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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臨河君 諱 應祖 神道碑銘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19:4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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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군 휘 응조 신도비명(臨河君 諱 應祖 神道碑銘)

 

오늘날 사람의 평가기준(評價基準)을 사회공여도(社會供與度)에 두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옛날 우리 조상(祖上)들의 평가기준은 충효(忠孝)로써 입신양명(立身揚名)하는데 두고 있었다. 입신양명을 최고의 보람으로 생각하던 16세기 초엽에 태어나시어 입신양명의 길이 저절로 굴러 들어왔을 때에 이를 홍모(鴻毛 : 기러기의 털이라는 뜻으로, 아주 가벼운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에 돌리시고 일생(一生)을 깨끗한 선비정신으로 걸어오신 현사(賢士) 한 분이 여기 있는 숭모단(崇慕壇)에 향사(享祀)되어 계시니 임하군(臨河君) 정선(旌善) 전공(全公) () 응조(應祖)가 바로 그 어른이시다.

 

()께서는 중종 17년 임오(壬午, 서기 1522)에 태어나시니 전씨(全氏)의 도시조(都始祖)이시며 백제(百濟) 개국(開國) 십제공신(十濟功臣)이시고 환성군(歡城君)에 피봉(被封)되신 휘() ()41세손이 되시고 신라(新羅) 성덕왕(聖德王) 22년 계해(癸亥, 서기 723) () 현종(玄宗)에게 사신(使臣)으로 다녀오신 정선군(旌善君) () ()34세손이 되시며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도와 통합삼한개국공신(統合三韓開國功臣)이 되셨으며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신 휘() 이갑(以甲), () 자경(子經), () 도원(桃源), () 충렬(忠烈)26세손이 되시고 고려 충숙왕(忠肅王), 충혜왕(忠惠王) 때에 역어낭장(譯語郎將)으로 큰 외교성과(外交成果)를 거두셨고 벼슬이 평양도순위사(平壤都巡慰使),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신 석릉군(石陵君) () 윤장(允臧)12세손이 되신다. 증형조참의(贈刑曹參議) () 거강(居康)의 장남(長男)이 되시고 임란(壬亂 : 임진왜란)에 선조(宣祖)의 호성공신(扈聖功臣)으로 또 목숨을 걸고 열성위패(列聖位牌)를 모시고 피난(避難)함으로 단서철권(丹書鐵券 : 공신을 표창하던 문권과 쇠로 만든 표지)을 받으신 석릉군(石陵君) () ()의 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되신다.

 

()께서는 뛰어난 문재(文才)와 덕()을 갖추시고도 명리(名利)에 초연(超然)하심으로 과거(科擧)에 응()하지도 않으시고 사경(史經)을 섭렵(涉獵)하시며 시가(詩歌)를 벗삼는 선비로 일생을 지내실 경륜(經綸)을 가지고 계셨다. 따라서 출사(出仕)를 염두(念頭)에 두지 않고 계시던 중 주위의 천거(薦擧)로 발탁(拔擢)되시어 관계(官界)에 끌려 나가시게 되었다. 벼슬이 부호군(副護軍)에 이르신 인종(仁宗) 원년(元年, 서기 1545) ()의 높으신 덕망(德望)과 기민(機敏)하고 예리(銳利)한 실천능력을 인정(認定)받으시어 당대(當代)의 정승(政丞)이나 판서(判書)의 지위(地位)에 있다 하여도 기대하기 어려운 중책(重責)이 공()에게 내려졌다. 그것은 내일의 국가의 주인공이며 만기(萬機)의 치자(治者)가 될 세자(世子)의 신변(身邊)을 맡아서 호위(護衛)하라는 요외(料外 : 생각 밖)의 과중(過重)한 책무(責務)가 공()께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주상(主上)인 인종(仁宗)이 지나치게 허약하므로 앞날이 길지 못함을 근심하여 세자 책봉(冊封)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는 실정(實情)이었다. 과연 인종(仁宗)이 즉위 8개월에 후사(後嗣)없이 승하(昇遐)하니 보위(寶位)는 자연 인종(仁宗)의 아우 경원대군(慶原大君) 즉 명종(明宗)에게로 돌아가게 되어 자연 권력이동에 따른 소요(騷擾)가 일게 되었다. 따라서 경원대군(慶原大君)의 신변에 위험이 우려(憂慮)됨으로 조정(朝廷)에서는 공()께 대군(大君)을 호위하여 안전한 곳으로 피난(避難)하도록 요청하였다. 4품의 신분으로 보위(寶位)를 이을 세자의 안위(安危)를 책임지게 하는 파격적인 처사(處事)는 공()에 대한 신임(信任)의 정도(定度)가 어떠하였는지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할 것이다. 인종(仁宗) 승하와 명종(明宗) 즉위(卽位)에 따른 소요를 세칭(世稱)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하거니와 그 줄거리는 이러하다.

 

인종(仁宗)과 명종(明宗)은 이복형제(異腹兄弟)로서 인종(仁宗)의 외숙(外叔)인 윤임(尹任)과 명종(明宗)의 외숙(外叔)인 윤원형(尹元衡)은 그 세력이 비등(比等)하였다. 특히 중종(中宗)이 둘째 아들 경원대군(慶原大君)을 몹시 사랑하였고 또 인종(仁宗)의 건강이 수년을 넘기지 못할 만큼 허약하였기 때문에 윤원형(尹元衡)도 윤임(尹任) 맞서 싸울만한 배경이 든든하였던 것이다. 세상에서는 윤임(尹任)을 대윤(大尹)으로 윤원형(尹元衡)을 소윤(小尹)으로 부르게 되었고 양세력간의 알력(軋轢)을 대윤(大尹) 소윤(小尹)의 싸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인종(仁宗)이 보위에 오르자 인종(仁宗)의 외숙(外叔)인 윤임(尹任)은 당대의 세도가(勢道家) 김안로(金安老)와 합세(合勢)하여 소윤(小尹) 일당(一黨)에 대한 압력(壓力)을 넣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재위(在位) 8개월에 인종(仁宗)이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명종(明宗)이 보위에 오르면서 명종(明宗)의 모후(母后)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자 그동안 대윤(大尹)에게서 받은 수모(受侮)를 보복(報復)하기 시작하였다. 윤임(尹任)과 그 아들 셋 흥인(興仁), 흥희(興義), 흥례(興禮) 등 네 부자를 위시(爲始)하여 수많은 선비가 윤임(尹任)과 가깝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양측이 모함(謀陷)하는 구실로 대윤(大尹)은 소윤(小尹)이 인종(仁宗)을 해치려고 한다는 것이었고 소윤(小尹)은 대윤(大尹)이 명종(明宗)을 해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판국에 세자(世子)를 맡길만한 신임을 받으셨다면 공()의 앞길은 평탄하게 전개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었다.

 

그러나 공()께서는 수많은 현철(賢哲)이 조난(遭難 : 재난을 만남)함을 목도(目睹)하시고 조정(朝廷)으로부터 여러 번 부름이 있었음에도 일체 불응(不應)하시고 자택(自宅)에서 목숨을 다하고 돌아가시니 조정(朝廷)에서는 정헌대부(正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추증(追贈)함과 동시에 임하군(臨河君)을 추봉(追封)하였다.

 

명리(名利)를 추구(追求)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현대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시기(時機)가 아니라고 판단될 지경에는 굴러들어오는 명리(名利)라도 박찰 수 있는 이지[理智 : 이성(理性)과 지혜(知慧)]와 결단성(決斷性)이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런 인사(人士)가 이 하늘밑에 과연 존재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할 때 고고(孤高)한 공()의 품성(品性) 앞에 머리숙여 경의(敬意)를 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는 정부인(貞夫人) 김해송씨(金海宋氏)이시다.

()의 묘()는 양주군(楊洲君) 치남면(治南面) 미아리(美阿里)에 모셨으나 실전(失傳)되었으므로 여기 광명시(光明市) 노은사동(老隱寺洞) 추릉(楸陵) 간좌(艮坐 : 동북쪽을 등진 방향) 곤향원(坤向 原 : 정남과 정서의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하여 45도 각도 안의 방위)에 공()을 향사(享祀)하기 위하여 단()을 모으고 이름하여 숭모단(崇慕壇)이라 하였으며 그 소재(所在)를 길손에게 알리기 위하여 본() 신도비(新道碑)를 세우는 바이다.

 

여기를 지나는 길손들이시여, 인생을 값지고 보람되게 영위(營爲)할 의향(意向)이 있으시거든 명리(名利)에 초연(超然)하셨던 공()의 신단(神壇) 앞에 나가셔서 오염(汚染)된 자아(自我)의 심금(心襟)을 고백(告白)하시고 남은 생애(生涯) ()과 같이 청렴결백(淸廉潔白)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힘쓰겠다고 맹서(盟誓)하실 분은 없으신지?

 

서기 199010

문학박사(文學博士) 교육학박사(敎育學博士) 청주후인(淸州后人) 한갑수(韓甲洙) 삼가 짓고

경주후인(慶州后人) 김동일(金東一) 삼가 쓰다

후손일동(後孫一同) 삼가 굳게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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