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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石陵君 諱 允臧 壇碑文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19:4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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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릉군 휘 윤장 단비문(石陵君 諱 允臧 壇碑文)

 

유창(流暢)한 외국어구사능력(外國語驅使能力)과 능란(能爛)한 외교수단(外交手段)으로 고려말엽(高麗末葉) 오대왕조(五代王朝)에 걸쳐 민완(敏腕)을 떨치신 희대(稀代)의 외교관(外交官)인 현조(顯祖) 한분이 본단(本壇)에 향사(享祀)되어 계시니 고려(高麗) 공민왕조(恭愍王朝) 문하시중(門侍中)이신 석릉군(石陵君) 정선전공(旌善全公) () 윤장(允臧) () 암곡(巖谷)이 바로 그 어른이시다.

 

백제(百濟) 십제공신(十濟功臣) 환성군(歡城君) () ()의 삼십세손(三十世孫)이시요 신라(新羅) 성덕왕조(聖德王朝) 전문(全門)의 관조(貫祖)이신 정선군(旌善君) () ()의 이십삼세손(二十三世孫)이시며 고려(高麗)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정선군(旌善君) () 충렬(忠烈) () 이갑(以甲)의 십오세손(十五世孫)이 되시고 고려(高麗) 고종조(高宗朝)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도첨의좌정승(都僉議左政丞) () 위열(威烈) () ()는 고조고(高祖考)가 되시며 고려(高麗) 고종조(高宗朝)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 공열(公烈)은 증조고(曾祖考)가 되시고 충렬왕조(忠烈王朝) 우헌납(右獻納) () 숙방(淑方)은 조고(祖考)가 되시며 충숙왕조(忠肅王朝) 찬성사(贊成事)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도원군(桃源君) () 영보(英甫)는 고()가 되신다.

 

충숙왕(忠肅王) 어국(御國) 십칠년(十七年)의 뒤를 이어 1331년 신미(辛未)에 충혜왕(忠惠王)이 즉위(卽位)하였으나 일년(一年)도 못되어 왕위(王位)는 또 다시 충숙왕(忠肅王)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조정(朝廷)에는 충혜왕(忠惠王) 재옹립(再擁立)을 꾀하는 일파(一派)가 있어 외국어(外國語)와 외교수단(外交手段)이 능란(能爛)한 사신(使臣)을 파원(派元)하여 충혜왕복위(忠惠王復位) 고명장(誥命狀)을 획득(獲得)할 계획(計劃)을 추진(推進)하고 있었다.

 

()께서 충숙왕(忠肅王) 팔년(八年)에 역어시랑(譯語侍郞)을 배명(拜命)한 직후(直後)에 파원사신(派元使臣)으로 발탁(拔擢)되어 금은(金銀)과 대주(大珠)를 가지고 원경(元京)에 파견(派遣)되시었다. ()부터 원경(元京)에 머물러 있던 충혜왕(忠惠王)을 모시고 조회(朝會)에 참석(參席)코자 입궐(入闕)하였을 때 전원황제(前元皇帝)였던 연첩목아(燕帖木兒)로부터 파격적(破格的)인 후대(厚待)를 받음으로 주위(周圍)의 관심(關心)을 끄셨다.

 

충혜왕(忠惠王)이 원경(元京)에 머물러 있는 동안 방탕(放蕩)한 생활(生活)을 하셨다는 소문(所聞)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연첩목아(燕帖木兒)였으나 공()의 설득(說得)에 매료(魅了)되어 고명장획득(誥命狀獲得)에 어려움은 없었다. ()에도 이규(李揆) 등을 보내어 복위승인(復位承認)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失敗)하였으므로 공()의 성공(成功)이 드높게 칭양(稱揚)되었다.

충혜왕(忠惠王) 삼년(三年) 임오(壬午) 6(六月)에 대호군(大護軍)으로서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平定)한 공()으로 이등공신(二等功臣)에 서훈(敍勳)되시었다.

 

익년(翌年) 계미(癸未) 9(九月)에는 우상시(右常侍)로서 평양도순위사(平壤都巡慰使)를 겸()하셨고 충혜왕(忠惠王) 3(三年) 정해(丁亥)에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서 교주도순문사(交州都巡問使)를 겸()하시고 쌍성(雙城, 永興) 및 일대(一帶)의 인구조사(人口調査)를 실시(實施)하셨다.

 

충목왕(忠穆王) 4(四年) 무자(戊子) 3(三月)에는 첨의참리(僉議參理)로서 이학도감판서(吏學都監判書)를 겸()하셨다.

강릉대군(江陵大君) ()1341년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 원년(元年) 신사(辛巳)에 원()나라의 부름을 받고 원경(元京)에 가 있었는데 8년 후인 충정왕(忠定王) 원년(元年) 을축(乙丑) 10(十月)에 원()은 강릉대군기(江陵大君琪)를 위왕(衛王)의 딸 노국공주(魯國公主)와 혼인(婚姻)할 것을 명()하였으므로 공()께서는 배신(陪臣)으로 원경(元京)에 파송(派送)되셨다.

2년 후인 충정왕(忠定王) 3(三年) 10(十月)에 원()은 강릉대군(江陵大君) ()를 왕()으로 봉()하였고 동년(同年) 12(十二月)에 공()께서는 왕()을 모시고 귀국(歸國)하셨다.

 

()께서는 호종(扈從)하신 공()으로 문하부찬성사(門下府贊成事)에 오르셨고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신 후()로부터는 국책전환(國策轉換)을 위()하여 심혈(心血)을 기울이셨다. 곧 공민왕(恭愍王)으로 하여금 원()나라와의 주종관계(主從關係)를 끊고 신흥(新興)하는 명()나라와 유대(紐帶)를 맺게 하는 정책(政策)에 결정적(決定的)인 원동력(原動力)이 되셨다.

 

()은 충숙왕조(忠肅王朝)에 출사(出仕)하여 충혜(忠惠) 충목(忠穆) 충정(忠定) 공민(恭愍)에 이르는 오왕조(五王朝)에 걸쳐서 헌신적 활동(獻身的 活動)을 기울이셨으며 특()히 원()나라의 부당(不當)한 간섭(干涉)을 교묘(巧妙)하게 대처(對處)함으로 후환(後患)이 없도록 완결(完結)지으시는 수완(手腕)은 이 나라 외교청사(外交靑史)에 불멸(不滅)의 금자탑(金字塔)을 남기셨다.

() 정경부인(貞敬夫人) 창녕성씨(昌寧成氏)와의 사이에 일남(一男)을 두시니 충혜왕(忠惠王) 원년(元年)에 예부시랑(禮部侍郞)을 배명(拜命)하신 휘() 우도(于道)이시며 상호군(上護軍) 천길(天吉)은 장손(長孫)이 되시고 중랑장(中郎將) () 성길(成吉)은 차손(次孫)이 되신다.

 

후잉(後仍)의 번연(蕃衍)함과 영유신숙(纓緌紳珟)의 사()가 기라성(綺羅星) 같았으므로 기실(記悉)치 못하거니와 다만 선조조(宣祖朝) 호조판서(戶曹判書) 순충보조찬모익성공신(純忠補祚贊謨翊聖功臣) 임하군(臨河君) () 응조(應祖)는 공()의 이십세손(二十世孫)이 되시며 선조조(宣祖朝) 자헌대부(資憲大夫) 향조판서(刑曹判書)에 오르시고 임진수훈(壬辰殊勳)으로 충근정량알성효절호성공신(忠勤貞亮謁誠效節扈聖功臣)에 책록(冊錄)되시고 석릉군(石陵君)에 책봉(冊封)되신 휘() ()은 삼십세손(三十世孫)이 되심을 특기(特記)한다.

 

내외(內外)분의 묘소(墓所)는 개성(開城) 송악산하(松岳山下)에 합폄(合窆)으로 모시었다. 누차(累次)의 병란(兵亂)으로 지세(地勢)와 방향(方向)을 완전(完全)히 잃게 되고 공()의 묘소(墓所)를 실전(失傳)케 됨은 실()로 송구(悚懼)하여 몸둘바를 알 길이 없다.

남한소재후잉(南韓所在後仍)들이 정선읍(旌善邑) 덕우리(德雨里) 지족산록(指族山麓)에 단()을 모으고 숭모제(崇慕祭)를 받들어 오다가 무진(戊辰) 3(三月) 종의(宗議)로 신규설단(新規設壇)할 것을 가결(可決)함에 따라 이곳 서운산하(瑞雲山下) 인좌곤향(寅坐坤向)으로 새로운 숭모단(崇慕壇)의 낙성(落成)을 봄으로써 이후(以後) 세세년년(歲歲年年) 향사(享祀)의 성()을 다하게 되니 다년누적(多年累積)된 불효(不孝)를 다소(多少)라도 씻는 듯 하여 후잉(後仍)들의 자위(自慰) 또한 클 것으로 믿는다.

()의 후손(後孫) 몇 분이 비제(鄙第)에 내임(來臨)하여 공()의 숭모단명찬(崇慕壇銘撰)할 것을 청()하시기를 감당(勘當)치 못하겠다. 사양(辭讓)하였으나 거듭 간청(懇請)하시므로 몇 줄의 무사(蕪辭)로 기록(記錄)하였거늘 공내외(公內外)분의 위덕(偉德)을 연상(捐傷)함이 없을까 두려움을 금()할 길이 없다. 너그러우신 아량(雅量)으로 미흡(未洽)한 점()을 관용(寬容)하시기 비오며 아울러 양위(兩位)분의 영복(永福)을 엎드려 기원(祈願)할 뿐이다.

 

1989년 기사(己巳) 104(음력 915)

서울대학교교수(서울大學校敎授) 한글학회이사(한글學會理事)

문학박사(文學博士) 교육학박사(敎育學博士) 청주후인(淸州后人) 한갑수(韓甲洙) 삼가 짓고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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