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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忠烈 忠康公 行蹟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19: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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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 충강공 행적(忠烈 忠康公 行蹟)

 

()의 성()은 전씨(全氏)니 휘()는 이갑(以甲)이요 자()는 자경(子經)이며 호()는 도원(桃源)이다[증교지지(增校地志)에 따르면 도원(桃源)은 정선(旌善)의 옛 이름이니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이로 인하여 사호(賜號)하였다].

 

강원도 삼척부 정선군 사람이며 시조(始祖)의 휘()는 섭()이니 백제(百濟) 십제공신(十濟功臣)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고, 그 아들은 호익(虎翼)이니 백제 다루왕(多婁王) 때에 병상(兵相)이었으며, () ()에 이르러 추부시랑(秋部侍郞) 정선군(旌善君)으로 봉해져 누대(累代)를 전해 내려오다가 휘() 우상(禹相)은 아찬[阿飡, 다른 판본에는 학사(學士)라 하기도 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 광문박사(廣文博士)라기도 한다. 효공왕(孝恭王) 때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냈다]을 지냈으니 공() 아버지시다. ()의 어머니는 능주(綾州) 구씨(具氏)니 복야(僕射) ()의 따님이시다.

 

꿈에 푸른 옷을 입은 세 신인(神人)이 함께 한 아이를 안겨주며 말하기를 (4자 결손) ()은 삼한(三韓)을 덮고 이름은 일국(一國)에 가득할지니 삼가 매만져 잘 보호하라는 말을 마치고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이로부터 태기(胎氣)기 있어 (2자 결손) 서기(瑞氣)가 방안에 가득 성()하니 잠시 후 과연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골상[骨相, 다른 판본에는 골격(骨格)]이 보통사람과는 달라서 제비턱(다른 판본에는 봉의 눈)에 거북의 등을 하고 신장(身長)8척이며 힘은 강궁(强弓)을 당기고 (3자 결손) 지모(智謀)가 절륜(絶倫)하고 사리(事理)를 분별함에 정통(精通)하였으며 또한 글을 잘 지었다.

 

아우 휘() 의갑(義甲)이 출생할 때 또한 신인(神人)이 꿈에 보였는데 재간(才幹)과 모략(謀略)이 거의 형과 같았다. 자라나서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송악(松嶽)에서 만나니 기이(奇異)하게 여겨 삼계[三季 : (), (), () 삼대의 말세. 즉 어지러운 시대)의 창생(蒼生 : 모든 백성)이 널리 구제(救濟)되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는 세상이 영웅(英雄)에게 직접 내리는 명(()이라 말하고 막하(幕下)에서 신하(臣下)될 약속을 하였다.

()나라 건녕(乾寧) 3(서기 896) 태조(太祖)가 발어참성(勃禦塹城)을 쌓을 때 종사(從事)하였고, 광화(光化) 원년(元年, 서기 898)에는 선봉(先鋒)으로 양주(楊州)를 정벌(征伐)하였으며 3(서기 890)에는 광주(廣州)와 청주(淸州) 등의 적()을 모두 평정(平定)하였다.

 

천우(天佑) 3(서기 906)에는 태조(太祖)로부터 병부(兵符)와 함께 정기(精騎 : 매우 날쌔고 용맹스러운 기병)를 받아 유금필(庾黔弼) 장군 등과 함께 상주(尙州) 사화진(沙火鎭)에서 견훤(甄萱)을 쳐서 이기고, ()나라 개평(開平) 4(서기 910)에는 태조(太祖)를 따라 수군(水軍)을 일으켜 나주(羅州) 포구에서 견훤을 크게 격파(擊破)하였다.

 

태조(太祖)가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우니 안으로 들면 시중(侍中)이요 밖으로 나면 장군(將軍)으로 위엄(威嚴)과 은혜(恩惠)를 아울러 베푸니 조야(朝野)의 마음이 모두 모여들었다. 태조(太祖)가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매양 잠자리에 들면 불안해하는 기색(氣色)이 있거늘 공()이 진언(進言)하기를 명공(明公)께서 오랫동안 중()한 자리에 머물러 있어 대신(大臣)들에게 핍박(逼迫)받는 의외(意外)의 일이 생길 우려(憂慮)가 있으니 곤외(閫外 : 왕성의 경계 밖)로 나가 군민(軍民)을 위무(慰撫)하고 병갑(兵甲)을 수련(修練)하며 틈이 생기길 기다렸다 스스로를 보전(保全)할 계책을 세움만 같지 못하다 아뢰니 태조(太祖)가 이에 결국 나주(羅州)로 나아가 진압(鎭壓)하였다. 이때 남쪽에는 기근(饑饉)이 들어 초적(草賊)이 봉기(蜂起)하므로 공()의 권유(勸誘)로 양식을 싣고 와서 마음을 다해 구휼(救恤)하니 백성들이 믿고 생활할 수 있었다.

 

궁예(弓裔)는 신라(新羅) 헌강왕(憲康王)의 서자(庶子)로 모반(謀叛)하여 북경(北京 : 지금의 원주)을 근거로 신라를 집어삼킬 뜻을 품었는데 사리에 어둡고 난폭(亂暴)함이 점점 심해져 처자(妻子)를 살육(殺戮)하고 무고(無辜)한 백성을 죽이는 것이 하루에도 수 백인에 이르자 마음이 모두떠나버렸다.

()은 그 아우 의갑(義甲) 그리고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유금필(庾黔弼), 복지겸(卜智謙) 등 여러 장군들과 밤에 태조(太祖)의 집에 모여서 추대(推戴)하기로 몰래 의논하여 꾀하는데 하고자 하지 아니하였다. 영부인(令夫人) 류씨(柳氏)가 이를 알고 일러 말하기를 동산에 어찌 꺾을만한 새로 난 오이가 없겠는가 하고 일어서 나가니 공() 등이 아뢰기를 삼한(三韓)은 분열되고 군도(群盜)가 봉기(蜂起)하니 이제 임금된 자가 분연(奮然)히 큰 소리를 외치며 나아가 도적들을 멸하고 삼분(三分)된 요좌(遼左 : 요나라의 왼쪽, 즉 한반도)의 태반(太半)을 차지하여 나라를 세우고 도읍(都邑)을 정해야 하나 지금은 끝을 보지 못하니 학정(虐政)은 점점 극심(極甚)해져 주인을 배반(背叛)하고 부모자식 간에도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또한 음형(淫刑 : 부당한 형벌)을 이유없이 내림에 처자(妻子)는 살육(殺戮)하고 신료(臣僚)들을 주살(誅殺)하니 백성이 도탄(塗炭)에 빠져 (4자 결손) 걸주[桀紂 : ()나라의 걸왕(桀王)과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아울러 이르는 말. 매우 포악한 임금]의 악행(惡行)에 더 보탤 것이 없습니다. 어두운 것을 폐하고 밝은 것을 세움은 천하의 대의(大義)이니 청()컨데 공()은 은()나라와 주()나라의 고사(故事)를 행하소서 하니 태조(太祖)가 얼굴색을 고쳐가며 말하기를 나는 충의(忠義)만을 스스로에게 허락해왔는데 어찌 두 마음을 품겠으며 실로 나는 부덕(不德)하니 탕무[湯武 : ()나라의 탕왕(湯王)과 주()나라의 무왕(武王)]의 일을 따르겠는가 하며 후세(後世)가 나를 구실(口實)로 할까 두렵다 하였다. 이에 공()을 비롯한 제장(諸將)들이 때란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우니 하늘이 주는 것을 감히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재앙(災殃)은 나라 안 온 백성들이 갚아나가야 할 것임을 생각하시고 또한 권세(權勢)와 지위(地位)가 중()한 사람일수록 반드시 허망(虛妄)한 죽음을 당할 것이니 남아있는 것 없이 쇠()할 것이라 말하였다.

 

최응(崔凝)이 공() 역시 위태로우니 홀로 깊이 생각지 마시고 지금 덕망(德望)이 공()만한 사람이 없고 백성들의 여망(輿望)이 공()께 향하고 있으니 만약 우리들이 말한 바를 따르지 아니한다면 죽을 날 조차 없을 것이라 말하였다. 하물며 왕창근경문[王昌瑾鏡文 : 중국 상인 왕창근(王昌瑾)이 태봉(泰封)의 왕성인 철원(鐵圓) 장터에서 산 거울 속에 적힌 참문(讖文)으로 신라의 멸망과 태봉의 붕괴, 고려의 흥기를 예언한 참문]과 같은 징험(徵驗)이 이미 나타났는데 어찌 하늘의 뜻을 어겨가며[다른 판본에는 변수(駢首). 즉 머리를 나란히 하여] 독부(毒夫)의 손에 죽겠습니까 하고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호위(護衛)하여 새벽녘에 나와 노적가리 위에 앉히고 군신(君臣)의 예를 올리고 사람을 시켜 말을 달려 나가 왕공(王公)이 이미 의기(義旗)를 드셨다고 외치니 궁예(弓裔)가 이를 듣고 놀라 달아났다.

 

태조(太祖)가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고 연호(年號)를 천수(天授)로 정한 후 추대(推戴)한 공()으로 공()의 형제를 수위(首位)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의 벼슬을 내렸다.

천수(天授) 3(서기 920) 겨울 10월에 견훤(甄萱)이 신라와 싸워 이기고 대량성(大良城)과 구사성(仇史城)을 함락(陷落)하니 신라왕이 아찬(阿飡) 김율(金律)을 보내 고려에 구원을 요청하자 태조(太祖)가 공()과 함께 신숭겸(申崇謙)을 대장(大將)으로 삼고 권설[權說, 다른 판본에는 원봉(元奉)]을 부장(副將)으로 삼아서 구원토록 하니 견훤(甄萱)이 물러났다.

 

()이 말하기를 견훤(甄萱)은 본성(本性)이 시기(猜忌)가 많고 음험(陰險)하여 그 부강(富强)함만을 믿고 항시 변경(邊境)을 침범하니 이로부터 (다른 판본에는 점점 분쟁이 질질 끌릴 염려가 있으므로) 퇴각(退却)할 때에 맞춰서 초멸(剿滅 : 무찔러 없앰)시킴만 못하다 하고 드디어 진군(進軍)하여 추격하니 견훤(甄萱)을 천령군(天嶺郡) 마리현(馬利縣)에서 대파(大破)하니 견훤(甄萱)이겨우 자기 몸만 건져 위기를 모면(謀免)하였다.

 

천수(天授) 8[후당(後唐) 동광(同光) 3년 을유(乙酉), 신라 경애왕(景哀王) 원년(元年), 서기 925)]에는 공()을 태사(太師)로 삼으니 생각컨데 개국(開國)에 공()을 세움이 많기 때문이다.

천수(天授) 10[후당(後唐) 명종(明宗)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신라 경순왕(敬順王) 원년(元年), 서기 927] 겨울 10월에 신라 경애왕이 부인(夫人)과 빈()과 더불어 종척(宗戚)들을 거느리고 포석정(鮑石亭)에 나와 술자리를 벌이고 노는데 갑자기 견훤(甄萱)이 출병(出兵)하여 창졸(倉卒)간에 이르렀음을 듣고 어찌할 줄을 모르다 왕()과 부인(夫人)은 성()의 남쪽으로 달아나 숨으니 견훤(甄萱)이 병사들을 풀어 왕궁 곳곳을 크게 약탈(掠奪)하고 좌우에 명하여 왕()을 찾아 군중(軍中)에 데려다가 핍박(逼迫)하여 자진(自盡)케 하였다.

 

태조(太祖)가 이를 듣고 사신(使臣)을 보내 조문(吊問)하고 제()를 올린 후 공()의 사저(私邸)를 찾아 일어나게 하여 군사(軍師)로 삼고 친히 정기(精騎) 5천을 거느리고 견훤(甄萱)을 팔공산(八公山) 동수(桐藪)에서 맞아 대전(大戰)을 벌이던 중 견훤군(甄萱軍)이 수 겹으로 포위하자 공()이 말하기를 일이 위급하니 신숭겸(申崇謙)과 의논하여 기신(紀信 : 한고조 유방을 대신해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충신)이 초()나라를 속인 술수(術數)를 쓰기로 하고 태조(太祖)에게 청하여 샛길로 내보내고 그 아우 의갑(義甲)과 더불어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 등과 칼날로 밀어부치며 힘써 싸우다 동시에 함께 전사(戰死)하니 태조(太祖)가 슬퍼함이 매우 깊어 공()을 정선군(旌善君)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추봉(追封)하고 시호(諡號)를 충렬(忠烈)이라 하사(下賜)하였고, ()의 아우 의갑(義甲)에게는 죽산군(竹山君)을 봉하고 시호(諡號)를 충강(忠康)이라 하사하였으며, 화상(畵像)을 그려 걸고 사당(祠堂)을 세우고 또 지묘사(智妙寺)를 창건(創建)하여 명복(冥福)을 빌었으며, 대대로 기록하여 자손에게 음직(蔭職)이 내려지도록 하였다.


! ()은 명세지재(命世之才 : 한 시대를 바로잡아 구해낼 만한 큰 인재)이자 보필지재(輔弼之才 : 임금을 보좌할 만한 능력이나 그러한 능력이 있는 사람)의 품성(稟性)을 타고나 세상을 구제(救濟)할 신무(神武)한 책략(策略)을 품었으며 고려를 도와 삼한을 통합(統合)하고 후백제(後百濟)에 맞서 팔공산(八公山)에서 전사(戰死)하시니 곧은 충성(忠誠)과 큰 절개(節槪)는 진실로 족히 후세까지 이어질, 사람으로서는 으뜸가는 외훈(巍勳)을 세웠으며 위대한 공적(功績)은 실로 이 나라 백성들이 잊지 못할 공()이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에 공훈(功勳)에 보답하고 충성(忠誠)을 표창(表彰)함이 금석(金石)에 실려 해와 별같이 빛나고 공()의 후손에 분봉(分封)하여 이적(移籍)한 분이 심히 많으니 정선(旌善), 옥천(沃川), 성산(星山), 완산(完山), 평강(平康), 옥산(玉山), 용궁(龍宮), 죽산(竹山), 계림(鷄林), 나성(羅城), 안동(安東), 기장(機張), 황간(黃澗), 팔거(八莒) 등 여러 파()이다. [이 본()은 만력(萬曆) 임영간(臨瀛刊)에서 발췌했다.]

 

가정[()나라 세종(世宗) 연대(年代), 서기 15221566)]

판중추부사 정세호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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