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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덕기[ 全德基 ]
작성자 관리자 [2020-01-23 11:2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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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덕기[ 全德基 ] 

전덕기(1875-1914). 독립운동가.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었다.

출    생 : 1875년(고종 12) ~ 1914년사망 

출 신 지 : 서울특별시

관련사건: 신민회사건

대표관직(경력): 상동교회 목사

 

전덕기 목사의 삶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걸인, 가난한 자,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천대받는 자을 진심으로 도와주고 봉사한 생애였다. 겨우 1.3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3.1운동 참여도 그 연장선에 있다.

기독교와 독립운동은 떼래야 뗄 수 없을 만큼 깊이 물려 있다. 1919년 3.1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민족대표 중 16명이 목사이거나 장로였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졌다. 3.1운동 과정에서 ‘주동자’ 혐의로 체포된 사람들 가운데 4분의 1인 약 2천여 명이 기독교인이었다니, 당시 전체 인구 중 1.3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던 기독교인의 수에 비해 엄청난 활약이었다. 이것 말고도 기독교와 독립운동 사이의 이음새를 보여주는 객관적 수치는 많이 있다. 그리고 그 통계 안에는 한 편 한 편의 곱씹을 만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1. 3.1운동의 주동자

3.1운동의 ‘주동자’는 33인 민족대표만이 아니었다. 양반과 상놈, 여자와 남자, 어린아이와 노인이 모두 거리로 나와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선언서를 돌렸다. 만세시위는 서울과 평양을 시작으로 삽시간에 전국에 전파됐다. 고종의 죽음, 계속되는 식량난 등으로 일본 통치의 악랄함을 피부로 느낀 이들이 자주독립의 열망을 불태운 것이다. 그야말로 전국적 대중시위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사회도 아니었고, 휴대폰도 없는 시절이었기에 모든 지방이 동시다발적으로 운동을 일으키기란 쉽지 않았다. 꼼꼼한 계획과 훈련받은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본이 당황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2. 전국적 네트워크, 교회

처음 3.1운동을 계획한 이들은 각 지역에 밀사들을 파견했다. 서북지방에는 선우혁이 밀파됐다. 그가 처음 만난 사람은 당시 서북 교계를 대표하던 길선주 목사였다. 선우혁은 길선주 목사에게 3.1운동의 계획과 의미를 설명했고, 전국적 시위운동에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길 목사를 비롯한 양전백 목사, 이승훈 장로는 쾌히 승낙하고 같은 지방 기독교계 중견 지도자들을 연결해주기까지 했다. 소개받은 이들은 변인서, 김도삼, 도인권 등으로 현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젊은 일꾼들이었다.

 

다른 지역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식으로 여러 지방의 지도자, 연락망, 조직 등을 갖춘 것이 3.1운동을 가능케 만들었다. 당시 교회는 일본의 눈을 피해 시위를 계획하는 장소로, 각 지방과의 연결을 통한 연락망으로, 만세 시위에 기꺼이 뛰어들 교인들이 모인 곳으로서 기능했다. 교회에서 교육받은 청년들은 시골 고향으로 돌아가 시위를 주도하는 주동자가 되었다. 3.1운동의 전국적 확산 뒤에는, 이들 ‘이름 없는 주동자’들의 발품이 있었던 것이다.

여성들의 역할도 두드러졌다. 선언서의 전달, 인쇄, 태극기 제작뿐만 아니라 직접 만세 시위운동의 주동자가 되기도 했다.

 

3. 왜 ‘전덕기 목사’인가?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은 훗날 ‘민족 대표 33인 중 기독교계 인물로 어떤 인물이 가장 인상에 남았는가?’라는 질문에 “순 기독교 신자 인물로 전덕기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당시 상동교회의 목사로서 열렬한 신앙가요 동시에 애국자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덧붙여 최남선은 “나에게는 그의 감화가 제일 많다”고 덧붙였다.

왜 전덕기 목사였을까? 다소 생뚱맞은 답변이었다. 그는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도 아니었고, 3.1운동이 있기 5년 전인 1914년에 이미 병으로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언뜻 최남선의 속내가 보인다. 이덕주 감신대 교수는 전덕기 목사를 ‘민중 목회’를 실천한 목회자로 꼽는다. 그 자신이 민중 출신이었고, 남대문 시장바닥의 민중이 그의 전도와 목회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민중을 품는 전덕기 목사에게 감명 받은 이들은 그가 목회하는 상동교회에 자주 모였다. 주시경, 이동휘, 이시영, 이회영, 양기탁, 이준 등이 그들이었다. 일본의 침략 때문에 민족이 고난 받고 있다고 판단한 전덕기 목사는 교회 안에 엡웟청년회, 상동청년학원 등을 만들어 민족 운동을 전개했다. 김구도 엡웟 청년회의 오랜 회원이었다.

 

전덕기 목사는 나막신과 마른 쑥, 약식 관 이 세 가지를 항상 상비하고 있었는데, 이는 연고지가 없는 가난한 이들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함이었다. 부패한 시체에서 나온 체액 위를 걷느라 나막신을 신었고, 악취를 참기 위해 마른 쑥으로 코를 막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민중’을 떠나지 않은 그의 목회에, 남대문 시장의 상인들은 물론 기생과 걸인들까지 “우리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우리 손으로 모시겠다”며 상여꾼으로 나섰다.

 

그의 삶은 예수의 가르침대로 걸인들, 가난한 자,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천대받는 사람들을 위해 진심으로 도와주고 봉사한 생애였다. 겨우 1.3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던 기독교인들의 적극적인 독립운동 참여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들의 만세 시위에는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코자 했던 예수의 마음이 담겨 있다. 최남선은 그 시작이 전덕기 목사의 삶에 있다고 본 것이다.

 

역사학자 김양선은 “피해는 컸지만 3.1운동을 계기로 기독교인들의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은 더욱 확고해졌고, 교회는 민족의 신뢰할 만한 봉사자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민족의, 혹은 민중의 신뢰할 만한 봉사자인가? 오는 3.1절이 한국 교회에 던지는 물음이다.

 

▶ 전덕기 목사의 어린시절 

서울 출신. 9세 때 어버이와 사별한 뒤 작은아버지의 집에서 자라났다. 1892년 스크랜톤(Scranton, M. F.) 선교사의 감화를 받아 1896년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尙洞敎會)에 입교하였다.

1896년 서재필(徐載弼)에 의하여 조직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이 협회의 핵심적 간부로 독립 운동가들과 친교를 두터이 하였다.

독립협회의 목적인 자주독립·자유민권사상과 자강개혁운동(自强改革運動)은 기독교복음의 내용과 일치함을 깨달았고, 그의 신앙은 자연스럽게 민족운동과 직결되었다.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에는 상동교회에서 스크랜톤을 도와 목회에 전념하였다. 1902년에는 감리교선교회에서 전도사 임명을 받고 본격적인 목회활동에 나섰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감리교청년회연합회(당시의 엡웰 청년회)를 소집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약체결에 협조한 을사오적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기 위하여 정순만과 더불어 평안도 출신 장사 수십 명을 서울에 불러들여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거사계획은 일본경찰에 의하여 저지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1907년에는 이준(李儁)과 더불어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거사계획을 성사시켰다.

같은 해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비밀결사 민족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는 데에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1904년 그가 상동교회 안에 세운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은 1907년부터 신민회의 교육기관이 되어 활발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감리교 연회(年會)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담임목사가 되면서 당시 상동교회를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드는 데 공헌하였다.

1912년 ‘105인사건’으로 불리는 ‘신민회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도 이 사건의 혐의를 받고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발병, 병보석이 되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상동교회 헤이그 밀라사건, 신민회(新民會) 창립 전덕기 목사 주도 

상동교회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수많은 인재들을 길렀다. 구한말 상동교회는 남학생과 여학생을 위한 초등학교인 공옥학교를 설립했다. 뒤이어 상동청년학원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청년운동 그룹이 형성된다. 이른바 ‘상동파’로 불리는 그룹 안에서 ‘헤이그 밀사사건’의 기획과 실천이 이뤄졌다. 그 중심에는 전덕기 목사가 있었다.

 

초기에는 스크랜턴의 지시와 도움을 받았지만 전덕기 목사의 활동은 점차 확대돼 독자적인 민족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경향은 상동교회 청년회가 결성되면서 본격화해 1905년 을사조약을 겪으면서 절정을 이른다. 전덕기 목사는 안창호 윤치호 등과 함께 1907년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만든다.

상동파는 또한 주시경 선생을 통해 민족운동의 차원으로 한글보급운동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전덕기 목사는 을사조약 이후 어깨에 도끼를 메고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시위하며 조약무효 상소운동을 벌였다. 그와 함께한 대표적 동지들이 백범 김구 최재학 이준 이동녕이다.

이때부터 전덕기와 상동파는 한국기독교 민족운동의 핵으로 떠오른다. 이동휘 노백린 안태국 남궁억 신채호 최광욱 차병수 이승훈 이상설 최남선 이상재 김진호 양기탁 주시경 이회영 유일선 이승만 등이다. 전덕기 목사에게 신앙과 민족은 하나였다. 스크랜턴 선교사가 표방했던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이라는 복음의 내용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감리교청년회연합회(당시의 엡웰 청년회)를 소집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을사조약 무효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약체결에 협조한 을사오적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기 위하여 정순만과 더불어 평안도 출신 장사 수십 명을 서울에 불러들여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 거사계획은 일본경찰에 의하여 저지되어 실패로 돌아갔다. 1907년에는 이준(李儁)과 더불어 상동교회 지하실에서 헤이그거사계획을 성사시켰다.

같은 해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비밀결사 민족독립운동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는 데에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1904년 그가 상동교회 안에 세운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은 1907년부터 신민회의 교육기관이 되어 활발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감리교 연회(年會)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담임목사가 되면서 당시 상동교회를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만드는 데 공헌하였다.

 

당시‘신민회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도 이 사건의 혐의를 받고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발병, 병보석이 되었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남대문 시장의 상인은 물론, 기생과 걸인들까지 통곡하며 상여꾼을 자청했으며 그 인파가 10리 밖까지 이여 졌다는 일화는 지금까지도 화자 된다. 전덕기 목사가 떠난 뒤에도 민족운동은 계속됐다. 1919년 3월1일 삼일운동을 주도한 민족 대표 33인중 최석모 오화영 이필주 신석구 4명이 상동교회 출신이다.

 

※ 참고문헌

「한말 신민회에 관한 연구」(이재순,『이대사원』14,1977)

『백범일지(白凡逸志)』

『일제하감리교회삼대성좌(日帝下監理敎會三大星座)』(송길섭, 성광문화사, 1982)

『상동교회구십년사(尙洞敎會九十年史)』(상동교회, 1980)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上』

『상동청년 전덕기(공옥출판사 2016)

[네이버 지식백과] 전덕기 [全德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한국의 역사교회― 상동교회] 헤이그 밀사사건·신민회 창립… 전덕기 목사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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