술, 판매, 조직, 인력, 활용 면에서의 시너지 효과가 있는가가 검토된다.

 

이 병 철경영 note

신규사업 결단 시 고려사항

 

1. 스스로 예상되는 문제에 대해서 원인을 분석하고, 향후 경쟁관계에 대해 세밀히 검토한다.

2. 사원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대로 따른다.

여러 사람의 의견과 지혜를 모아 가장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을 썼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도 모르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3. 100% 자신이 없으면 애초부터 착수하지 말아야 한다.

 

 

경청하는 기업가

 

이병철은 구체적인 계획에 착수하기 전 자료를 수집하여 읽고 분석하는 것은 그의 장기이다. 자료에 대한 검토가 끝나면 이어 전문가들을 만나 의견을 듣는데, 이병철이 삼성그룹의 경영진들에게 수도 없이 강조한 말이지만 그의 장기 중 하나가 경청이다. 경청, 즉 남의 말을 진지하게 귀담아듣는 것, 이병철은 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이 병 철경영 note

도쿄구상의 단계

 

 

1단계

우선 일본의 여려 방송매체들이 기획한 프로그램, 특히 지난 한 해의 경제동향에 대한 총결산과 전망에 대해 일본의 저명한 석학이나 저널리스트들이 출연한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고 본다.

 

2단계

그런 다음 일본 업계의 정통하고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경제담당 기자들을 점심이나 저녁식사에 초대하여 이야기를 나눈다.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따로 만나 지난해에 실적이 우수했던 업종이 무엇이며 신년도의 전망은 어떠한지를 캐묻는다. 또 업적 신장의 요인이 무엇인지도 묻는다. 기자들은 표면에 나타난 숫자나 이야기뿐만 아니라 실제의 내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어 그 원인을 잘 설명한다.

 

3단계

기자들을 통해 일본경제의 흐름을 파악한 다음에는 흥미 있는 분야를 골라 주로 대학교수 등 저명한 학자들을 만나 의견을 듣는다. 이병철이 만나는 학자들은 이론에만 밝은 게 아니라 재계 동향에 대해서도 꿰뚫고 있다.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지남해의 우수업종과 신년도에 대한 예상을 묻는다. 이재서 잘 되었으며 무억 때문에 잘 진행될 거러고 보는지를 일일이 캐묻는 것이다. 학자들은 이런 질문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명괘한 해답을 준다.

 

4단계

그런 다음 재계의 사업가들을 초청한다. 이병철은 재계에 발이 넓어 친분이 두터운 사업가가 아주 많았다. 그들을 만나서 지난해 이런 업종이 성공적이었다는데 어째서 그런지를 하나하나 물어본다. 사업가는 그들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고, 또 구체적이기 때문에 크게 참고가 된다.

 

5단계

이렇게 해서 이병철은 삼성에 도입할 새 사업이나 경영, 제도 등을 일본 각계의 정보를 통해 알아낸 후 구상을 하고 비서실에 지시해서 이를 더욱 구체화해나갔다. 특히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에는 더욱 철저하게, 입안에서부터 실사까지 그 과정을 지시하고 점점했다.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것이 이병철의 특성이다. 귀국이 임박지면 서점에 가서 참고가 될 만한 책을 몇 아름씩 골라 사들인다.

6단계

이병철은 귀국하는 즉시 자신이 작성한 유망업종 리스트를 그룹 비서실에 내주고 우리의 상황에 그 사업이 타당성이 있는지를 검토시켜 실정ㅇ에 맞는 사업 하나를 선정하라고 지시한다.

 

 

5.16군사혁명과 도전의 나날들

 

이병철은 5.16군사혁명이 일어날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한국의 재벌기업 총수들이 모두 부정축제자로 감옥에 가고 할 당시였다. 이병철은 당시 한국의 최고 재벌총수였다. 일본까지 수사관이 와서 입국을 종용하라고 했다.

이병철은 많은 생각 끝에 모든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기자회견을 하고 조국에 돌아와 호텔에 감급된 상태에서 박정희 의장을 만나고 경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박정희에게 구속된 기업인들을 풀어줘야 된다고 설득하고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국의 경제를 살리고 더 많은 공장과 새로운 사업을 해야 우리가 잘 살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 당시(1961) 우리의 국민소득은 78달러, 인도보다 가난했고,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필리핀의 국민소득은 1인당 123달러라고 하자 그것을 매우 부러워했다고 한다.

 

1961816일 이병철은 한국경재인연합회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때부터 한국의 비료공장 울산의 공업단지 등 많은 일들을 했다. 해외로 외자 유치사업 등.

196310월 박정희는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때부터 이병철과 정주영 등 많은 기업가들이 한국경제를 일으켜왔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이 6.25의 전쟁으로 폐허가 나라를 세계경제 10위권에 도전한 계기가 되었다.

 

경쟁자는 바로 모든 국가이다.

 

이병철은 자신의 나이를 되돌아보았다. 73, 고희기 지난 나이다.

손자의 재룡을 보면서 노후를 편안하게 보낼 나이에 그는 다시 한 번 일어서기로 결심한다. 드디어 반도체분야로 도전이 시작되었다.

반도체 자체도 수천 종류가 있으므로 그중 이익이 많이 나는 품목을 찾아야 합니다. 이윤이 적은 것은 적게 생산하고, 이윤이 많은 것은 많이 생산해야 합니다. 그것이 비즈니스입니다.”

 

73세 살의 모험

 

1982, 이병철은 18년 만에 미국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와본 미국은 과연 경제대국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변두리에 나갔더니 8차선 도로에 출근하는 자동차가 줄을 잇고 있었는데 거의 모두가 대형차였다.

한데 그 차들에 각각한 명의 운전자만 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미국이 경제대국이라 하더라도 저렇게 큰 승ㅇ용차에 혼자 타고 간다는 것은 엄청난 자원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이병철은 미국이 부자나라이긴 하지만 자원의 낭비가 심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라는 판단했다.

나름대로 조사를 해보니 당시 미국은 군사적으로 소련을 이기지 못해 국민들의 욕구불만이 저하되어 실업사태가 속출하고 있었다. 노조의 힘은 강할 대로 강해져 생산 공정의 합리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고, 생산성 또한 저조했다. 해고와 복직이 계약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종업원들은 약속한 범위 내에서 일을 하고 정해진 급료를 받아갔다. 예컨대 작업시간이 종료되는 오후 6시에는 업무 종료 벨이 울리자마자 나사를 조이다 말고 그 자리에서 퇴근하는 식이었으니 종업원들의 애사심은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고 품질향상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에 일본은 애국심이나 애사심이 강해 기어코 선진국의 제품을 능가하겠다는 장인정신이 존재했다. 그 결과 일본의 철강과 자동차는 미국 대륙을 휩쓸었고 미국제품은 본토 안에서조차 경쟁력을 완전히 잃고 있었다. 일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반도체마저 미국시장에 상륙시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반도체는 미국의 IBM 같은 대기업이 그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어느 사이에 일제 반도체에 밀려 경영난을 겪고 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였기에 이병철은 이러한 상황을 보고 한국도 반도체에 진출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사실 그는 미국을 방문하기 2년 전인 1980년 봄, 일본의 저명한 경제전문가 이나바 박사로부터 반도체 생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자원이 없다. 살길은 오직 수출밖에 없는 나라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국으로서도 산업의 재편을 추진하고, 첨단기술 산업을 시급히 육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이병철이 생각하고 있는 첨단산업기술이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그것은 반도체였다. 반도체는 산업의 살이며 21세기 첨단 산업의 핵심이다. 그러나 문제는 워낙 세밀한 산업이다 보니 그 기술수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고 막대한 자원이 투자되어야 했다. 더구나 그 기술개발속도가 무척 빨라 제품의 사이클이 짧은 것도 문제였다. 당시 반도체는 2,3년 주기로 신제품이 쏟아지고 있는데다가 고급두뇌와 기술 인력을 오랫동안 육성해온 미국과 일본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었다.

이병철은 고민에 빠졌다. 고급두뇌는 어디서 데려올 것이며, 데려오지 못할 경우 어떻게 육성해야 하는 것일까? 또 공장부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며 그 건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또한 공장설비에 드는 천문학적인 돈을 어떻게 조달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것은 국가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다.

 

그는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전문가들을 수도 없이 만났고, 국내에서도 전자산업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일본과 미국에서 나온 컴퓨터에 관해서 관계 자료는 구할 수 있을 만큼 구해서 읽었기 때문에 반도체와 컴퓨터에 관해서 어느 정도의 판단이 섰다. 그 결과 반도체산업이 한국에서도 전혀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19819월 이병철은 당시 그룹 임원에서 삼서의 장래에 관해서 자신의 견해와 경영관을 밝혔다. 당시 그는, 앞으로 반도체와 컴퓨터에 삼성의 흥망을 걸겠다고 선언했다.

198326일 도쿄의 오쿠라 호텔 505호실에서 이병철이 반도체 생산을 결심한 것은 단 세줄의 통계에 의한 것이다.

철강은 톤당 340달러, 석탄은 40달러, 알루미늄은 3,400달러, 텔레비전은 21,300달러, 반도체는 85억 달러, 소프트웨어는 톤당 426억 달러의 부가가치가 있다’.

이병철은 1983315일을 반도체산업의 원년으로 삼았다.

반도체공장 건설에는 신정, 구정은 물론 국경일, 토요일, 일요일 할것 없이 그야말로 365일 철야작업이었다. 그 결과 선진국에는 18개월 걸리는 공사가 착공 6개월 만인 19845월 완공되는 신기록을 수립했다. 공장 건설ㄹ을 하고 잇는 와중에 한편에서는 미국 마이크론 사로부터 기술을 도입, 64KD램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198311월의 일이다. VLSI 반도체공장 제1라인 준공과 동시에 반도체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8410월 간신히 수출하기 시작한 64K D램의 수출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삼성ㅇ이 반도체를 생산하자 미국의 마이크론 사가 당시 3달러였던 64K D램의 시장가격을 그 절반 수준인 1달러 80센트로 대폭 인하해서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이크론이 대대적인 덤핑 공세에 나서자 일본 반도체 업체들도 덤핑에 합류하여 64K D램 가격은 30센트까지 떨어졌다. 정상가의 10분의 1이 되어버린 것이다.

삼성은 첫해부터 대형 적자가 발생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반도체산업을 시작하기로 한 이상 물러설 수 는 없었다. 삼성은 64K D램을 20센트라는 사상 최하의 가격으로 판매했다. 이것은 미국이나 일본 업체의 제품보다 훨씬 산 가격이었다. 개당 20센트의 가격은 원가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라 삼성은 이때 무려 1,30억 원의 적자를 보게 되었다. 삼성 임직원들의 실망은 컸다. 그러나 이병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반도체의 승부를 걸기로 한 이상 의연하게 대처하면서 밀어붙이기로 그는 이미 결심한 후다. 어차피 예상 했던 시련이었다. 이병철은 삼성의 임직원들을 격려하면서 좌절하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갈 것을 독려하였다.

아울러 그는 64KD램의 가격이 최근 많이 떨어졌지만 다른 천여 종의 반도체 제품ㅇ에서 이익이 나기 때문에 전체로 보면 흑자라고 지원들을 위로하면서, 의연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반도체 자체도 수천 종류가 있으므로 그중 이익이 많이 나는 품목을 찾아야 합니다. 이윤이 적은 것은 적게 생산하고, 이윤이 많은 것은 많이 생산하야 합니다. 그것이 비즈니스입니다.”

19853월 삼성은 부천공장 1라인을 만들고, 5월에는 기흥공장에 제2라인을, 다시 10월에는 메가라인 을 준공했으며, 19874월에는 미국 현지법인에 시제품 라인을 준공하는데 이어 8월에는 신규 라인인 3라인의 기공식을 갖었다. 제품의 다양화를 위한 끊임없는 신제품 공장 건설이었다. 그 결과 삼성은 64KD, 1메가D램 등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여 초기에 난관에 부딪혔던 반도체사업의 새로운 활로를 열었다.

 

미국과 일본의 반도체 업체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삼성의 세계반도체 시장 진출에 대해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미국의 IT 사는 달라스 지방법원에, 도 미국의 마이크론 사는 아이다호 지방법원에 각각 삼성을 반도체 덤핑 협의로 제소했다. 그러나 신제품인 256K D램이 시장진입에 성공, 판매를 시작한지 단 1년 만에 세계D램 시장의 10%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집념을 가지고 밀어붙인 결과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그 당시 이병철의 집념과 반도체사업에 대한 혜안은 오늘날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로 세계를 제패하게 된 원동력이다. 삼성의 사운을 걸고 반도체에 뛰어들었던 이병철은 각종 난관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열정과 굽힐 줄 모르는 집념, 그리고 강력한 추진력으로 삼성은 물론 한국의 반도체산업을 최단시긴 내에 반석 위에 올려놓는 쾌거를 이룩했다.

 

32명의 인재 사절단

 

이병철은 고급두뇌를 유치하기 위해 미국에 유학 가 있는 한국의 인재들을 조사했다. 그 결과 스탠포드 대학, 인텔, 자이로그 등에 한국인 박사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반도체분야최고의 전문가일 뿐 아니라, 설계나 제조 판매 분야에서도 실전경험을 많이 쌓아온 석학들이었다. 바로 진대제와 이윤우, 황창규 같은 사람들이다.

삼성의 스카우트 요청을 받은 진대재(전 정보통신주 장관)는 경기고와 서울공대, 미국 스탠포드 대학원의 박사 출신으로 인텔사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가 인텔측에 사표를 제출하자 인텔은 백지수표를 제시하며 그의 귀국을 만류할 정도 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을 이기러 간다고 말하면서 삼성반도체 건립에 합류했다.

19837월에 반도체사업의 본고장인 미국 실리콘밸리 현지에 트라이스타 세미컨덕터라는 현지법인을 세웠다. 이 법인에는 한국인 과학자 외에 중국, 일본, 베트남, 인도 등 동양인 고급인력 32명을 확보했고, 그들이 개발한 제품을 시험 생산할 공정개발 정문가와 생산전문요원 75명도 채용하여 256K D램을 개발하라는 과제를 주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경기도 기흥에 10만 평의 공장부지가 확보되어 9월에 기공식을 가진 후 24시간 쉬지 않는 돌판공사가 진행되었다.

 

 

 

이 병 철경영 note

사업규모의 경제성 파악을 위한 원칙

 

1.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2. 확보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및 적성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3. 동원할 수 있는 기술수준을 알아야 한다.

4. 확보할 수 있는 시장의 크기를 알아야 한다.

 

그는 수많은 점검과 확인을 하면서 드디어 반도체 산업을 시작하여 2008년 세계자료에 보면 삼성반도체가 세계 제1의 자리를 확보했으며 전 세계시장 점유율 30% 드디어 한국을 반도체 국가로 만들었다. 그 뿐 아니라 핸드폰시장1위 도한 최고의 휴대폰은 삼성의 휴대폰이라는 것이다. 한사람의 꿈이 이렇게 놀라운 결과를 만들었다. 이러한 기업가들이 있기에 오늘날 한국은 세계10위 경제국으로 꿈을 이룬 것이다. * 이병철 경영대전을 읽고서’ .Y.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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