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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경사강의(經史講義) [ 전성유(全性有) ]
작성자 관리자 [2020-04-22 16:3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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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전서 제111/ 경사강의(經史講義) 48 강목(綱目) 2

 

[한 고조(漢高祖)]

선유(先儒)가 말하기를, “삼대(三代) 이후로 오직 한() 나라만이 천하를 바르게 얻었다. 무도한 진() 나라를 벌한 것이 첫째요, 항적(項籍)의 죄를 친 것이 둘째요, 천하가 평정된 다음 비로소 제위(帝位)에 오른 것이 셋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점이 있다. 무도한 진 나라를 벌하였다고 말하지만, 함곡관(函谷關)을 공격하여 함양(咸陽)을 도륙하고 자영(子嬰)을 죽이고 여산(驪山)의 무덤을 파헤친 것은 항우(項羽)이지, 한 나라는 거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어찌 진 나라를 벌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항적의 죄를 쳤다고 말하지만, 의제(義帝)가 죽었을 때 삼로(三老) 동공(董公)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상복을 입고 초() 나라를 쳤으며, 수수(濉水)를 건너던 날에는 재물을 탐하고 술을 진탕 마셔 제후들이 다시 배반하여 초 나라에 의해 피를 흘렸다. 그러다가 범증(范增)이 죽고 용저(龍且)가 달아나는 바람에 초 나라가 크게 군색해져 홍구(鴻溝)를 떼어 주고 화친을 청하자 그 토지를 이롭게 여겨 포위를 풀고 서쪽으로 돌아갔다. 더구나 항우가 죽어 초 나라 땅이 다 평정되었으면, 마땅히 먼저 의제의 영혼에 고하고 의제의 시호를 올려서 천하 후세에 복수하고 설욕한 의리를 밝혔어야 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산하(山河)를 나누어 제후를 봉하고 즉시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말한다면, 한 고조(漢高祖)가 항우를 친 뜻은 천하에 있었던 것이지, 의제에게 있던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데도 항적의 죄를 쳤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관중(關中)에 들어간 이듬해에는 먼저 종묘 사직부터 세웠으니, 한 고조가 스스로 왕이 되려 한 마음은 이미 의제 병신년에 드러난 셈이다. 그런데 지금 천하가 평정된 다음 비로소 제위에 올랐다고 말하는 것은 과연 무엇에 근거한 말인가? 그렇다면 삼대 이후로 한 나라만이 천하를 바르게 얻었다고 하는 말이 한 고조의 마음을 아는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선유의 말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지금 하나하나 추론할 수 있겠는가?

 

[진사 홍백순(洪百淳)이 대답하였다.]

선유가 삼대 이후라고 한 말은 한 나라를 삼대에 비견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위()와 진()이 사람들을 속이고 임금을 칭한 일이라든지 당()과 송()이 양위(讓位)를 가탁한 일에 비하면 확실히 한 수 나은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무도한 진 나라를 쳤다고 한 말은, 자영을 죽이지 않고 약법 삼장으로 백성을 위로하고 죄를 친 뜻이 다소 있기 때문입니다. ‘항적의 죄를 쳤다고 말한 것은 상복을 입고 죄를 따진 일이 비록 동공의 말을 듣고 한 것이기는 해도 또한 천하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을 만한 점이 있으며, 홍구의 화친은 태공(太公)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니, 전적으로 그 토지를 이롭게 여겨서 한 일이라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천하가 평정된 다음 비로소 제위에 올랐다고 한 말은, 대개 한 고조가 수립한 것이 굉장하여 초야의 간웅(姦雄)처럼 악착스럽고 바삐 서두르는 행동을 하려 하지 않았음을 언급한 것입니다. 종묘를 먼저 세운 일을 가지고 천하를 바르게 얻지 못하였다는 증거로 삼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천하의 일은 형세에 달려 있고 천하의 형세는 도읍을 정하는 데에 달려 있다. 인륜을 세우고 법도를 베푸는 일이 도읍을 정하는 데에서 비롯되지 않음이 없으니, 윗사람의 자문과 아랫사람의 계획은 도읍을 정하는 일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다. 그런데 서경(西京)200년 제업이 누경(婁敬)의 한마디 말에서 이루어졌으니, 누경의 말이 아니었다면 낙양(洛陽)에서 머물고 말았겠는가?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은 괴이할 것이 없으나, 유후(留侯)의 밝음으로도 상()이 묻기를 기다렸는가? 장량(張良)이 한() 나라를 섬김에 있어서는 모두 그런 방법을 사용하였으니, 다른 사람을 인하여 말하기도 하였고 상의 질문을 인하기도 하였다. 형세에 따라 순조롭게 인도하면서 절대 부담을 갖지 않았는데, 그것은 스스로 한() 나라의 옛 신하로서 한() 나라에 떠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아니면 한제(漢帝)의 규모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이 말이 시행되고 일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는가? 자방(子房)을 깊이 알기로는 정자(程子)만 한 이가 없다. 이것이 능히 한 고조(漢高祖)에게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방법이었는가? 알 수가 없다.

 

[생원 구후영(具厚榮)이 대답하였다.]

한 고조가 어찌 관중(關中)의 형세가 낙양에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겠습니까. 그런데도 처음에 낙양에 도읍을 정한 것은 궁실이 불타 없어져 우선 낙양으로 정한 것일 뿐입니다. 누경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한 나라의 도읍은 결국 관중으로 정해졌을 것입니다. 유후로 말하자면, 스스로 기려(羈旅)의 신하라고 생각하여 모든 일에 한 걸음 물러나 명리(名利)의 자리에서 스스로 빠져나온 사람이니, 그가 잠자코 있었던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가령 누경이 말을 하지 않아 끝내 낙양으로 도읍을 삼으려고 하였다면, 지혜로운 유후가 어찌 한마디 말로 임금을 깨우쳐 주지 않고 앉아서 그 득실을 보고만 있었겠습니까.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자방(子房)의 본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나라를 위하고 한() 나라에서 벼슬하려 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잔도(棧道)를 불태운 일을 한왕(漢王)이 동쪽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려 한 것이다라고 한 말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자방은 유() 땅에서 서로 만난 이후로 한 고조(漢高祖)와의 관계가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취국(就國)의 즈음을 당하여 또 한() 나라로 돌려보냈었으니, 한 고조의 장량에 대한 대우가 또한 후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장량이 겉으로는 한 고조를 위하여 획책을 하면서 속으로는 한 고조를 수폐(囚閉)시키려는 계획을 하였다면, 어디에 유자(儒者)의 기상이 있겠는가? 장량이 한()을 떠나 한()으로 돌아갔던 것은 다만 그 고주(故主)에 대한 의리를 편 것일 뿐이었다. 어찌 한왕이 천하를 소유하게 될 것을 모르고, 한성(韓成)을 의지하여 중원을 다투고자 하였겠는가? 더구나 잔도는 끊어졌어도 후일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에 나올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도 아니니, 장량이 계획을 그렇게 졸렬하게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선유의 말은 의논할 만한 것이 없지 않다. 잔도를 불태운 한 가지 일은 무슨 뜻으로 보아야 자방의 본심을 알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생원 전성유(全性有)가 대답하였다.]

자방이 한왕을 권하여 잔도를 불태운 일은 겉으로는 한왕이 동쪽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뜻을 보이고, 안으로는 초() 나라 사람들이 서쪽을 방비하는 의심을 없앤 다음, 병력을 길러 옛 길로 나오게 하려고 한 것에 불과합니다. 한신(韓信)에게 촉()으로 들어가게 한 일을 보면, 자방의 본심을 알 수 있습니다 

() 9월은 곧 윤9월이다. 무엇 때문에 이라 하지 않고 로 칭한 것인가? 주가(註家)가 이르기를, “() 나라는 10월을 세수(歲首)로 삼고 윤달을 두어야 할 경우엔 모두 세밑에 두었는데, () 나라가 그대로 인습하여 고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말이 어떠한가? 살펴보면, 춘추()에도 나머지를 세밑으로 돌린다고 하였으니, 세밑에 윤달을 두는 것은 본래 옛 법이요, 진 나라에서 처음 만든 것이 아니다. 후세에서 이 법을 쓰지 않고 반드시 그때그때 윤달을 두는 것은 어째서인가?

 

[생원 송문회(宋文晦)가 대답하였다.]

기삭(氣朔)의 영허(盈虛)는 원래 일정한 숫자가 있고 성전(星躔)의 점후(占候)는 원래 일정한 법도가 있어서, 제때에 앞서 윤달을 두어도 안 되며 제때보다 나중에 윤달을 두어서도 안 됩니다. 어찌 일체를 확정하여 매양 9월에 윤달을 둘 수가 있겠습니까. 세밑에 윤달을 두는 것은 진 나라의 잘못된 제도인데, 한 나라가 초기에 인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9이라는 글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그때 윤달을 두는 법은 태초력(太初曆)에서 비로소 회복되었으니, 한 무제(漢武帝)의 공이 이에 크게 된 것입니다

사중(沙中)에서 서로 모여 앉아 한 말에 대한 대답은, 나는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고제(高帝)의 병통은 매양 그 신하를 지나치게 의심하는 데에 있다. 그가 비록 우연히 서로 말을 한 것이다고 말하였으나, 의심하는 빛이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이미 드러났다. 더군다나 모반(謀反)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제후에 봉하기를 권함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들을 진정시키기에 급급하여 먼저 옹치(雍齒)를 봉하였다고 할지라도, 공신을 주벌하려는 마음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굳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온공(溫公)선간(善諫)’이라는 논설은 이해할 수가 없다. 선간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그 말을 은미하고 완곡하게 하기도 하며 사정을 평이하게 말함으로써 임금의 심기를 평화롭게 하여 자연스럽게 타당한 조치를 취하게 하고, 이로 인해 내 말도 시행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어찌 남에게 모반의 죄를 씌우고 임금에게 의심의 단서를 제공한 것을 선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풍간(諷諫)이라고 할 수 없고 현간(顯諫)이라고도 할 수 없다. 혹시 그것은 별도의 주의(主意)가 있어서 후인들이 엿볼 수 있는 바가 아닌 것이 아니겠는가?

 

[유학 이도중(李度中)이 대답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그 말을 은미하거나 완곡하게 하였다면 고제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을 것이며, 사정을 평이하게 말하였다면 고제의 의심을 풀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반하고 있다는 말로써 먼저 고제의 마음을 움직이고 고제의 마음이 움직인 뒤에 작상(爵賞)이 지나치게 편벽되었음을 간한 것입니다. 자방(子房)이 어찌 남에게 모반의 죄를 억지로 씌우고 임금에게 망녕되이 의심의 단서를 제공하는 자이겠습니까. 온공의 선간이라는 논설은 실제로 자방의 마음을 제대로 안 것입니다.

장량(張良)과 진평(陳平)이 원공(元功)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의심할 만한 일이다. 진씨(陳氏)가 이르기를, “() 나라가 공신을 봉하는 약속에 군공(軍功)이 아니면 후()에 봉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바, 장량과 진평은 모두 유악(帷幄)에서 계획을 세우기만 하고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원공에 끼지 못한 것이다.”고 하였다. 이 말이 그럴듯하다. 다만 소하(蕭何)도 전쟁의 공이 없는데 원공에 참여하게 된 것은 어째서인가? 혹자가 이르기를, “자방(子房)은 한 나라에 벼슬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을 사양하고 자처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또 어떻게 진평을 논할 것인가?

 

[생원 어용항(魚用恒)이 대답하였다.]

한 나라가 공신을 봉하매 왕이 된 자가 8명이고 후가 된 자가 143명인데, 장량과 진평이 다 참여하였으니, 군공이 아니면 후에 봉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신은 감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원공 가운데 소하 이하의 여러 사람들은 모두 병사를 일으킬 때 따르던 사람들입니다. 유후(留侯)로 말하자면, 처음에는 초() 나라에서 유세했고 중간에는 한() 나라로 돌아갔으며, 맨 나중에 한() 나라를 따랐는데 또한 질병이 많아 정벌에 쫓아다닌 적이 적으며, 진평이 온 것도 패공(沛公) 5년 이후에 있었던 일입니다. 두 사람이 원훈(元勳)에 참여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진시황(秦始皇)이 장양왕(莊襄王)을 추존하여 태상황(太上皇)으로 삼은 것은 진() 나라가 황제를 칭하면서 시법(諡法)을 없앴기 때문에 장양왕을 추존하여 태상황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은 후세에서 추시(追諡)하는 일과 그 의리가 마찬가지이다. 고제(高帝)가 태공(太公)을 높여 진 나라에서 추존하였던 일을 의방하였고, 역대에서도 그대로 따라 고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유학 이종구(李鍾九)가 대답하였다.]

태상은 더 이상 위가 없고 더 이상 지극할 수 없다는 칭호이며, ‘은 임금입니다. 뜻의 아름다움이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므로 태상황으로 태공을 추존하여 표창한 것이니, 이것은 제왕(帝王)의 달효(達孝)입니다. 역대에서 그대로 따라 고치지 않아 마침내 제왕가의 전례가 되었으니, 진시황이 추존한 한 가지 일로써 의의(擬議)할 수 있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양자(揚子)가 두 유생(儒生)을 대신(大臣)으로 여긴 것은 두 유생의 쉽게 벼슬하려 하지 않은 의리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두 유생이 진실로 대신의 재능이 있었다면 어찌하여 벼슬하여 가슴에 쌓여 있는 바를 펴서 선왕(先王)의 전장(典章)을 진달하고 숙손(叔孫)의 비루함을 바루어서 한 시대의 정치를 보좌하지 않고, 더러운 것을 피하듯이 사양만 하여 큰일을 할 수 있는 때를 앉아서 놓쳤겠는가? 또 그의 말에, “예악(禮樂)은 반드시 1백 년 동안 덕을 쌓은 뒤에야 흥기한다.”고 한 말이 있다. 무릇 예악이란 국가에 있어서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1백 년 전에는 어찌 예악이 없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겠는가? 또한 두 유생은 단지 융통을 모르고 자신만을 지키는 선비여서 대신이란 칭호에 합당하지 않은 것인가?

 

[진사 서유림(徐有臨)이 대답하였다.]

() 나라 두 유생의 덕과 재능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단지 한 차례 숙손을 배척한 일 이외에는 그의 말이나 행동이 경전(經傳)에 보이는 것이 더없습니다. 또 그의 반드시 1백 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진실로 편벽된 견해를 면할 수 없습니다. 양웅(揚雄)이 대신으로 칭찬한 것은 단지 기이함을 좋아하는 논설일 뿐입니다

고제(高帝)가 사해를 평정한 다음 대풍가(大風歌)를 지어 호걸 영웅들을 구하고 군국(郡國)에 조서를 내려 숨은 선비들을 찾았으니, 급선무를 알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제() 나라에는 합공(蓋公)이 있고 초() 나라에는 설공(薛公)이 있으며 진() 나라에는 삼로(三老)가 있고 노() 나라에는 두 유생이 있었는데, 이들을 조정에 높이 올려 벼슬을 주었다는 말을 들을 수 없다. 또한 평원군(平原君)이나 신릉군(信陵君)의 시대와 거리가 멀지 않아서 그들의 유풍(遺風)과 여운(餘韻)이 발해(渤海)와 태산(泰山)의 사이에 입혀져 있었으며, 그들의 빈객으로 따르던 이들이 여전히 많이 있었는데, 거의가 쓸쓸히 대우를 받지 못하고 진희(陳豨)나 장오(張敖)에게 돌아가 한() 나라의 쓰임이 되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진사 이면승(李勉昇)이 대답하였다.]

고제의 현자를 구하는 조서와 대풍의 노래는 현자와 호걸이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일부러 한 것입니다. 이때에는 제업(帝業)이 막 시작되어 인심이 정해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의 무리를 다 처단하지 못하고 있음을 근심하고 있었는데, 하물며 맹사(猛士)를 사방으로 구하였겠습니까. 또 어찌 평소 유자(儒者)의 갓에다가 오줌을 누던 습관으로 망한 진 나라가 죽이고 난 나머지의 유생들을 거두려고 하였겠습니까. 다만 우선 사해의 인심을 수습하여 후사(後嗣)에 물려준 것일 뿐입니다. 제 나라ㆍ노 나라의 선비와 연 나라ㆍ조 나라의 무사는 본래 고제의 의중에 있지 않았으니, 그들이 쓰이고 쓰이지 않은 것은 논할 것이 없습니다.

이상은 한 고조(漢高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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