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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작성자 관리자 [2020-02-24 15: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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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

저자 전진문

출판사 황금가지

출판일 초판 2004. 3. 9

페이지 225

정가 11,000

  

책 소개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은 10대에 걸쳐 부를 이어 온 경주 최 부잣집의 15가지 부의 비밀을 알려준다정당한 부의 축적방법과 적절한 부의 순환을 통해 '부자는 3대를 못 간다'는 속담을 철저히 빗겨간 이들을 만나본다올바른 ''에 대한 인식과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저자소개

전진문

대구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영학박사 학위를 받았다대구가톨릭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기획실장· 학장· 경영대학원장 등의 보직을 역임하였고한국산업경영학회장을 지냈다미국 위스콘신주립대와 일리노이주립대에 방문교수로 있었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영남대학교 경영학부 겸임교수로 강의를 하면서 경일약품(이사로 재직 중이다대구경영자독서모임」 대표를 맡고 있으며월간 머니에 전진문의 부자론을 3년간 연재하는 등 기업 및 부자 관련의 글을 쓰고 있다저서로 회계이론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이 있다.

 

한국의 부자 경주 최씨 이야기

 

우리는 누구나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그리고 그 부자가 자손 대대로 오래 지속되기를 원한다.

경주 최 부자는 만석의 부를 이루었고, 1600년대 초반에서 1900년 중반까지 무려 300년 동안 12대를 내려오며 만석꾼의 전통을 가졌고 마지막에는 1950전 재산을 스스로 영남대의 전신인 대구대학에 기증함으로써스스로를 역사의 무대 위로 던지고 사라졌다. 

그동안 300년을 넘게 만석꾼 부자로 지켜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최 부잣집 가문이 지켜 온 가훈은 오늘날 우리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소크라데스는 부유한 사람이 그 부를 자랑하고 있다 하더라도그가 부를 어떻게 쓰는가를 알기 전에는 그를 칭찬해서는 안 된다.”러고 말한 바와 같이 부자를 칭찬하는 데는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권불십년이란 말이 있다아무리 강해 보이는 권력도 십 년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의미이다비슷한 개념으로 부불삼대라는 말이 있다부라는 것은 삼대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우리의 속담에 부자 3대를 못 간다.”라는 말도 있듯이 3대를 지키기도 힘든 부를 10대에 걸쳐 온 것은 참으로 놀랍고도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이는 부를 이루기도 어렵지만 이를 지속하기는 더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가장 부자였던 이태리의 메디치는 겨우 200년을 유지했을 뿐이다하지만 한국의 부자 경주 최씨는 무려 12대에 걸쳐 300년간 만석 이상의 부를 유지했다부자는 단순히 재테크의 문제는 아니다특히 300년 이상 부를 유지한다는 것은 철학이 있어야 가능하다경주 최씨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경주 최 부자 가문에는 유난해도 후손들에게 남겨 준 유훈(遺訓)이 많다흔히 알려져 있는 여섯 가지의 가훈을 비롯하여 어떠한 상황에 처했을 때 처신 방법을 제시해 주는 육연(六然), 가정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다룬 가거 십훈(家居十訓), 가정에서 장가를 가는 아들에게 주는 글과 시집을 가는 달에게 주는 글 등 여러 가지 교훈을 볼 수 있다.

 

 

경주 최 씨에게는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가훈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과거는 보되 진사 이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권력이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가능한 멀리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자칫 하다가는 집안이 몰락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아예 멀리하면 되지 무슨 이유로 그 어려운 진사시험에는 합격하라는 것일까조선 시대는 철저하게 양반이 지배하던 사회이다양반이 되지 않고서는 신분이나 부를 유지할 수 없다또 학문을 해야만 사물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고 그래야만 부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지식과 최소한의 계급은 갖되 권력과는 일정 거리를 두는 것이 비결인 셈이다부자들이 다른 것보다 자식 교육에 목숨을 거는 것도 이 때문이다또 지금처럼 지식과 부가 비례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깨달음이 있어야 부의 유지가 가능하다.

 

둘째, 인간관계에 바탕 한 노사관계의 실천이다.

최 씨 가문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최진립 장군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온갖 시중을 들다 마지막에 장군과 함께 죽은 충실한 노비 옥동과 기별에 대해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최근에는 이조리 가암촌에 이들을 위한 불망비(不忘碑)까지 세워 주었다고 한다천대 받던 노비에게 이런 대접을 하는 것은 다른 가문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부하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최씨 가문의 이런 행동이야말로 따뜻한 선비정신이고 부를 이렇게 유지하게 한 원동력이 아닐까?

 

셋째솔선수범과 승승의 정신이다.

함께 일하고 일한만큼 가져간다는 것은 최 부자 집의 철학이다임진왜란 이후 국가는 황폐해진 국토의 개간 작업을 국민들에게 권했다하지만 노력한 것에 비해 가져가는 것이 적어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그런데 경주 최 씨는 병작반수제를 과감하게 도입한다병작반수제란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수확물의 절반을 지대(地貸)로 주는 것을 말한다착취 수준의 기존 지주들에 비해 엄청난 대가였던 것이다그 결과 수많은 유랑인과 소작인들이 기꺼이 최씨 가문 사람들과 일하기를 원했고 그들의 부는 계속 증진할 수 있었다또 당시 대지주들은 부재지주로서 주로 한양이나 큰 고을에 따로 살면서 소작료만 챙기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최씨 가족들은 그 동네에 같이 살면서 이른 새벽부터 솔선하여 일터로 나갔다또한 일을 하면 배불리 점심을 먹을 수 있게 해 주었다당시만 해도 하루 두 끼 먹는 것이 상례였는데 이들은 세 끼를 먹게 해 주었던 것이다.

 

넷째그들은 겸손했고 함부로 부를 자랑하지 않았다.

"내 돈 내가 쓰는데 왜 그러냐."는 생각으로 어려운 사람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맘대로 물 쓰듯 돈을 쓰는 졸부와는 대조를 보인다최씨 집안 며느리들은 결혼 후 3년간 무명옷만을 입어야 했다대신 과객은 후하게 대접했다일 년 소득의 삼분의 정도를 과객을 위해 썼는데 참 대단한 일이다덕분에 좋은 정보도 얻을 수 있었고인심을 얻어 어려운 위기도 잘 극복하게 된다경주 최씨의 마지막 최준씨는 독립운동을 하다 파산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당시 아리가란 식산은행장의 도움으로 살아난다그가 경주 최씨를 도운 이유는 최 부자가 예뻐서라기보다 주위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있는 그 사람이 파산하게 되면 민심이 흉흉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다섯 째이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

 

1671년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다경주 최씨는 곳간을 과감히 헐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모든 사람이 굶어 죽을 판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갖고 있어 무엇 하겠는가.? 곳간을 열어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히도록 하라." 이렇게 말하고 집 앞 마당에 큰 솥을 걸고 굶주린 사람을 위해 연일 죽을 끓이도록 했다지금도 그 자리가 활인 당이라 이름으로 남아 있다또 흉년에는 소작료도 대폭 탕감했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흉년 기에는 땅을 사지 말라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말라." 경주 최씨의 또 다른 유훈이다가진 자는 그 부를 주위사람들과 나눌 의무가 있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그 옛날에 이미 실천한 셈이다일제의 강점 하에 경주 최씨는 독립군을 지원하고 그것 때문에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다.

 

여섯 째마지막으로 나라의 교육을 위해 지금의 영남대학에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화려했던 300년 부를 멋지게 마무리 한다.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모두 보여준다. "부자인 채로 죽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바보라고 카네기는 말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경주 최씨는 진정한 부자는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었다는 생각이다우리나라에도 이런 아름다운 부자들이 많이 나타나길 기원해 본다

 

목차

1부 집안을 일으키고 300년 부의 기반을 다지다 

천석꾼만석꾼이란 어느 정도의 부자인가

만석꾼은 약 300만평의 논밭을 가진 엄청나게 큰 부자이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기초를 다진 최진립

정무공 최진립은 자가 사건이요 호는 잠와다최신보의 네 아들 중 셋째로 선조 원년 (1568)에 경주부 부북 현곡촌 구미동에서 태어났다.

최진립은 어려서부터 예의 법도가 있었다그의 나이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와 제례를 모두 예문에 좇아 처음부터 끝까지 게을리 하지 않아 이웃과 마을에서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고 한다.

엄청나게 재산을 오랫동안 간직해온 경주 최 부자의 가문을 일으킨 사람으로 마지막 최 부자 최준의 11대조인 정무공 최진립 장군이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첫 번째 비밀 -

부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지위만을 갖는다.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장렬하게 전사한 최진립은 평소에 자식들에게 당부한 다음과 같은 유훈(遺訓)이 있었다고 한다.

바라건대 너희들은 무릇 내가 전하는 바를 어기지 말고 시행해야 할 것이다사람이 태어나서 한평생을 사는 데는 하늘이 내린 각자의 할 바가 있다먼저 나라가 위급하면 몸을 아끼지 마로 충성하여 나라를 구해야 할 것이다나라가 없는데 어찌 개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다음으로 가문을 지켜야 한다가문이야말로 모든 생명의 뿌리가 박힌 곳이므로 이를 가꾸지 않음은 뿌리를 박을 터를 잃어버림과 다름이 아니다가문과 나라를 지키면서 부단히 학문하기에 힘써라학문이 없이는 밝음()이 없고 밝음이 없는 어둠의 생활은 ant 짐승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느냐그러나 벼슬을 목적으로 학문을 하지마라뭇 사람들과의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원만하게 벼슬자리를 수행하기란 지극히 어렵다사람이 왕후장상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권세와 부귀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권세의 자리에 있음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아 언제 자신의 칼에 베일지 모르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ㅇ의 벼슬은 하지마라.

이것이 경주 최 부자 가문의 첫 번째 가훈이 되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조선시대는 철저하게 양반이 지배하는 사회로 양반이 되지 않고는 신분이나 부를 유지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 양반 신분의 유지는 부의 유지에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다당시에는 양반 신분일수록 농지 소유에 있어서 우월 자가 되었다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반이 되어야 하고 양반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소과인 진사나 생원에 급제해야 한다이러한 조건에서 과거는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 것이라는 가훈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진사는 하되 벼슬은 하지 말도록 한 것은 당시의 정치적 구조를 경험한 최진립의 뼈아픈 교훈으로벼슬을 하면 욕심이 끝이 없어 권력의 맛을 들이게 되고 결국에는 권력다툼에 휘말리게 되어 권력 구조가 바뀌면 철저히 보복당해 가문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글을 잃지 않는 무식한 부자는 부를 지키기도 어렵다는 것을 일러 주는 말이기도 했다.

최 부잣집에서 이와 같이 양반의 지위를 인정받는 데 필요한 최소의 조건인 진사만 유지하면서 벼슬을 하지 않아 정쟁에 휩쓸리지 않은 것은 놀라운 장기적 안목이라 할 수 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두 번째 비밀 -

한국적 인간관계에 바탕을 둔 노사 관계를 실천한다.

기업이란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모든 일은 결국 사람이 하게 되고 사람을 위하여 행하게 된다그러므로 지도자나 최고 경영자와 조직 구원원이 서로 이해하며 존경하여 역할을 잘 나눌 수 있는 기업이 성공할 수밖에 없다.

경주 최 부잣집에서 볼 수 있는 주인과 노비가 서로 인간적으로 존중하는 정신이나 믿고 자제하며 양보하는 정신은 한국적 공동체 원리의 좋은 예 가 된다고 하겠다.

최진립이 죽고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어 손자인 최국선에 이르면 엄청나게 재산이 불어난다.

최동량이 아버지의 묘 옆에서 3년 동안 시묘 살이를 하는 동안 집안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그는 우선 세월이 지나면 잊혀 질까두려워 당대의 저명한 선비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아버지의 행장과 묘비 문실록을 만들어 기록을 남기는 일을 먼저 챙겼다.

이것은 경영학적인 의미로 본다면 기업 이념의 정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떠한 삶이 가치 있는 삶인가?’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없으면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 기업을 경영하는가?’에 대한 확고한 의미 부여가 없으면 혼아 없는 경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동량은 훌륭한 아버지를 표본으로 보임으로써 후손들이 본받고 따를 모델을 구축했으며 최 부잣집이 오래 유지될 수 있는 기초를 놓았다는 데서 큰 의미기 있다고 할 것이다. .



300년 만석꾼 집안의 세 번째 비밀 -

함께 일하고 일한 만큼 가져간다.

최동량이 하인을 부리는 기본적인 자세와 애정은 시집가는 딸에게 주는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자식이 부모를 섬길 때 손수 밭을 갈고 밥을 짓고 반찬을 장만하고 나무를 베어 어버이가 주무시는 방에 불을 때고 바람과 비를 가리지 아니하고 어버이의 수고를 대신하면 만고의 효자라고 한다요사이는 그러한 자식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자식이 못하는 일을 일꾼이 하여 농사를 짓고 밥과 반찬을 장만하고 멀고 가까운 데 심부름을 해주니 아무리 나라의 신분 제도가 그러하지만 일꾼밖에 고귀한 일이 없느니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일꾼도 또한 사람의 아들딸이니 잘 대접하라는 말씀이 어찌 옳지 않으리오부디 어여삐 여기고 꾸짖지 말고 때일 일이 있어도 꾸중하며 지나치게 말라사람의 재주는 모두 각각 다르니 그 사람이 못할 일은 아예 시키지 말고 이 일꾼에게 저 일꾼의 말을 하거나 음란한 말을 하거든 아는 체하지 말고 오래된 뒤에 경계하여 꾸짖되 길게 꾸중하지 말고 자주 나무라지 말고 헛되이 칭찬하지 말고 수고하는 날이거든 음식을 생각하여 주고 어린자식이라도 어여삐 여겨 주고 부모나 자식이나 동생이 있는 일꾼이 병이 들거든 죽 끓일 쌀을 주고 친척이 없는 이꾼이 병이 들거든 집에서 간호하여 주고 증세를 각별히 유의하여 물어 고쳐 주고 위엄있게 은혜를 베풀면 일꾼이 자연 진실하게 되느니라그렇게 하여도 마침내 속이고 사나워서 부릴 수가 없거든 그대로 두고 시키지 말라.

최동량은 일찍부터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다니면서 겸문을 넓혔고아버지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하고 아버지의 뜻을 후손에게 전하기 위해 저명한 선비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선고의 행장과 실록 및 묘비 문을 만들고 가거십훈(家居十訓)을 지어 자손들에게 물려주며 가문의 이념적 뼈대를 구축했다.

이것은 현대적 의미로 보면 가문의 경영 철학을 형성한 것이라 볼 수 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경영 철학가거십훈 산업의 근본으로 가산을 일꾼이다
최동량이 죽기 전해 겨울에 자손들에게 훈계하기 위해 지었다는 가거십훈(家居十訓)이라는 가훈이 있다.

 

첫째는, 이르되 인류의 밝힘이다.

대저 오품(부자우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요륜(五倫)은 하늘이 내려준 법으로 천하 고금에 다 함께 따라야 할 공통된 도리이다그러한 까닭에 성인이 사람을 가르침에 반드시 이 다섯 가지를 먼저 하였으니이에 밝지 못하면 사람이 능히 사람답지 못하며가정이 가정답지 못하게 되나니 가히 두렵지 않겠는가.

 

둘째는, 이르되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 해야 한다.

부자는 천성적으로 맺어진 친속이며이른바 효라는 것은 덕의 근본이요 행실의 근원으로 가르침이 그로 인하여 생겨나는 바이다.

 

셋째는, 이르되 임금을 사랑함에 충성으로 해야 한다.

임금과 신하의 큰 윤리는 하늘의 법도요땅의 의리이다함께 나서 함께 살아가는 자이다남의 신하가 된 자는 반드시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긴 바로서 임금을 섬겨야 바야흐로 신하의 도리를 다하게 된다.

 

넷째는, 이르되 가정을 잘 다스려야 된다.

부부는 두 성씨의 결합이니남자는 밖에서 위치를 바르게 가지고여자는 안에서 위치를 바르게 가져서 밖의 말이 안방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안의 말이 바깥에 나오지 아니해야만 남녀 구별이 엄하지 않겠는가.

남편은 그 몸가짐을 조심하여 그 아내를 거느리고아내는 그 몸가짐을 조심하여 그 남편을 받들어서희락하고 또한 즐겁게 부모의 뜻에 순종하면 가도(家道)가 바르게 된다.

 

다섯째, 이르데 형제간에는 우애가 있어야 한다.

형은 아우에게 우애하고 아우는 형을 공경하여 노여움을 품고 서로 다투어서 천륜을 괴멸시키지 말아야 한다.

 

여섯째이르되 붕우 간에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

붕우는 그 덕을 벗하며 그 인()을 돕는 것이다그래서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벗에 의뢰하지 아니하고 덕을 이루는 자가 없다.

이러한 까닭으로 벗은 반드시 단정한 사람으로 하되 반드시 나보다 나은 사람을 가려서 간절하고 자세하게 충고하며 착한 길로 인도하되 듣지 않으면 그만 두어야 한다.

 

일곱째, 이르되 여색을 멀리 해야 된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예쁘고 고운 칼(예쁜 여성을 비유한 말)이 세상 사람들을 다 죽인다.”고 하였으니 그 말이 진실하다.

임금이 여색을 좋아하면 그 나라가 망하고대부가 여색을 좋아하면 그 집이 망하고선비와 서인이 여색을 좋아하면 그 멈을 망치게 된다그렇다면 사람의 집에 화근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

 

여덟째이르되 술에 취함을 경계하여야 한다.

술이라는 것은 예를 하고 성품을 기르며 환락하는 것이다그러나 지나치면 환난이 되니 삼가지 아니하면 안 된다.

 

아홉째농업과 잠업에 힘쓰는 것이다.

이는 천하의 근본이다그래서 맹자가 말하기를 오묘의 집 가에 뽕나무를 심으면 71세의 오인이 명주옷을 입을 수 있고백 묘의 밭에 농사 때를 잃지 않으면 여덟 식구의 가정이 주리지 않는다.”고 하였다그러므로 농업을 밝게 하고 잠업을 다스리는 것은 가정의 급한 일이다.

 

열째는, 이르되 경학(경서를 연구하는 학문)을 익히는 것이다.

경서라는 것은 옛 성현들의 마음 다스리는 법을 밝혀 전해지는 서책이다사람의 성품이 모두 착하였으나 깨달음의 선후가 있으니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착한 것이 밝혀져 그 처음의 본성을 회복하게 된다.

 


2부 원칙을 지키는 경영으로 300년 재산을 일구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네 번째 비밀 -

군림하지 않고 경영하는 중간 관리자를 세운다.

 

최진립의 아들인 최동량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 최씨 가문의 부자로 나아가는 기틀을 마련했다그는 무엇보다도 아버지의 유훈을 잘 받들고 가업을 이루는 정신적 기초를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토대위에서 최동량의 아들 최국선은 본격적으로 재산을 일구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최씨 집안에서는 소작인을 후하게 대접하고 가족처럼 여기며 각종 부역을 피할 수 있게 했다그러므로 최씨 집안으로 유량인들이 계속 모여들면서 농장은 더욱 확대될 수 있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다섯 번째 비밀 -

양입위출들어올 것을 헤아려 나갈 것을 정한다.

최국선은 아버지 최동량이 죽은 후에 편모를 모시면서 가업인 농사일에 혼심을 기울였다아버지가 일구어 놓은 많은 농토와 노비들을 관리하면서 할아버지의 높은 뜻을 받들었다벼슬에는 관심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농작 수확을 얻을 것인가를 연구했다.아버지가 읽던 여러 가지의 농사 서적 특히 신숙이 지은 농가집성⌟ 등을 탐독하는 한편 다른 지방에서의 농사 기법도 탐색했다.

또한 최국선은 이재(理財)의 기본 원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들어올 것을 헤아려 나갈 것을 정함은 오늘날의 예산설정의 기본 정신이라 할 수 있으며현대 경영의 요체가 계호기실천평가라고 볼 대 이와 부합하는 탁월한 식견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최국선의 말에는 도한 철저한 절약정신을 엿볼 수 있다.

최국선의 탁월한 이재(理財술은 큰 부를 일구어 냈다몸에 벤 근검절약 정신과 노비들을 가족처럼 아끼고들어올 것을 헤아려 나갈 것을 정하는 철저한 양입위출의 정신과 언제나 새로운 농사법을 생각하는 정신이 바로 그것이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여섯 번째 비밀 -

사회적 책임을 저버리지 않고 받은 만큼 사회에 환원한다.

최 부잣집은 명실 공히 만석꾼으로 일으켜 세운 최국선은 검소와 절약을 특히 강조했으나 그 절약이 인색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애섰다.

현종 신해년(1671) 최국선의 나이 마흔한 살 대 삼남에 큰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이 허다했다그때 최구선은 과감히 곳간을 헐었다.

모든 사람들이 장차 굶어 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느냐곳간을 열어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 주도록 하라.

 

이렇게 말하고 집 앞의 큰 바깥마당에 큰 솥을 걸고 굶주린 사람을 위해 연일 죽을 끓이도록 했다.

사방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 가훈이 바로 그대 생긴 것이다.

3,4년 정도에 한 번씩 찾아오는 흉년은 가난한 백성에게는 고통 이었다평년작에 절반도 못 미치는 생산으로 두 집 건너 한 집은 굶는 형편이었다그때마다 최 부잣집에서는 소작료를 대폭 탕감했다

최 부잣집의 소작인들은 이러한 조처에 또다시 감복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일곱 번째 비밀 -

때를 가려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린다.

 

최국선은 남과의 거래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자세를 자상히 알려 주고 있다.

첫째,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

둘째, ‘남이 위급한 상황에서 물건을 헐값으로 내놓을 때라도 물건 값은 제값을 주고 사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거래란 결국 거래 당사자들이 모두 만족한 상태라야만 의미 있게 완성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물건을 살 때 상대방의 요구하는 대로 터무니없이 높게 사라는 말은 아니다제값을 헤아리지 못하고 지나치게 주었어도 잘못임을 지적하고 있다.

 

경주 최 부자의 가훈에 나타나는 중요한 정신은 재산의 축적 과정이 도덕적이고 정당성이었다는 사실이다.

최 부자는 남의 약점을 이용해서 재산을 늘리지 않았다는 데서 이웃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았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여덟 번째 비밀 -

지나치게 재산을 불리지 않는다.

최진립 장군이 가문의 터전을 일군 뒤에 그의 셋째 아들인 최동량이 부의 기틀을 다지고 또 최동량의 맏아들인 최국선이 만석꾼 최 부자라는 명성을 얻었다.

최국선도 아들 셋과 달 셋을 두었는데그 증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잘 이어받은 사람은 둘째 최의기였다효종 계사년(1653)에 태어난 최의기는 자는 방숙이고현재의 교촌파 최 부자의 파조를 이루었다최국선 대에 이루어진 만석꾼의 토대가 그 아들 대에 가서는 둘째 아들에게로 그 부의 맥이 흐른 것이다.

최의기는 끝내 진사가 되지는 못했으나 재산을 일구면서 일흔 살까지 수를 누렸다그가 죽기 직전에 자식에게 이른 유언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재산은 만 석 이상 하지 마라.”

최 부자의 전체 소작료 수입은 1년에 만 석을 넘지 않도록 했기 때문에 최 부자의 토지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소작인 개인이 내야 하는 소작료는 줄어들었다이 때문에 농민들은 최 부자가 더욱더 땅을 많이 가지기를 원하여 땅을 판다는 소문만 들으면 최 부자에게 소개해 사도록 권하기까지 했다.

기업의 이념적 목적을 세우는 데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하나는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조는 설이며 다른 하나는생산을 하는 것이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윤을 획득해야 한다는 설이다.

오늘날의 경제 원리에 보면 단기적인 극대 이윤의 추구보다는 적정 이윤의 추구가 오히려 종업원과 소비자들에게 먹혀들어 장기적인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것과 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그 욕심을 절제하지 않고 무모하게 끝없이 추구하면 결국에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이야기로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 한가를 들 수 있다.

이 책의 결론은 욕심을 부리다가 마지막에 죽고마다는 이야기로 결국 자기가 차지한 땅은 6척의 몸이 무칠 무덤하나뿐이라는 내용이다.

 


3부 사회적 윤리를 실천하며 300년 재산을 지키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아홉 번째 비밀 -

청백리 정신에 바탕을 둔 근검절약 정신을 실천한다.

 

최 부잣집 사람들은 모두가 근검절약이 몸에 밴 가풍을 가지고 있었지만 또 하나의 가훈을 만들었다.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도안 무명옷을 입어라.” 만석군의 부잣집 며느리가 3년 동안은 비단옷을 입지 말고 무명옷을 입으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나치게 인색한 석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검약 정신은 하인들에게는 물론 이웃 사람들에게도 교훈이 되었다.

경주 최 부자 가문이 부를 유지한 도 하나의 비결은 선비 정신에 근거한 근검절약 정신이다이는 최진립으로부터 이어 오는 청백리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최 부잣집 며느리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도록 한 것은 살람을 맡아 하는 며느리에게 근검절약하는 정신이 몸에 배도록 하려는 뜻이다오늘날에도 모든 부의 원천이 절약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생각할 때 부자로 서는 당연하면서도 지키기 어려운 덕목이라 할 수 있다.

 

300년 만석군 집안의 구체적 상황 대처법육연
경주 최 부잣집에는 선조 때부터 내려오는 또 하나의 유훈으로 수신을 위한 육연(六然)이 있다이것은 중국 명나라 말기의 학자 육상객(陸湘客)이 지었다는 설도 있고최후거(崔後渠)가 지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하기 어렵다.

육연(六然)은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가져야 할 올바른 자세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여섯 가지 행동적 교훈이라 할 수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 흔히 쓰이는 ()’이란 그러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특정한 사실이나 사태를 가리키는 말이다자연(自然), 당연(當然), 필연(必然), 본연(本然), 우연(偶然), 소이연(所以然그리고 육연에서 말하는 여섯가지 연도 모두 그러하다’ 앞에 다른 글자를 놓음으로서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의 상태를 나타낸다.

예를 들어 자연(自然)은 스로로()’ ‘그러하다()’라는 말로 그러함의 이유와 근거가 행위자 스스로에 있음을 나타낸다.

이 육연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인간이 어떤 상황에 처햇을 때의 구체적 행동 방법을 잘 나타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처초연(自處超然)

고요하게 혼자 있을 때는 초연하라초연함이란 어느 한 가지에 집착함이 없고 얽매임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그러므로 사람이 혼자 있을 때는 어느 란족에 쏠리거나 메이고 집착하면 중용의 도를 잃어버리고 본질이 왜곡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현대적 의미로 보면최고 경영자나 지도자들은 혼자 있을 때 명상을 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특정한 하나의 안에 집착하면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대인애연(對人靄然)

사람을 만날 때는 평화로운 마음으로 만나라인간관계의 기본은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무사징연(無事澄然)

큰일이 없을 때는 물이 맑듯 고요하고 투명해야 한다.

물 속에 불순물 혹은 찌꺼기가 있으면 물이 맑을 수가 없듯이 마음속에 욕심이 있으면 마음이 맑을 수 없다그러므로 욕심을 버리고 불순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일이 없을 때는 나쁜 마음을 버리고 맑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유사감연(有事敢然)

결정을 해야 할 때는 과감하게 실행하라.

혼자 있을 때는 초연하고일이 없을 때는 맑은 물처럼 조용히 스스로의 내면을 바라보다가도 일단 일이 생기면 과감하게 추진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결정을 할 대 주저하거나 미루면 큰일을 그르치게 된다홀로 있을 대사람을 만날 때일이 없을 대 자료와 정보를 차근차근 수집하고 많은 생각을 한다그래야 어떤 일이 생겨 판단이나 의사 결정을 해야 할 때 과감하게 행동에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어도 담담하게 처신하라.

보통 사람의 경우 성공하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흥분한다그러나 일이 잘되어 성공을 거두엇을 때 흥분하지 않고 담담하게 처신해야 한다너무 기쁜 나머지 흥분하면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남에게 시기와 모함을 받을 수도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의태연(失意泰然)

뜻을 잃었어도 태연하게 처신하라.

우리는 어떤 일을 추진하다가 실패하거나 그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아 괴로워하고 좌절하여 허둥대기도 한다그러나 허둥대고 낙담한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실패했더라도 태연한 모습으로 차분하게 실패의 원인을 찾아 다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게 대비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최 부잣집의 사랑채에는 육연을 슨 액자가 걸려 있고그 집안의 어린아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이 육연을 써서 아버지에게 보이고 뜻을 새겨야 했다이렇게 어릴 때부터 철저히 교육하여 생활화함으로서 항상 최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가르쳐 준다.

이것이 최 부잣집 사람들이 매사에 실수하지 않고 최선의 행동을 할 수 있게 한 또 하나의 가르침이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 번째 비밀 -

이루기 힘든 일일수록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으로 행한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한 번째 비밀 -

주변에 사람들이 끊이지 않게 하고 항상 후하게 대접한다.

경주 최 부자 중에서도 가장 낭만적이며 풍류를 알고 학식이 풍부했던 최기영은 많은 시문과 여행기 등을 남겼다.

그의 집에는 항상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그때 도 하나이 가훈이 정착되었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과객은 오늘날의 여행객이다조선 시대에도 오늘날의 여관이나 호텔과 같은 주막이나 객사객관 등이 있었으나 부잣집이나 양반집에 들러 무료로 숙식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과객 중에는 풍류객이나 학문이 깊은 선비도 있었고 무인도 있었다그들은 대체로 지식인들이었고 세상 물정이나 인심과 지방의 사정을 살피면서 이곳저곳으로 소식을 전해 주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에 이들 과객은 정보 교환을 해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가훈은 과객을 차별 없이 대접하여 인심을 얻고 동시에 지식과 문화 교류를 통해 다른 지방의 정보를 얻고집안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집에 오는 손님도 그 지우에 따라 대체로 세 분류로 나누었다일가친척이나 사돈 명가 집 인사 등은 상객이고 대체로 미리 약속을 하고 온다이들은 사랑채에 모셔 특별히 대접한다그 다음이 중객으로 누구누구 집안사람이라면 다 알 만한 사람을 말한다이들은 최 부잣집 가문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양반집 사람으로 작은집이나 4촌들의 사랑채에 모신다마지막으로 하객은 이름 없는 선비로 행색이 초라하고 대체로 잠자리와 식사를 해결하려고 들은 사람들이다이런 사람들은 집 근처의 하인들이 살고 잇는 초가집으로 안내된다.

상객이나 중객하객 할 것 없이 모든 손님에게는 독상으로 대접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두 번째 비밀 -.

자신을 낮춰 상대가 경계하지 않도록 한다.

최기영에게는 아들 둘과 딸 넷이 있었다.

장남 최세련은 정종 신해년(1791)에 태어나 스물여섯 살 때 성균 생원에 급제했으나 조상의 뜻에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세 번째 비밀 -.

덕을 베풀고 몸으로 실천 한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네 번째 비밀 -.

2등을 위해 1등만큼 노력 한다.

1등이란 그야말로 하나분이다. 1등이 아니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평생을 불만 속에서 불행하게 살 수밖에 없다또한 1등을 했더라도 만족은 잠시뿐이고 바로 그 순간부터 끝없는 도전에 시달리게 된다견제와 시기질투모함음해 등이 기다리고 있다. 1등을 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을 참고 이겨야 한다.

그에 비해 2등은 편안하다남의 눈에 두드러지지 않고 경쟁에서 약간 비켜 설 수 있으며 시기와 모함과 질투를 적게 받는다그러면서도 유복하다.

그러나 2등도 결코 쉽지는 않다. 1등에 다름없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그러므로 ‘2등을 하라.’는 말은 노력을 적당ㅇ히 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스스로 분수를 알고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할 줄 아는 자세그것은 민 석 이상은 하지 말라.”라는 가훈과도 일맥상통한다이렇게 스스로 만족하며 겸양할 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생기고 함께 사는 정신도 생기는 것이다.

 

4부 가치 있는 일을 위해 300년 부를 버리다

마지막 최 부자최준

경주 최 부자는 최진립과 그의 아들 최동량이 세운 기틀에서 최국선으로부터 시작하여 최의기치승렬최종률최언경최기영최세란최만희최현석에 의해 10대인 최준에 이르러 드디어 부자의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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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재산을 바칠 필생의 사업을 찾은 마지막 최 부자 최준은 일재강점기시대에 한일 합병으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최준은 제일 멎저 할 일이 민족의 계몽이라고 생각하여 경주 향교를 빌려 간이 학교를 설립하고 인근 백성들과 아이들을 불러 무료로 글을 가르쳤다그러나 간이 학교는 정식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규율을 세울 수 없었고나라가 어수선할 때라서 실패하고 말았다그러나 이것으로 최준은 언젠가 제대로 된 정식 학교를 만들어 보리라는 마음을 먹었다.

해방 이듬해 최준은 거금을 희사하기로 약속하면서 대학 설립을 추진하고그 일은 진행되었다.

 

 

300년 만석꾼 집안의 열다섯 번째 비밀 -.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버린다.

최부자 가문의 마지막 부자였던 최준(1884-1970)의 결단은 또 하나의 인생 사표(師表)입니다못다 푼 신학문의 열망으로 영남대학의 전신인 대구대와 청구대를 세웠고 백산상회를 세워 일제 시대에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그는 노스님에게서 받은 금언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합니다.

재물은 분뇨(똥거름)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 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

 

최준은 해방이후에 달라진 토지 소유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그것은 바로 농지 개혁이었다. 1949년 6농지개혁법이 발효되었다.

 

최준이 그의 전 재산을 교육 사업에 바친 것은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300년 만석꾼 집안도 자녀들을 철저하게 교육한 덕분에 그 많은 재산을 지킬 수 있었다최진립 이후 교촌파를 이군 그의 조상들이 학문을 게을리 했다면 무식한 부자가 몇 대를 버틸 수 있었겠는가재물을 지키는 것은 단지 가문이 호의호식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최준은 고향 경주로 돌아가 마지막 유서를 쓰는 심정으로 월성세헌이라는 책을 간행했다이제 자신이 죽고 나면 까맣게 잊어버릴지도 모르는 직계 조상들의 숭고한 정신과 덕망 그리고 그들의 행적을 자손들에게 길이 전하고 싶어던 것이다.

1970년 9월 15문파 최준은 87세로 경주 본댁사랑채에서 자는 듯 운명했다그의 책상에는 중용이 펼쳐저 있었다. * 책을 읽고서 전영래 장로 Y.L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쓴 경제학자 전진문 박사는 최부잣집이 흉년 때 경상북도 인구의 약 1할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구휼을 베풀었다고 추산했다보통 춘궁기나 보릿고개 때인 3, 4월에는 한달에 약 100석의 쌀을 나눠줬으므로 1만명 정도가 쌀을 얻어갔다고 가정한다어떤 때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거의 바닥이 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신라의 수도이던 경주는 그렇게 1천년의 저력에 어울리는 한 부자 가문을 냈다. ‘경주 최부잣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가문은 조선조 중엽 진취적인 기상으로 농업을 일궈 만석꾼의 지위을 이룩한 뒤 10여대 300년 동안 이 부를 현명하게 지켜내고 선하게 활용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비록 이 집안은 다른 나라의 거대부호 가문처럼 부의 규모가 크지도 않고다른 명예와 권세를 추구해 성공하지도 않았지만몇 가지 점에서 평가받을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1. 모두를 살리는 부부의 생성과 축적 그리고 활용에서 누구를 해치지 않고 각 주체를 가능하면 모두 살리는 부를 구현했다이를 바탕으로 조선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특권계층의 책임)를 구현한 가문으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다.

2. 경제 외적 노하우(know-how): 부를 지켜내는 동력으로서 경제 외적 노하우를 대단히 중요하게 평가했다당대만의 성공이 아니라 긴 성공을 위해선 자기와 가문을 제대로 다스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고 대비했다.

3. 가문의 장기 생존과 발전가문의 동질성과 순정성을 10여대 300년 동안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드물다더구나 전란과 민란외침식민통치체제 대립 등으로 점철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적 부와선행을 계속하는 명가문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4. 후손 교육의 성공과 그 비결로서의 기록드물게 가문의 도덕률처세술경영관 등 노하우를 기록으로 남겨 후손을 교육하는 데 성공했다이것은 2가지 효과를 가져왔다하나는 노하우 자체의 후대 전승이다다른 하나는 그 가문의 후손을 제대로 교육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만일 이런 기록이 없었다면 최부잣집 300년 성공의 결정적 비밀인 교육은 성공하지 못하거나 덜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5.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마지막 승부일제와 해방 이후 격동기에 가문은 역사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과 대학 설립 자금으로 모두 돌린다. 300년 부를 마지막으로 자신과 가문이 아닌 민족을 위해 던진 뒤 깨끗하게 부자가문에서 내려온 것이다.

 

 

전재산을 털어 대학 세워

경주 최부잣집은 어떻게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먼저 전진문 박사의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중심으로 가문의 역사를 재구성해보자.

최부잣집은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에 속한다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 다시 참전했다마량첨사가덕첨사를 거쳐 경흥부사통정대부가 됐다병자호란 때 적군과 싸우다 순국했다그의 셋째아들 최동량이 집안을 경제적으로 일으킨다그 방식은 형산강 상류의 개울이 합쳐지는 개울가에 뚝을 쌓아 대대적으로 조성한 농토에 소작인과 소출을 반반씩 나누는 병작제를 적용하는 것이었다소작인들이 선호하는 선진적인 이 병작제의 적용으로 마을 사람들이나 노비들은 적극적으로 최씨네 땅 개간에 협력했다농토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다나아가 집안사람들은 스스로 농사일에 앞장서는가 하면 사람의 똥이나 오줌을 이용한 비료법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소출을 높였다이와 함께 이앙법을 도입해 적은 인원으로 넓은 논을 경작하는 것도 가능하게 했다그 결과 3대인 최국선에 이르면 가문은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대지주 가문으로 성장한다집안은 대대로 근검절약을 근본으로 삼되 가난한 이와 손님들을 후대했으며지나치게 재산을 늘리지 않았다가훈에 따른 선행으로 가문은 동학혁명이나 다른 민란 때도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일제에 나라를 배앗긴 뒤 최진립의 11대손인 최준은 독립운동 단체에 참가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에 독립군 자금을 지속적으로 보냈다이런 과정에서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해방 뒤 최준은 대학을 설립해 국가를 이끌고 갈 인재를 양성한다는 인생의 목표를 위해 전재산을 털어 대구대학과 계림대학을 세운다(두 대학이 합해져 영남대학이 된다). 경주 최부잣집 300년의 부는 이렇게 해서 사실상 모두 교육사업으로 승화돼 돌아간다.” 

경주 최부잣집은 그 역사적 전통만큼이나 가훈으로도 유명하다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생성된 가훈은 그만큼 절절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효과와 교육적 효과도 높았다. 6개조로 이뤄진 가훈을 한번 보자.

1. 과거를 보되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이 가훈은 파시조인 정무공 최진립의 유훈에서 비롯됐다임진왜란정유재란병자호란의 외침 때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참전한 최진립은 그러나 병자호란 때 억울하게 귀양을 간 적이 있다이때의 뼈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당부한다. “사람이 왕후장상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권세와 부귀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권세의 자리에 있음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아 언제 자신의 칼에 베일지 모르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상민으로선 부나 가문을 일구기 어렵다고 보고 진사까지만 하도록 한 것이다여기에는 교육을 받지 않으면 부나 가문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과거를 보되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2. 재산은 1만석 이상을 지니지 마라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후손은 부에의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정신수양에 더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나아가 경제적으로도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소작률을 낮추는 등 저절로 부의 혜택이 가문 밖으로 자연스럽게 널리 퍼져나가게 된다.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인심을 얻고 선행을 널리 베풀라는 원칙의 구체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중요한 것은 부의 획득에서 남의 불행을 악용하지 않는다는 근본주의적 태도이다이웃과 함께 가지 않는 삶은 오래가지 않고 무너진다는 철학을 신봉하지 않으면 나오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5. 며느리들은 사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근검절약이 만사의 기본이라는 철학을 이보다 구체적인 표현으로 가르치기는 어렵다이렇게 교육받은 살림의 주체들은 자연히 낭비나 실패가 적다나아가 그런 환경 속에서야 제대로 된 후손의 경제교육인간교육도 나올 수 있다이 한 가지 구체적 가르침이 실로 300년 부의 기초가 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인심을 잃으면 부자 가문은 죽는다사람이 없으면 부는 생성될 수조차 없다사성파 2대조 최동량도 마을 사람과 이웃 동네 사람들노비들이라는 노동력이 없었다면 그 넓은 농토를 새로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나아가 인심을 잃었다면 그 숱한 변란의 세월 가문은 여러 번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실제로 11대조 최현식 때에 가문은 활빈당의 무장 공격을 받았지만 누대에 걸친 선행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이런 두 가지 물음을 상상해본다.

1)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부자들을 되살려서 앞으로 100년간 가문 경쟁을 시킨다면 누가 가장 성공적일까?

2) 그 부자들을 되살려서 앞으로 500년간 가문 경쟁을 시킨다면 누가 가장 성공적일까?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선 많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로스차일드엘리자베스록펠러빌 게이츠그러나 두 번째 물음에선 당연히 경주 최부잣집이 메달 후보에 들어가지 않을까?

존경받는 부를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경주 최부잣집은 제대로 된 부자의 길을 비춰주는 희망의 빛으로 우리 곁에 돌아와 있다.

 

   경주 최부자집 고택방문하여

 경주 최부자집을 방문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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