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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高麗 太師 壁上功臣 旌善君 諡忠烈 全公 以甲 侍中 開國功臣 竹山君 諡忠康 全公 義甲 壇誌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19:4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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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사 벽상공신 정선군 시충렬 전공 이갑

시중 개국공신 죽산군 시충강 전공 의갑 단지

(高麗 太師 壁上功臣 旌善君 諡忠烈 全公 以甲

侍中 開國功臣 竹山君 諡忠康 全公 義甲 壇誌)

 

충렬공(忠烈公)의 휘()는 이갑(以甲)이요 성()은 전씨(全氏])이며 관()은 정선(旌善)이다. 환성군(歡城君) () ()16세손이며 정선군(旌善君) () ()9세손이다.

(: 죽은 아비)의 휘()는 우상(禹相)으로 광문학사(廣文學士)이고 비(: 죽은 어미)는 능주(綾州) 구씨(具氏)니 우복야(右僕射) ()의 따님이다.

 

()의 생김새는 괴위(魁偉 : 크고 훤칠함)하여 제비턱에 거북등을 하였으며 지혜(知慧)와 용기(勇氣)가 남보다 뛰어났고 문장(文章)에도 통달(通達)하셨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아직 두각(頭角)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을 때부터 따르고 좇아 강토(疆土)를 넓히고 군웅(群雄)을 없앰으로써 벼슬이 태사(太師)에 이르렀고, 아우 충강공(忠康公) () 의갑(義甲)과 더불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왕실(王室)을 좌우(左右)에서 보좌(輔佐)하다 팔공산(八公山) 동수(桐藪)싸움에 왕사(王師)로써 참전(參戰)하였으나 패해 왕()이 심히 위태(危殆)하거늘 이공(二公)이 왕()을 대신해 목숨을 다하기로 마음먹고 왕()을 샛길로 나아가도록 하고 역전(力戰)하다가 순절(殉節)하셨다. 태조(太祖)가 이윽고 난()을 평정(平定)하고 공()의 충절(忠節)에 탄식(歎息)하여 정사공신(定社功臣)에 봉하고 더불어 이공(二公)에게 시호(諡號)를 내렸다.

 

이공(二公)은 싸움터에서 돌아가시어 의복(衣服) 등의 유품(遺品)마저 수습(收拾)하지 못하였고 장사(葬事)지낼 곳마저 없었다. 비록 조두지향[俎豆之享 : 사우(祠宇)같은 곳에서 올리는 제향(祭享)]은 있으나 묘향[墓享 : 묘소(墓所)에서 올리는 제향(祭享)]의 예의(禮儀)는 올릴 수 없으니 어찌 원망(怨望)스럽고 통한(痛恨)스럽지 않겠는가. 이에 환성군(歡城君)의 단()을 설립(設立)할 때 그 곁에 차례로 합사(合祀)하여 제향(祭享)하게 되었다.

 

()의 자() 보인(輔仁)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 ()은 밀직부사(密直副使)이고 참()은 낭장(郎將)이며, 5세손 지순(之淳)은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이고 지신(之信)은 중서사인(中書舍人)이며, 6세손 양()은 병부낭중(兵部郎中)이요 취()는 전객령(典客令)이며, 9세손 수룡(守龍)은 도순사(都巡使)이며 수송(守松)은 상서(尙書)이다. 충강공(忠康公)은 무사[無嗣 : ()를 이어 나갈 아들이 없음]이고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아니한다.

 

후손 종약대표 정삼품 육군참령 면조 삼가 짓고

상수 삼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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