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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旌善君 全公 愃 神道碑銘 幷序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19:5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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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군 전선 신도비명 병서(旌善君 全公 愃 神道碑銘 幷序)

 

()의 휘()는 선()이요 성()은 전씨(全氏)이며 시조(始祖)의 휘()는 섭()으로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을 도움으로써 십제공신(十濟功臣)에 오르고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다.

 

환성군(歡城君)이 휘() 호익(虎翼)을 낳았으니 병상(兵相)에 올랐고 병상(兵相)은 휘() ()을 두시니 한()나라에 입조(入朝)하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이 되어 관서홍농후(關西弘農侯)에 봉해졌으며 대장군(大將軍)은 휘() 순성(舜成)을 낳으니 태부(太傅) 벼슬을 지냈고 태부(太傅)는 휘() 여균(汝均)을 낳고 여균(汝均)은 운교(雲喬)를 낳았으며 운교(雲喬)는 휘() 원근(元根)을 낳아 3세가 내리 상서(尙書)를 지냈다. 상서(尙書) 원근(元根)은 상서(尙書) 홍우(弘佑)의 따님 나씨(羅氏)에게 장가드니 곧 이 두 분이 공()의 부모님이시다.

 

가장(家狀)을 살펴보면 공은 당()나라 홍농(弘農)으로부터 대광공주(大光公主)를 모시고 신라(新羅)로 돌아와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짐으로써 본관(本貫)을 정선(旌善)으로 삼았다. 당사(唐史)를 두루 살펴보면 당()의 공주(公主)가 신라로 하가(下嫁 : 공주나 옹주가 귀족이나 신하에게로 시집가던 일)한 일이 없으니 공()이 모시고 돌아온 공주는 누구란 말인가?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신라 성덕왕(聖德王) 22(서기 723)에 당()에 사신(使臣)을 보내 포정(抱貞)과 정완(貞菀) 이녀(二女)를 바쳤는데 황제가 말하기를 두 여자 모두 왕의 고모(姑母)와 자매(姉妹)이니 짐()이 차마 그대로 머물게 할 수 없다 하고 후하게 대접해 돌려보냈다고 하는데 그 연대를 살펴보면 공()이 환국(還國)할 때이다. 왕의 고모와 자매를 보낼 때 공주라 칭한 것은 당시의 예()이므로 공()이 모시고 돌아온 분들이 과연 이분들이었던가. 공주를 모시고 돌아온 사신의 직책이라면 당연히 공()이 당()나라에 계실 때 작위(爵位)와 군호(君號)를 받아 그 이름이 맹부(盟府 : 공신과 그 자손을 대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에 있을 것인즉 신라에서도 반드시 공훈(功勳)이 있었음을 기록했을 터인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니 거듭 안타까울 따름이다.

 

배위(配位) 군부인(郡夫人) 내성신씨(奈城辛氏)는 부원군(府院君) ()의 따님으로 두 아들을 낳으니 장남(長男)은 방춘(方春)으로 삼사태상경(三司太常卿)을 지냈고 차남(次男)은 방경(方慶)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정원공신(定遠功臣) 정선부원군(旌善府院君)이 되었다. 방춘(方春)의 자() 경지(敬智)는 통직랑(通直郞)이요, 경지(敬智)의 자() 이민(而敏)은 이찬(伊飡)이며, 이민(而敏)의 자() ()은 예부시랑(禮部侍郞)에 시호(諡號)가 문간(文簡)이요, ()의 자() 억균(億均)은 사정(司正) 원윤(元尹)이고, 억균(億均)의 자() 천기(天奇)는 병부낭중(兵部郎中) 서서원박사(瑞書院博士)이다. 천기(天奇)도 두 아들을 낳으니 장남 우상(禹相)은 봉익대부(奉翊大夫) 광문학사(廣文學士), 차남 종도(宗道)는 승상(丞相)이다. 우상(禹相)의 장남은 이갑(以甲)으로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며 고려(高麗)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서 정선군(旌善君)이 되고 차남 의갑(義甲)의 시호(諡號)는 충강(忠康)이며 죽산군(竹山君)이요 종도(宗道)의 자() ()은 시호(諡號)가 충달(忠達)이며 천안군(天安君)으로 이 이후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이때부터 대대로 경상(卿相)이 이어지고 자손이 번창하여 드디어 동방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은 일찍이 채읍(采邑)으로 받은 정선(旌善)에서 높은 산에 올라 바라보니 채운(彩雲 : 여러 빛깔이 아롱져서 무늬가 있는 고운 구름)이 서남쪽 맥산(麥山)에서 일어 그 그늘이 덮개처럼 온 산을 덮으니 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수장지(壽藏地 : 묏자리)로 주신 것이라 하고 묘소(墓所)로 정하고 자손에게 유언(遺言)으로 이르기를 대대로 석문(石門) 안 양지촌(陽地村)에 살라하고 그 산을 서운산(瑞雲山)이라 이름지으니 동명(洞名)도 이로부터 나왔다. 구름이 일어난 곳을 가리켜 채운(彩雲)이라 하고 지팡이 짚고 머물던 곳을 쇄운봉(鎻雲峯)이라 이름지을 정도로 공()이 얼마나 이 산을 즐기셨는지 알만하다.

()은 을미(乙未, 서기 755) 915일 돌아가시니 정선군 남면 서운산(瑞雲山) 간좌원(艮坐原 : 동북쪽을 등진 방향)에 안장(安葬)하시고 군부인(郡夫人)의 묘()도 같은 자리에 모시었다.

 

오호라 세대가 점점 멀어짐에 따라 문헌(文獻)이 흩어지고 없어졌으니 그 후손들의 생각만으로 선대(先代)를 말하고자 한다면 어찌 그 끝이 있을 수 있겠는가. 홍농후(弘農侯) 이하는 중원(中原)에서 벼슬하여 6세에 이르러 비로소 본국(本國)에 돌아왔으니 마땅히 한당(漢唐)의 역사에 증거(證據)가 있을 것이니 참령(參領) 면조(冕朝)가 여러 종친(宗親)으로부터 문서를 찾아 전심(專心)으로 힘을 쓴지 이에 십 여 년이나 되었다.

 

균전사(均田使) 병훈(秉薰)은 도덕(道德)의 대가(大家)로서 뜻을 품고 멀리 바다를 건너 북경(北京)에 교거(僑居 : 타향에 임시로 머물러 삶)하며 학관(學館)을 개설하고 중국의 인사(人士)들과 즐겨 사귀었다. 이때 면조(冕朝)가 병훈(秉薰)에게 편지로 당시 덕()이 많고 견문(見聞)이 넓은 사람으로 하여금 서운재기문(瑞雲齋記文)을 지을 사람의 소개를 부탁하니 전 청()나라 양강총독(兩江總督) 장인준(張人駿)이 찬()하고 한림수찬관(翰林修撰官) 유춘림(劉春霖)이 글을 쓰고 전씨(全氏) 대동보(大同譜) 서문(序文)은 포정사(布政使) 국사관장(國史館長)인 왕수남(王樹枏)이 지으니 또한 역사를 많이 상고(詳考)하여 본 사람 중 삼공(三公)안에 드는 중국의 유명한 선비이다. 또한 왕공(王公)은 예원[藝苑 : 전적(典籍)을 모아 놓는 곳]의 수장(首長)이니 실로 전씨(全氏)에게 많은 영광(榮光)이 있다 할 것이며 공()의 업적이 모두 드러나 밝혀지는데 도움이 된다 하겠다. 이에 그 비명(碑銘)을 나에게 청하니 추원(追遠)하는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명()을 짓는다.

 

백제 사람으로 한()나라에서 벼슬하며 후()에 봉해지는 영광을 입고 그 복()6세가 지난공()에게까지 이어지니 귀한 공주를 정중히 모시고 동으로 와서 정선군(旌善君)으로 봉해지니 그 광영(光榮)이 환성군(歡城君)의 모든 후손에게 미쳐 공경(公卿)벼슬이 많이 배출되었다.

 

문헌(文獻)이 비록 부족하다 할지라도 기송[杞宋 : 선대(先代)의 일을 상고할 만한 문헌이 없는 것을 뜻함]보다는 족히 증명할 수 있다. 신라와 고려까지 그 법도(法度)가 끊어짐 없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와 지금까지도 복록(福祿)이 성()하고 크니 그것은 선조(先祖)의 업적이 우뚝 솟아있음이니 해마다 제수(祭需)를 바쳐야 하리. 서운(瑞雲)에 올라 살펴보니 그 쌓아올린 공적(功績)은 이지러지지도 무너지지도 않으니 내가 명()을 돌에 새겨 그 덕()을 칭송(稱頌)하노라.

 

을축(서기 1925) 동지절 의왕 이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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