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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설날의 미역국
작성자 관리자 [2026-08-12 10: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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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2회 수필 공모 당선작
설날의 미역국
  /박선남

 


 

 


지난해 설날 아침이었다. 온세상이 새해의 서기를 받아 하얗게 빛나던 그 날은 오롯이 나만을 위한 축제의 날이기도 했다.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인 설 날이 바로 내 생일인 까닭이다. 내 나이 벌써 일흔 중반을 넘어서고 있지만 온 천지가 함게 깨어나는 설날에 맞는 생일은 언제나 묘한 고양감을 주곤했다. 내가 태어날 즈음에는 시대의 공기가 그랬다. 남아선호 사상이 칼날처럼 서슬 퍼렇던 시절인데. 하필이면 집안의 가장 큰 명절인 설날 아침에 여자 아이가 태어났으니 온 동네가 수군거렸다. "명절 아침부터 계집아이가 머리를 디밀었다" 라며 부정을 탔다고 대놓고 혀를 차는 어른도 있었다. 어머니는 동네 사람들의 눈총을 피해 안방 문 앞에 해진 치마를 깔아두고서야 겨우 숨죽여 차례를 지낼 수 있었다. 그런 서러움이 내내 미안해서였을까. 어머니는 매년 설날 아침이면 온 가족이 먹는 떡국 상과는 별개로, 차례상 구석 한쪽에 작은 미역국 그릇을 몰래 올려놓으며 나의 외로운 생일상을 눈물겹게 챙겨주시곤 했다.

세월이 흘러 세상은 참 좋아졌다. 명절이 생일인 덕분에 객지로 나간 자식들을 불러 모을 핑계가 아주 자연스러웠다. 출가한 딸들은 엄마 생신이라는 든든한 방패막이를 삼아 시댁 눈치 보지 않고 친정 걸음을 서두를 수 있었고, 직장에 다니는 아들이나 사위들도 특별한 휴가를 내지 않고 한자리에 모일 수 있으니 말이다. 자식과 손주들이 거실을 가득 채우고 아들딸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명절날이면, 나는 내 설날 생일이 은근히 편안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난해 설날을 내 생애 가장 기이하고도 서글픈 생일맞이가 되고 말았다. 아침 식사를 무사히 마치고, 아이들이 정성껏 준비한 케이크에 불을 붙였다. 거실 가득 환한 불빛이 번지고 손주들의 서툰 생일 축하 노래가 메아리치며 초불을 막 끄려던 참이었다. 식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부산에 사는 사촌 여동생이었다. 반갑게 전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귀를 찢는 듯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언니! 큰일 났어 .. 기순이가, 기순이가 지금 심정지가 와서 119에 실려갔대. 언니 어떡해!" 달콤한 케이크 냄새로 가득했턴 거실이 순간 얼음물이라도 끼없은 듯 차갑게 얼어붙었다. 기순이는 가까운 군산에서 홀로 외롭게 살아가던, 생각하면 늘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 오던 내 사촌 남동생이었다. 작은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소년 시절부터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며 험한 세상을 온몸으로 버텨 내야 했던 안쓰러운 아이였다. 짧디짧은 인생을 그저 힘들고 헐벗게만 살다 간 그 동생의 이름이 날카로운 비수처럼 내 생일날 아침을 찔러왔다. 전화를 붙잡고 멍해진 내 시선 너머로, 수십 년 전 우리 어머니의 한 맺힌 얼굴 이 환영처럼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장손이었던 아버지는 딸만 둘을 두었다.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어머니가 낳은 마지막 아이마저 또다시 여동생이자, 집안의 공기는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어머니는 핏덩이를 낳고도 미역국 한사발 제대로 얻어먹지 못한 채, 마루 끝에 쪼그리고 앉아 서럽게 울고 계셨다. 방 안 윗목에서는 축복받지 못한 내 여동생이 앙앙거리며 거친 발길질로 벽을 차대며 울어댔다. 어머니는 아들을 낳지 못한 죄인이 되어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반편, 작은어머니는 내리 딸만 넷을 낳다가 다섯 번째에 마침내 그 애, 기순이를 낳았다. 아들이 없어 밤마다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던 우리 어머니는 작은집의 득남 소식에 제일처럼 기뻐하셨 다. 그리고 무슨 확신이 있으셨는지. 작은어머니께 극진한 정성을 쏟으며 조심스럽게 속내를 꺼내 놓으셨다. 큰집의 대가 끊기게 생겼으니 기순이를 우리 집 양자로 들여 장손으로 키우게 해달라는 눈물 어린 애원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거절이었다. "내 새끼를 뉘 집 장손으로 주란 말이오!'' 작은어머니의 그 서슬 퍼런 외침은 아들 못 낳는 동서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모욕이었다. "나도 아들 하나만 낳았으면 이런 대접은 안 받았을 텐데 .." 어머니는 방바닥을 굵으며 밤새 서럽게 울부짖었다 기순이만 내게 보내주면 돈은 없어도 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남부럽지 않게 대학 공부까지 가르치겠다며 사정하시던 어머니의 애달픈 목소리가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내 귓가에 쟁쟁하게 살아났다. 끝내 양자를 들이지 못한 어머니는 깊은 한숨과 가슴속 화병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마셨다. 그 시절 가부장제가 남긴 시대적 아픔이자 외면할 수 없는 굴레였다. 하지만 나하고 나이 차이도 많은, 아직은 세상 조명을 더 받아야 할 아까운 나이에 황망히 가버린 동생의 비보는 나를 아주 어릴 적 그 슬픈 기억의 골목으로 사정없이 내몰았다. 군산 장례식장, 동생의 영정 사진 앞에 주저앉았을 때 내 안에서 터져 나온 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어머니의 지독한 한恨이었고, 모질게 살다 간 한 인간에 대한 가여움이었으며, 끝내 채워지지 못한 가족사라는 뒤틀린 운명을 항한 통곡이었다.

왜 하필이면 누나의 생일날 아침이었을까. 자신이 태어났을 때 그토록 서럽게 울었던 큰어머니의 딸, 그 누나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웃고 있어야 할 생일날 아침에 남동생은 왜 숨을 거두어야 했을까. 나와 그 동생 사이에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운명의 곡선이 지독하게 얽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폭풍처럼 가난했던 나의 지난 삶이 한꺼번에 밀려와 긴 밤을 하얗게 지새우기도 했다.
문득 깨닫는다. 동생은 어쩌면 제 태생을 그토록 기뻐하고 갈망했던 큰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 어머니가 남겨둔 분신 같은 누나의 생일 날을 받아 쥐고 떠난 것은 아닐까 하는 .아련한 통찰이 스쳤다. 생生의 환희를 노래하는 날에 찾아온 사死의 어두운 그림자는 비극이 아니라, 어쩌면 수 십 년 전 풀리지 못했던 우리 어머니와 그 동생의 해묵은 인연을 내 대代에 이르러 온전히 껴안으라는 하늘의 묵직한 숙제일지도 몰랐다.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가는 날은 정해진 기약이 없다지만, 동생은 마지막 숨을 누나의 가장 환한 날에 보태며 비로소 이 지독한 가족사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이리라. 나는 먼저 앞장서 저세상으로 걸어간 가엾은 남동생의 영혼 앞에 따스한 향 한 대를 피워 올리며, 어머니를 대신해 거룩한 용서와 명복을 빌어주었다.
이제 내 설날 생일상에는 차례상 밑 몰래 숨겨지던 해묵은 미역국 대신 동생의 고단했던 영혼을 품어 안는 고요한 기도 한 자락이 기어이 함께 놓이게 될 것이다. 나의 생일은 이제 나 혼자만의 축제가 아니라, 먼저 간 이 들의 숨결을 한데 모아 살아내는 숭고한 기억의 자리가 되었다. 거실 창밖으로 눈부신 새해의 햇살이, 상처 입은 등 뒤를 어루만지듯 가만히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