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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제현 [全濟鉉]
작성자 관리자 [2020-01-23 13:2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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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현(全濟鉉)장로 (오산고등학교 교장)

 

  

 

 

 

제현 오산고등학교 교장

 

(역경의 열매) [국민일보]1993-02-20 111538자 문화 기획, 연재

 

시골학교 선생님 꿈 보통장군”/소장예편후 은사로부터 오산고 교장 제의받아/“30여년간 군에서 잔뼈굵었는데거절불구 실현

 

예순네 번째 우수를 보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위대함을 새삼 느낀다. 흰머리가 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에 놀란다.

 

예편을 하면 산간벽지에 학교를 세우고 교사겸 사환겸 교장으로 일했으면 좋겠다

군에 재직중일 때에도 나는 이런 말을 종종 했다. 사단장 육군포병학교교장 제3사관학교장등을 두루 거치면서 나는 나름대로의 소박한 꿈을 갖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게 보통장군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832, 육군소장으로 예편한 나는 어느 기업체의 이사로 1년동안 재직한 적이 있었다. 그해 설날에는 오산학교 은사였던 김옥규선생님께 세배를 드리러 갔다. 김선생님과는 수십년동안 교제를 가져오고 있었다. 김선생님은 내게 이런 질문을 하셨다.

 

전장군, 지금은 무슨 일을 하고 있소?오산학교 교장을 한번 해보지 않겠소?

제가 어떻게 교장직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30여년간 군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

나는 한마디로 거절의 뜻을 밝혔다. 가르치는 일은 무척 좋아했지만 교장직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전장군, 곰곰이 한번 생각해보기 바라오. 이사장님께 말씀을 드려볼 생각이니 그리 아시오

김선생님은 제자인 내게도 항상 존대말을 사용하셨다. 이것이 바로 오산학교의 전통이었다. 내가 오산학교에 재학중일 때 선생님들은 모두 학생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으셨다.

 

청소년들도 인격체로서 존경을 받아야 한다.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오산학교를 설립한 남강 이승훈선생의 교육정신이었던 것이다. 함석헌선생도 이런 교육이념에 매료돼 오산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오산학교 이사회에서는 교장이 갖춰야 할 세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었다.

 

첫째 오산학교 출신일 것. 동창회나 이사회등과 화합하기 위해서는 오산출신의 교장이 적합했던 것이다.

 

둘째 기독교 신자일 것. 오산학교는 1910년부터 1923년까지는 분명히 기독교학교였으나 그 이후부터는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교육이 실시되지 않고 있었다.

 

셋째 가능하면 원래 오산학교가 자리하고 있던 정주출신의 인물일 것.

 

이 세가지 조건을 갖춘 사람을 이사회에서는 찾고 있었다. 당시의 이사장이 바로 조진석박사였다. 조박사는 영락교회 장로로서 김일성의 맹장수술을 담당했던 분으로도 유명하다.

 

김옥규선생님은 이사회에서 교장후보로 나를 강력하게 천거했다. 그러나 내가 과연 세가지의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가 문제였다.

 

원래 나는 오산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아니었다. 신의주동중을 다녔다. 학교에서는 모범생으로 칭찬을 들었으나 3학년 때부터 점점 빗나가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우리들에게 비행장청소를 비롯, 불필요한 일들을 너무 많이 시켰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벽지에서 국민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가족과 떨어져서 지냈기 때문에 자녀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는 없었다.

 

나는 3학년 때부터 학교를 그만두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안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냐. 네 태도를 용서할 수 없다

아버지는 대단히 화가 나셨다.  

전제현 오산고등학교 교장:2(역경의 열매)

[국민일보]1993-02-22 111483자 문화 기획, 연재

남강선생 설립 오산학교 졸업/주기철·한경직목사 등 수많은 교계지도자 배출/미 보병학교 유학중 침례기독 장교 회장 맡기도

 

학업을 중단한 죄로 아버지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오산학교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해보자. 그곳엔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이 계신다

아버지는 나를 오산학교 4학년으로 편입학시켰다. 그때가 1945년이었다. 만약 내가 신의주동중을 계속 다녔더라면 오산학교와는 영영 인연이 닿지 않았을 것이다.

 

오산학교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선생은 원래 기독인이 아니었다. 산정현교회 한석진목사의 설교에 감동돼 주님을 영접한 남강선생은 곧바로 학교내에 예배당을 건립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이제부터 오산학교는 기독교학교이다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민족적 지도자로 부각된 사람들중 기독교인이 유난히 많은 것을 간파한 일본은 오산학교에 대해서도 탄압을 하기 시작했다. 오산학교에는 조만식 유영모선생등이 재직하고 있던 시기였다.

 

오산학교는 1923년에 기독교학교라는 이름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래도 수많은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배출됐다. 순교자 주기철목사가 7, 한경직목사가 10회 졸업생으로 기록돼 있다.

 

나는 오산고등학교 교장이 갖춰야할 세가지 자격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고향은 정주였으며 오산학교를 졸업했고 교회에서는 이미 집사직분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나는 엄한 유교가정에서 태어났다. 오산학교에 다닐 때에도 기독교신앙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엉뚱하게도 미국이라는 낯선 나라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육군 중위이던 1952. 나는 미국의 육군보병학교에서 공부를 한적이 있었다. 그때 동석기목사가 학교안에 목조건물을 얻어 그곳에다 교회를 세웠다. 나는 친구들을 따라 그 교회에 출석했다. 2개월쯤 지나서 동목사님이 나를 불렀다.

 

전중위, 오늘은 나와 함께 가야할 곳이 있소

목사님은 나를 어느 교회로 데려가더니 그곳에서 침례식을 거행했다. 이 조그마한 사건 하나가 나를 변화시키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부대를 옮겨다닐 때마다 군인들은 새로 신상명세서를 작성해야 한다. 나는 종교란에 무엇을 쓸까 망설였다. 비록 미국에서 잠시 교회에 다닌 적은 있었으나 그 이후로는 교회출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내가 종교인인가. 무슨 종교를 써넣을까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머릿속에 퍼뜩 한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침례를 받을때에 목사님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는 기독교인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종교란에 조그마한 글씨로 기독교라고 써넣었다. 며칠 후 기독장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기독장교가 한사람 늘게 돼 반갑습니다. 기도회에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나 자신도 모르게 기독교인이 되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었으나 나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는 기독장교회 회장을 맡기도 했으나 여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숨겨져 있으리라곤 전혀 예상을 못했다.

 

오산고등학교 교장이 되기 위해서 일단 세가지 조건은 갖추었으나 이제 남은 것은 교육법상 교장의 자격을 갖추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3사관학교장 복무가 교장자격”/육군대학 총장 서원 새벽기도 불구 뜻밖의 인사/

 

 

그때는 서운했으나 3년 지난 뒤에야 감사 눈물

교육법상 교장이 되기 위해는 교감으로 3년 이상을 봉직했거나 교육행정직에 9년 이상 근무한 경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또는 교육대학장이나 전문대학장 경력이 있어야 했다.

 

30여 년간 군대생활을 해온 나로서는 어느 것 하나 해당사항이 없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다. 3사관학교 교장경력이 바로 전문대학장과 같은 경력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3사관학교는 내가 군 생활을 마감했던 곳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나는 광주포병학교장으로 근무했었다. 이미 소장으로 4년이 경과했기 때문에 남은 1년 동안에 진급이 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예편을 해야 하는 긴급한 상황이었다.

 

나는 군생활의 마지막을 육군대학에서 보내고 싶었다. 육군대학 총장이 되어 후배들에게 새로운 전술들을 전수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가 81년 겨울이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게 육군대학 총장직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저의 마지막 부탁입니다

40일 동안 군인교회의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했다. 한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이렇게 몰입해보기는 처음이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불가능이 없음을 믿습니다

육군 소장이 어김없이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을 보고서 하루는 군종병이 나를 찾아왔다.

 

장군님, 저희들에게도 기도제목을 좀 알려주십시오. 함께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다.

 

내 개인적인 문제일세. 뜻은 고맙지만 내 스스로 해결해야할 문제들일세

군종병의 호의는 고마웠지만 함부로 내 뜻을 밝힐 수는 없었다. 40일간의 새벽기도가 끝났을 때 군 인사이동이 있었다.

 

3사관학교장 전제현 소장

나는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육군대학총장직을 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를 드렸건만 제3사관학교라니. 하나님에 대해 서운한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외면하셨구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아내가 나를 위로했으나 아쉬움을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연단을 하시는지도 모르잖아요

, 더 좋은 것이 있다구?

그로부터 3년 후에야 나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고 감사기도를 드렸다.

 

육군대학총장직은 교육법상 교육경력으로 인정이 되지 않았다. 만약 나의 기도대로 육군대학에 갔더라면 나는 오산고등학교 교장이 될 자격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

 

19843. 오산고등학교 교장에 부임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데에는 분명히 뜻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 뜻이 무엇일까

나는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했다.

 

청소년들에게 저항감 없이 기독교 복음을 전하자.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다

이런 결심을 하고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복음 불씨로 오산고 전통 부활/창고로 사용하던 옥상교실 개조 예배실로 꾸며/월요일 직원조회 땐 기도시간·기독학생반 조직

 

오산고등학교 건물은 뫼산()모형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학교 전체를 두루 살펴 보았다.

 

맨 꼭대기 교실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문을 열어보았다. 놀랍게도 그 교실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었다.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교실을 깨끗하게 치워주십시오

이 교실은 오랫동안 방치해두어서 아무 쓸모가 없어요

나는 학교 관리를 담당하는 직원에게 거듭 강조했다.

 

이 교실이 내게는 꼭 필요합니다. 이 공간을 예배실 겸 기도실로 사용할 생각입니다

내 설명을 듣고서야 그는 교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한때는 기독교학교였던 오산학교가 지금은 기도실 하나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교사들이나 학생들에게 거부감을 주면서까지 기독교정신을 심어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내가 꼭대기교실을 예배당겸 기도실로 꾸며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영락교회 권사님 세분이 방문하셨다. 조의도 조의숙 김덕윤권사가 학교에 찾아와서 예배에 필요한 집기들을 선물해 주셨다. 순식간에 창고로 쓰이던 낡은 교실에 십자가와 성화가 걸리고 피아노와 강대상이 놓여졌다. 가장 지저분한 교실이 하루아침에 가장 거룩한 장소로 돌변한 것이다.

 

학교에 출근할 때면 제일 먼저 기도실을 들렀다.

 

하나님, 오산학교에 복음이 전해지게 하옵소서. 전교생이 함께 예배드리는 과거의 전통이 부활되게 하옵소서. 3년내에 교목을 모실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나는 매일 이런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이 기도는 너무나도 쉽게 응답이 됐다. 몇몇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기도실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기도실에는 아침마다 기도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도의 용사들을 보내주셨사오니 저들을 통해 복음이 활발하게 전해지게 하옵소서

학생들이 기도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너무나도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용기를 얻은 나는 직원회의를 할때 한가지 제안을 했다.

 

월요일 직원조회때에는 내가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기도이니 선생들께서도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결국 월요일 직원조회는 기도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전통이 수립됐다. 또 기독학생반이 조직돼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교목청빙을 위해 기도한지 1년만에 교목을 모시게 됐다. 교목은 학생들에게 철학과 성경을 병행해 가르쳤고 학교내 모든 행사들이 조금씩 예배와 유사한 형태로 변형이 됐다.

 

신입생환영예배 추수감사예배 성탄예배 부활절예배등 모든 행사의 뒤에는 예배란 말이 자연스럽게 붙여졌던 것이다. 모든 행사에는 반드시 교목의 기도나 설교가 삽입됨으로써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복음을 접하게 됐다. 기독학생반은 스스로 해야할 일들을 찾아나섰다.

 

점심시간을 이용, 학교를 돌며 쓰레기를 줍기로 했어요

기독학생반원들은 휴지줍기운동을 전개했다. 기독학생들의 수도 점점 늘기 시작했다

훈시 할때마다 꼭 말씀증거/형식서 벗어나 내용 충실한 신앙교육 주력 효과/오산학교출신 인연 이등병때 사관후보생 발탁학생뿐만 아니라 교사들도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겉으로 잘 드러내지는 않지만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교장으로서 훈화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이 시간이 바로 전도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인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학생들에게 부담없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무척 노력했다. 잘못하면 역반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학교 이사장이던 조진석박사에게 나는 이런 건의를 한적이 있었다.

 

오산학교도 기독교정신을 회복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학교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 어떨까요?

김일성의 맹장수술을 담당했던 의사인 조박사는 나의 제안에 대해 침묵을 지키셨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통해 침묵의 의미를 전해주었다.

 

갑작스럽게 기독교학교로 전환시키는데는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다. 현재도 기독교학교와 다름없는 운영을 하고 있는데 굳이 기독교학교라는 형식의 전환을 꾀할 필요가 있겠는가

조박사의 뜻을 알고서 나는 형식보다 내용에 치중한 신앙교육에 주력했다.

 

오산학교와 나의 인생은 정말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신의주동중에서 오산학교로 전학한 것은 물론이요, 졸업후에는 오산중학교부설 속성사범과에 입학해 3개월 교육을 받고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했었다.

 

그때 내 나이 열여덟이었다. 당시에는 거의 일본서적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한글이 서툰 교사들이 많았다. 나는 」 「이차돈의 사」 「상록수등의 책을 수없이 탐독했기 때문에 비교적 우리말과 글이 자유스러웠다. 나는 밤늦도록 학습자료들을 등사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주는등 최선을 다했다. 옥수수죽을 먹어가면서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이보다 더 보람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 한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교육에 최선을 다하자

마음속으로 수없이 이런 다짐을 했다. 이듬해에는 정주중학교 국어과 교사로 발령받았다. 공식직함은 중학교무자격교원이었다. 나는 박상준씨가 지은 문법교과서 한권을 밤늦도록 공부했다. 문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48년 식구들을 북쪽에 남겨두고 월남한 내가 제일 먼저 시작한 일도 충북 제천의 한 고등공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워낙 생활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나는 학생들과 벼베기 모내기등의 농삿일까지도 함께 했다.

 

6·25때에는 군에 자원입대해 이등병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중령 한사람이 나의 신상명세서를 겪어보고 호출했다.

 

전제현이등병, 오산학교 졸업했나?

나는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너는 사관후보생으로 선발됐다. 오산학교 출신이라면 믿을만하지

이렇게 해서 6주간의 특수훈련을 받게 됐다. 그리고 소위계급장을 달고서 소대장으로 전투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33년 군인생활의 출발점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전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곧바로 전장에 투입됐던 것이다.  

입대동기중 나만 별달아/군복무 내내 은총의 손길교육자로 거듭나게/전역 앞두고는 회개기도미움의 자리에 사랑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이 없었더라면 내 삶은 극도로 비참했을 것이다. 130여명의 입대동기중에서 장성이 된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6·25사변과 월남전을 치르면서 많은 동기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불구가 됐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서 교육계에 몸담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나에게 총탄을 피하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체력이나 지혜가 뛰어난 것도 아닌데. 오히려 남들보다 부족한 것이 훨씬 많은 나를 하나님께서는 붙잡아 주신 것이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편 1812)

소령시절에는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야간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했다. 고된 부대근무를 마치고 밤에는 학교수업을 계속하는 일이 어려웠다. 내 스스로의 부족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세가지의 인생 좌우명을 마음속 깊이 품게 됐다.

 

쉬지 않고 공부하자. 매사에 정성을 다하자. 무사 무욕의 마음을 갖자비록 이런 인생 좌우명을 그대로 실천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할 수는 있었다.

 

832. 327개월간의 군생활을 마감할 때에는 가슴 한편으로 서운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세상물정은 전혀 모르는데…」

며칠간 고통스러워하던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제 앞길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아버지만이 제게 위로자가 되십니다

그때에 마음속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네가 육군 준장이 됐을 때에 얼마나 기뻐했느냐?그리고 그때에 어떤 맹세를 했더냐?

당시 나는 더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했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하나님, 저의 교만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나는 회개의 기도를 드렸다. 회개기도를 드리고나자 지금까지 마음속에 품어왔던 증오와 불만이 눈녹듯 사라지는 것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미워하던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사실 대령시절에 군복을 벗어야할 위기가 있었다. 그때에 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 다시 아내는 내게 이런 충고를 했었다.

 

여보,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자학은 하지 마세요. 당신은 아직 건강할 뿐만 아니라 부하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어요. 순리에 따라야 합니다

당시 국민학생이던 둘째아들도 내게 편지를 보냈다.

 

이순신장군도 총사령관을 하다가 나중에 이등병이 됐습니다. 아버지께서 이렇게 쉽게 포기해선 안됩니다

아들의 편지를 받고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래서 다시 군생활을 시작했었다. 그대신 장군이 되겠다던 야망을 모두 버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모든 욕심을 버리자 뜻밖에도 꿈을 성취시켜 주셨다. 꿈에도 그리던 장군이 됐을 때 우리가족은 눈물로 감사예배를 드렸다

은혜속 33년 군생활 마감/부족한 내게 주신 큰사랑감사한 마음으로 전역/위로차 찾아온 부하 부부들에겐 신앙생활 권유북한에서 맨손으로 월남한 내가 장군이 된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다. 나는 사관학교 출신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것도 아니었다.

 

이제는 군복을 벗더라도 여한이 없다. 어떤 결과에도 하나님께 감사드리겠다

가족앞에서 나는 이렇게 선언했다. 그리고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장성들이 대거 전역해야 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나도 여기에 포함돼 327개월의 군생활을 마감해야했다. 공식석상에서 나는 지금까지의 삶을 인도해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고 고백했다.

 

장교부부 몇사람이 이튿날 우리집을 찾아왔다. 그들은 나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가정의 분위기가 매우 험악하리라고 예상하고서 그들은 성큼 방안으로 들어서지를 못하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와 아이들은 밝게 웃으며 그들을 안내했다. 우리 가정은 마치 축제분위기처럼 들떠있었던 것이다.

 

어서 들어오게

내가 밝은 모습으로 그들을 맞았다.

 

장군님의 환한 표정을 보며 저희가 위로를 받습니다. 저희는 장군님께서 군복을 벗게돼 감사하다고 하신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오는 것도 무척 망설였어요

그들도 금새 표정이 밝아지는 것이었다.

 

장군님, 감사의 비결이 뭡니까

나는 이런 질문이 나오기를 기대했었다. 전도의 기회가 바로 이 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내게 과분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네. 나는 여러 모로 장군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네. 하나님의 손길이 없었더라면 어림없는 일이지. 그러니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도 한번 신앙생활을 해보지 않겠나? 세상에는 인간의 힘으로 안되는 일이 매우 많다네

교회에서도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간증을 했었다. 마음속에 불평과 불만의 독버섯이 자라게 되면 자신도 괴로울뿐만 아니라 타인들에게도 고통을 주게 된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역한 후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난생 처음 시작해보는 사회생활이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 제가 이제 사회 초년병으로 출발합니다. 제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나보다도 아내의 기도가 더 간절했다. 군인의 아내로서 묵묵히 인내하고 아이들을 교육해온 아내가 고맙기만 했다.

 

83년부터 1년동안 대한중석에 근무했다. 그리고 오산고등학교 교장으로 이듬해 부임해온 것이었다.

 

나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교육방법을 갖고 있다. 군 현역시절 나는 반드시 출근때 아내와 12녀의 자녀들을 끌어안고 애정을 표현해 왔다. 이것은 수십년동안 계속해온 자녀교육법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학생들을 교육하고 싶은 것이 나의 소박한 꿈이었다.

 

장남이 결혼해 며느리를 맞았으나 나의 습관은 변하지 않았다. 며느리에게도 똑같은 방법으로 애정을 표현했다. 처음에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서 당황해 했으나 지금은 익숙해져 있다.

 

나그네의 두꺼운 외투를 벗기는 것은 강풍이 아니라 따뜻한 햇빛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생활철학이기도 하다.

 

한번은 오산학교 학생들이 머리를 짧게 깎으라는 명령에 반발, 집단으로 반대의 뜻을 표한적이 있었다. 학생들은 행동을 자제할줄 몰랐기 때문에 상식을 뛰어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과연 이 학생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문제학생 껴안고 눈물의 기도/“처벌만이 능사아니다애정갖고 잘못 깨닫게/모범생돼 교회출석 소식 들을땐 감사와 보람나는 그 학생들에게 보호자와 함께 학교에 오도록 명령했다.

 

이번 기회에 엄한 조치를 내려서 다시는 이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직원 중에는 일벌백계로 학생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문제의 학생들과 보호자들이 함께 모인 곳에서 나는 기도를 드렸다. 만약 저 학생들에게 퇴학조치를 내린다면 문제청소년으로 전락할 것이 분명했다. 군대에서도 고등학교 중퇴자를 가장 꺼리지 않았던가.

 

사랑의 하나님. 저희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시작된 기도는 약 10분 동안이나 계속됐다. 그리고 내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울면서 기도를 드리자 여기저기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결국에는 그 자리가 울음바다로 변했다.

 

여러분들 모두 용서한다. 그러나 앞으로 이같은 일이 또 발생했을 때에는 소급되어 벌이 적용된다

학생들은 눈물을 후두둑 떨구며 용서를 빌었다. 하마터면 문제학생으로 전락할뻔 했던 그들은 모범생으로 변해서 무사히 학교를 졸업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나는 분명한 교육철학을 갖게 됐다.

 

기도는 학생교육에 있어서 최상의 방법이다. 또한 문제해결의 열쇠이다

문제학생들에게도 나는 꾸중대신 칭찬을 먼저 했다. 칭찬은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껴안으면서 깊은 애정을 표현한다. 상대방이 마음을 개방하면 편안한 상태에서 대화를 할 수 있다.

 

감사할줄 모르고 불평불만으로 가득찬 학생. 지나친 이기주의에 빠져 도무지 희생정신이 없는 학생. 이들을 데리고 장애인시설에 가서 하루쯤 봉사를 하게 하면 금새 삶이 변화게 된다.

 

교장선생님, 이제야 제가 얼마나 잘못된 습관에 사로잡혀 있었던가를 깨닫게 됐어요. 이제부터 새롭게 살아보겠어요

그들이 보내온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무한한 보람과 감사를 느낀다. 더구나 이 학생들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너무도 감사하다.

 

사랑의 하나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게 지혜를 주시옵소서. 진정으로 저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옵소서

한번은 한 학생이 나를 찾아와 가정형편을 모두 털어놓았다. 부모님은 사업에 실패해 뿔뿔이 흩어졌고 그 학생과 동생은 친척집에서 얹혀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도무지 세상살 맛이 나지 않는다면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지금 같아서는 공부 뿐만 아니라 인생을 포기하고 싶어요

너는 지금 고등학교 3학년이잖니. 공부는 계속해야 한다

아무리 그를 설득하려 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긴급처방을 내렸다. 그 학생의 손을 꼭 잡고서 기도를 드린 것이다.

 

하나님, 인간의 힘으로는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용기를 주시옵소서. 지혜를 주시옵소서…』

오랜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떠보니 그의 뺨에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교장선생님, 제 마음이 이제 평안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밝은 표정으로 교장실을 나갔던 그 학생이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방송국에 근무하고 있다. 몇해전에 그 제자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선생님의 기도를 잊을 수가 없어요. 저는 지금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모자간의 대화마련 큰 성과/신입생 대상 서로의 고민 등 털어놓고 사랑확인/“기도하는 어머니보며 자란 자녀 탈선없다강조나는 오산고등학교 신입생과 학부모를 대상으로 편지를 통한 모자간의 대화라는 독특한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어머니와 학생이 한자리에 앉아 개인적 고민, 가정과 학교생활, 진로등에 관해 심도있는 대화를 나누고 강의를 듣는다. 또 생각하고 느낀바를 편지로 교환하고 대화함으로써 갈등을 해소하고 이해를 촉진시키며 가족간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모자간의 대화91년에 시험적으로 실시해 보았으나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92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정착시켰다. 이 행사의 말미에는 기도문쓰기라는 것이 있다. 모자가 각각 기도문을 써서 서로에게 읽어준후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다. 어떤 어머니들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한 어머니는 기도를 마치고 내게 이런 고백을 했다.

 

지금껏 자녀를 나의 소유물로만 알았어요. 자녀의 인생은 내가 원하는대로 전개돼야 한다고 생각해 왔어요. 이것이 얼마나 큰 교만인가를 이제 깨달았습니다

참석자 전원이 손을 잡고 둘러서서 기도하고 노래한후 함께 포옹하는 것이 이 행사의 절정이다.

 

대화없는 가정에서 자란 청소년들이 탈선하기 쉽습니다. 어머니 여러분들이 자녀들의 좋은 말벗이 되어 주십시오. 어머니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자녀들은 결코 탈선하지 않습니다

나 역시 자녀들에게 나름대로 독특한 교육을 시켜왔다. 가정교육의 대부분은 아내의 몫이었으나 분명한 원칙은 내가 세웠다.

 

의타심을 가져선 안된다. 정정당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아들에게 항상 들려준 말이었다.

 

시집갈 때 혼수감을 마련해갈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라. 부모는 단지 네가 결혼하기 전까지 보호하고 교육시켜줄 뿐이다

어렸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 말을 듣고 자란 딸은 결혼할때 조금도 서운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많은 혼수를 준비하는 친구들을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자녀들이 이처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일찍부터 신앙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교회학교 생활이 저들의 삶을 지탱해주었던 것이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을것 같으나 사실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만큼 중요합니다. 문제학생들을 교회로 인도해 보십시오

문제학생때문에 고통을 호소해온 한 교사에게 나는 이런 충고를 했었다. 교회학교의 아련한 추억을 잊지못해 인생의 황혼녘에 교회를 찾은 사람들을 나는 많이 보아왔다. 신앙을 떠나 살다가 어느날 문득 삶의 공허함을 깨닫고 회개의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왔었다. 인간에겐 누구에게나 귀소본능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이것을 신앙의 귀소본능라고 생각한다.

 

교회학교생활을 체험한 사람들은 언젠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나의 주장이다.

 

198412월에는 남강문화재단이 창립됐다. 오산학교의 설립자인 남강 이승훈선생의 뜻을 오늘에 되살려 교육의 현장에서 헌신적인 삶을 살아오고 있는 분들을 발굴해내자는데 그 뜻이 있었다

믿음의 제자 양성은혜에 감사”/용서로 퇴학면한 학생들 운동장서 나에게 큰 절/어려운 여건속 남강문화재단 설립도 하나님 몫처음에는 재단설립이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됐다. 그러나 오산학교 동문들이 십시일반으로 기금을 조성했다. 함석헌선생은 자신의 유일한 재산이던 주택을 고스란히 남강문화재단설립기금으로 희사했다.

 

불가능으로만 여겨지던 문화재단의 설립이 가시화되면서 각계의 도움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사업에 동참할 뜻을 전해온 것이다. 남강문화재단의 설립은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화재단에서 교육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는데 후보자및 수상자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전국의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많아지게 하옵소서

나는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학교에서 업무를 시작하기에 앞서 기도실에 들어가서도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고난도 더이상 고난이 아닙니다

아내 박찬홍권사는 내게 끊임없이 신앙의 격려를 해주었다.

 

33년여를 군대에서 생활하다가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나로서는 사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두렵기만 했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인재들을 양성해내는 교육기관에서 일하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몇년전 스승의 날행사가 있던 그날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몇몇 학생들이 나를 운동장 한편으로 안내를 했다.

 

선생님, 절 받으십시오

그들은 학교에서 소위 문제학생으로 낙인찍혀 하마터면 학업을 중단할뻔 했던 학생들이었다. 2학년때 퇴학을 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그후부터는 아무 문제가 없이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선생님의 용서와 이해가 없으셨다면 저희들은 아마 학교생활을 계속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스승의 날을 맞아 다시한번 교장선생님께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내게 꽃다발을 전해준후, 번쩍 나를 들어올려서 헹가래를 치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신앙인이 아니었더라면 그때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나는 그 학생들을 향해 이런 말을 했었다.

 

너희들은 소위 일류대학에 진학할 만큼의 실력은 갖추지 못했다. 그러나 일류대 출신들을 부하직원으로 둘 수는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정진하라

학생들과의 만남이 내겐 커다란 기쁨이다. 중장으로 진급을 못하고 예편을 했을때에는 마음 한구석에 서운한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 앞길을 미리 예비해 놓으셨다. 아무리 인간이 현명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를 예측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새록새록 느껴진다. 좀더 일찍 신앙생활을 했더라면 내 삶이 훨씬 더 풍요로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서울 보광동에 위치한 오산고등학교. 어떤 분들은 학교의 소재지를 물어오기도 했다. 어떤 분들은 역경의 열매를 통해 신앙의 도전을 받았다는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하나님, 저를 복음전파의 도구로 사용해 주시옵소서<정리=임한창기자

[출처]전제현 오산고등학교 교장 -역경의 열매|작성자상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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