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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忠烈 忠康 二公 追慕碑銘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19:5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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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 충강 이공 추모비명(忠烈 忠康 二公 追慕碑銘)

 

칠곡(漆谷)의 동쪽, 도동(道洞)의 남쪽에 환하게 밝은 규수(圭首 : 위는 둥글고 아래는 네모난 모양)의 비()가 있으니 이 자리는 옛날 이충사(二忠祠)가 세워졌던 터전이다.

옛날 고려(高麗) 때에 도원선생(桃源先生) 충렬공(忠烈公)의 성()은 전씨(全氏), ()는 이갑(以甲)이고, ()는 자경(子經)이니 그의 아우 충강공(忠康公) () 의갑(義甲)과 함께 고려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신 공신(功臣)으로서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견훤(甄萱)의 난()에 대구 팔공산(八公山) 동수(桐藪)에서 역전(力戰)하다가 형제가 다 순절(殉節)하였으니 그 당시에 순사(殉死)8명 중 두 분이었다.

난리가 끝난 뒤에 태조(太祖)께서 크게 슬퍼하여 형은 정선군(旌善君), 동생은 죽산군(竹山君)에 추봉(追封)하고 시호(諡號)를 충렬(忠烈), 충강(忠康)이라 하사(下賜)하고 충렬사(忠烈祠)에 합향(合享)으로 모시었다가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에 숭의전(崇義殿)으로 이봉(移奉)하였으니 이것이 두 공()의 충의(忠義)를 표창(表彰)함이 대개 이러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데 공()의 시조(始祖)는 환성군(歡城君) () ()이요, 3세조 휘() ()은 한()나라에 입조(入朝)해 관서홍농후(關西弘農侯)로서 시호(諡號)가 문충(文忠)이요, () 순성(舜成)은 태부(太傅)로서 시호(諡號)가 문정(文正)이고 휘() 여균(汝均)은 상서(尙書)로서 시호(諡號)가 문헌(文憲)이며, () 운교(雲喬)는 상서(尙書)로 시호(諡號)가 충달(忠達)이고 휘() 원근(元根)은 상서(尙書)로서 시호(諡號)가 무절(武節)이다. 이상의 4세는 중국에 살며 명예(名譽)와 지위(地位)가 세상에 빛나더니 휘() ()에 이르러 공주(公主)를 모시고 신라(新羅)로 돌아와 정선군(旌善君)에 봉해지니 이 어른이 곧 공()8대조이시며 후손들이 이로 인해 정선(旌善)을 관향(貫鄕)으로 삼은 것이다.

 

후손에 찬의(贊儀) 벼슬을 지낸 휘() 민연(敏連) () 우헌(寓軒)이 정선(旌善)에서 성주(星州) 팔거(八莒) 국우리(國優里) 도덕산(道德山) 아래로 이주(移住)하였으니, 즉 팔공산(八公山) 여록[餘麓 : 산소 근처에 있는 산 중 주산(主山), 청룡(靑龍), 백호(白虎), 안산(案山) 외의 산]이요 동수(桐藪)의 옛 전장(戰場)에서 아주 가까운 곳을 선택한 것이다.

 

두 분의 충절(忠節)을 느끼어 쓰신 시()가 있으니 시()에 가로되 팔공산(八公山)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산은 고요하고 구름은 한가로우니 이것으로 이공(二公)의 자취를 알겠노라. ()가 새겨진 바위는 스스로 천추(千秋)에 전하리라.

! 이공(二公)의 충절(忠節)은 반드시 동국사(東國史)에서 영원히 빛이 나련만 묘소(墓所)만은 실전(失傳)되어 찾을 길 없으니 어찌 자손으로서 한스러움이 아니리오. 그런 이유로 우헌공(寓軒公)이 그의 자제(子弟) 거옹(莒翁) 사헌(士憲)을 시켜 한강(寒岡) 정선생(鄭先生)에게 예()를 문의(問議)하고 향도(鄕都)의 사림(士林)들과 뜻을 모아서 침실의 동쪽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여헌(旅軒) 장선생(張先生)이 쓰신 글씨로 편액(扁額)을 걸고 춘추제향(春秋祭享)을 치러왔는데 전란(戰亂)을 당하여 폐허(廢墟)가 되고 말았다. 거옹(莒翁)이 다시 사허(祠墟)의 앞에 당()을 하나 세우니 이것을 도남재(道南齋)라 하는데 자손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지가 수 백 년을 헤아린다.

 

후손들이 적요(寂寥 : 적적하고 고요함)하게 지내왔고 또한 문헌(文獻)도 기송[杞宋 : 선대(先代)의 일을 상고할 만한 문헌이 없는 것을 뜻함]처럼 많지 않으니 더욱 한스러운 일이다. 이에 일문(一門)이 다들 모여서 선사(先祠)가 없어졌으니 남기신 아름다움이 길이 묻혀질까 두려워하여 그 터전에 비()를 세우기로 논의(論議)를 모아 후손 익동(益東)이 나에게 글을 부탁하니 내 졸눌(拙訥 : 재주가 둔하고 말이 어줍다)한 사람으로 이러한 부탁을 받기 어려우나 이공(二公)의 당시 그 장()한 행적(行蹟)을 생각한다면 고려가 비록 오래된 시대의 일이지마는 다가올 후세에 충성(忠誠)을 본받기를 어찌 생각하지 않으리오.

 

이것으로 명()을 지으니 명()에 가로되 옛날 고려에 있어서 탁월(卓越)하신 두 공()이라 견훤(甄萱)의 난리가 하늘을 흔들 적에 동수(桐藪)에 바람이 매섭도다. 빛나는 업적을 봉군(封君)과 사호(賜號)로 표창(表彰)하는 은전(恩典)이 높았고 성조(聖朝)에서 옮겨 봉향(奉享)하니 세상에 드문 숭배(崇拜)였다. 영남(嶺南) 사림(士林)들과 의논을 모으고 한강(寒岡) 선생에게 예()를 물어, 도덕산(道德山) 깊은 곳에 영()이 깃드신 웅장(雄壯)한 곳에 침실의 동쪽에 사우(祠宇)를 세우고 편액(扁額)을 걸어서 춘추제향(春秋祭享)에 조두(俎豆 : 제사 때 음식을 담는 그릇)도 풍족하였는데 난리를 겪고 나니 폐허로 쑥대밭이 되었더라. 추모(追慕)할 곳이 없으니 자손들의 슬픔이 어떠하리.

 

이에 비()를 세우니 4척의 높고 웅장함이라 용동(聳動 : 몸을 솟구쳐 뛰듯 움직임)하며 첨망(瞻望 : 높은 곳을 아득히 바라봄)하니 떳떳한 도리와 정성을 불러일으킨다.

붉은 전서[篆書 : 전자체(篆字體)로 쓴 글씨]와 과두문자(蝌蚪文字)에는 벽혈(碧血 : 푸른빛을 띤 진한 피)이 어리고 쌍무지개가 비추니 넘어짐도 없이 마멸(磨滅)도 없이 무궁한 세월에 밝게 남으리라.

 

강희 58년 을해 3(숙종 45, 서기 1719)

종사랑 전장릉참봉 진성 이충호 삼가 짓고

유학 사량 최종응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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