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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石陵君 諱 龍 神道碑銘
작성자 관리자 [2020-02-03 19:4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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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릉군 휘 용 신도비명(石陵君 諱 龍 神道碑銘)

 

비상한(非常)한 재주가 있는 연후(然後)에 비상한 공()이 이루어지니 국가(國家)에서는 비상한 은전(恩典)으로써 갚게 되며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내려 태산(泰山)이 갈아 없어지고 황하(黃河)가 띠가 될 때까지 영세(永世)토록 보답(報答)을 맹서(盟誓)함은 국가(國家)의 상전(賞典 : 공로의 크고 작음에 따라 상을 주는 규정)에 있으며 역사(歷史)를 고증(考證)하면 실로 일목요연(一目瞭然)한 것이다.

 

오호라 선조(宣祖) 25년 임진(壬辰, 서기 1592) ()에 전국이 뒤흔들리고 대가(大駕 : 임금이 타는 수레)가 서쪽으로 이어(移御)하니 사람들이 모두 혼비백산(魂飛魄散)하여 한 사람 남김없이 꿩과 토끼처럼 흩어졌다.

()은 사복시(司僕寺) 판관(判官)으로 험난(險難)함을 무릅쓰고 임금을 업고 말고삐를 잡으며 몸으로 호위(護衛)하며 적()을 쫓으며 천리길을 호가(扈駕 : 임금의 수레를 따라감)하여 용만(龍灣)에 도달하니 임금이 근심하며 말하기를 수레가 개성(開成)을 떠날 때 일이 심히 급박(急迫)하여 개성 청서관(淸署官)에 종묘(宗廟)의 사주(社主)를 봉안(奉安)하였는데 누가 능히 봉환(奉還)할꼬 하니 이때에 공()이 분연(奮然)히 일어나 명()에 응()하므로 임금이 마구간에 있는 어마(御馬)와 비단전대를 내리니 정기(精騎 ) 3천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이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행군(行軍)하여 청석관(靑石關)에 이르렀을 때 밤을 틈타 성()을 넘어 들어가 묘사주(廟社主)를 들고 나오는데 적()이 비로소 깨닫고 대병(大兵)으로 쫓아왓 포위(包圍)하였는데 따라온 병졸 가운데 겨우 16인이 남았다. ()이 칼을 들어 적()을 내려치니 죽인 자가 백여 명이 되는지라 적()이 드디어 물러서는데 공() 또한 중상(重傷)을 입어 왼쪽 뺨이 깎이고 왼쪽 귀가 떨어졌다. ()은 오로지 아픔을 참고 질주(疾走)하여 5일을 가서 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멀리 거둥할 때에 머무르는 곳)에 이르러 복명(復命 : 어떤 일의 결과를 그 일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이 보고함)한 후에야 땅에 쓰러져 혼절(昏絶)하니 임금이 친히 약()을 보내주셨다.

 

여러 날 뒤에 되살아나거늘 이금이 불러서 물어 가로되 네가 무슨 관작(官爵)을 원하느냐 하는데 대답하기를 신()이 실로 어리석고 녹록(碌碌 : 평범하고 보잘 것 없음)하여 감히 관직(官職)을 감당하지 못하오니 원컨데 성무(聖武)를 크게 떨치시어 옛 땅을 회복(恢復)하고 난여(鑾輿 : 임금이 타는 가마)가 속히 서울로 돌아가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은 마땅히 덕화(德化)를 노래하며 태평(泰平)을 함께 즐기면 족하옵고 그 이외에 어찌 감히 다른 것을 바라겠습니까 하였다. 환궁(還宮)하여 사명(賜名 : 공이 있는 신하에게 임금이 이름을 지어 하사함)을 용()자라고 하고 임금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어질게 여겼다.

 

선조(宣祖) 38년 을사(乙巳, 서기 1605)에 이르러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는데 공()에게는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竭聖效節協策扈聖功臣)의 호()를 내리고 이와 겸해 단서(丹書)와 노비(奴婢)와 전결(田結 : 논밭에 대하여 매기는 세금)을 내려서 이를 보답(報答)하니 이로써 죽백(竹帛 : 역사)에 빛남이니 성대(盛大)하지 않겠는가?

 

()의 휘()는 용()이요 자()는 여견(汝見)이고 호()는 석천(石泉)이며 성()은 전씨(全氏)이고 관()은 정선(旌善)이라. 시조(始祖)의 휘()는 섭()이니 온조왕(溫祚王)을 도와 백제(百濟)의 기업(基業)을 창건(創建)하였으며 그 원훈(元勳)으로 환성군(歡城君)에 봉해졌고 7세가 내려와 휘() ()은 신라(新羅) 때에 정선군(旌善君)이요, 8세가 내려와 휘() 이갑(以甲)은 고려(高麗)태조(太祖)를 도와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고 마침내 달성(達成)의 동수(桐藪)에서 순절(殉節)하였다. 태사(太師)의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고 이로부터 대대로 내려오면서 계속하여 헌면(軒冕 : 높은 관리가 타던 초헌과 머리에 쓰는 관)이 이어져 혹은 지위(地位)가 재상(宰相)에 이르러 계절따라 은혜(恩惠)가 내리었고 혹은 공렬(功烈)을 세워 군호(君號)를 받은 사람이 무릇 67인이나 된다.

 

17세를 내려와 휘() ()은 부사직(副司直)이니 비로소 조선(朝鮮)에서 벼슬을 하기 시작하였다. () ()을 두니 교관(敎官)이고 휘() 진우(振羽)를 두시니 중직대부(中直大夫)이며 휘() 천주(天柱)를 두시니 좌상시(左常侍)이고 만춘(滿春)을 두시니 목사(牧使)인 바 공()에게 5대조가 된다.

 

고조(高祖)의 휘()는 정규(井奎)이니 생원(生員)이고 증조(曾祖)의 휘()는 감()이니 증좌통례(贈左通禮)요 조()의 휘()는 거강(居康)이니 부사직(副司直)으로 증형조참의(贈刑曹參議)이며 고()의 휘()(應祖)이니 증호조판서(贈戶曹判書)하고 순충보조공신(純忠輔祚功臣)의 호()를 하사(下賜)받았는데 이상 3대는 공()이 귀해졌기에 상()을 준 것이다.

()은 명종(明宗) 14년 기미(己未, 서기 1559) 513일에 태어나셨는데 귀가 크고 건장(健壯)하며 남보다 훌륭하였고 일찍이 궁마(弓馬)의 예()를 익혔으며 항상 적개심(敵愾心)을 품고 있던 중 대란(大亂)을 만나 이 외훈(巍勳 : 뛰어나게 큰 공훈)을 이루었으니 가히 처음의 품은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광명시(光明市) 노은사동(老隱寺洞) 추동(楸洞) 뒤편 간좌원(艮坐原 : 동북쪽을 등진 방향)에 장사(葬事)하였다.

 

()은 세 번 장가를 가셨는데 초배(初配)에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니 천억(天億)의 따님이고 계배(繼配)에 남양홍씨(南陽洪氏)니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종(禮宗)의 따님이며 삼배(三配)에 해주최씨(海州崔氏)니 묘()는 공()의 묘()에 다 부장(附葬)하였다. 5남을 두시니 맏이 대익(大翼)은 부사(府使)요 다음 대준(大俊)은 생원(生員)이고 다음 대호(大豪)는 통덕랑(通德郞)이며 다음 대붕(大鵬)은 부호군(副護軍)이고 다음 대봉(大鳳)은 문과감정(文科監正)이다.

 

대익(大翼)5남을 두었는데 이항(以恒)은 생원(生員)이고 이복(以復)은 처사(處士)이며 이연(以連), 이정(以鼎)은 생원(生員)이고 이희(以希)가 막내이다.

대준(大俊)7남을 두었는데 영달(英達)은 부호군(副護軍)이고 수란(壽蘭)은 충순위(忠順衛)이며 사원(泗元)이고 언보(彦輔)는 군자감정(軍資監正)이며 다음은 언양(彦暘)이며, 언남(彦楠)은 첨추(僉樞)이고 봉남(鳳攬)은 충의위(忠義衛)이다.

대호(大豪)2남을 두었는데 충세(忠世)는 참봉(參奉)이고 호원(浩元)이 있다.

대붕(大鵬)3남을 두었는데 일부(日孚)는 판관(判官)이고, 다음은 일상(日尙)이며 일영(日永)은 사직(司直)이다.

대봉(大鳳)은 남이니 자홍(自弘)이다.

이하는 자손이 번창(繁昌)하여 다 기록하지 않는다.

 

오호라 공()은 미관말직(微官末職)인 서료(庶僚 : 모든 일반 벼슬아치)로서 창황(蒼皇 : 미처 어찌할 사이도 없이 매우 급작스러움)할 때를 당하여 분발(奮發)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천리길을 호성(扈聖)하였음은 진실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위(安危)만을 생각해 떠날 때에도 홀로 떠나지 않는 단단한 충성심(忠誠心)이 아니면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의당 그 공훈(功勳)에 대한 임금의 너그러운 녹()을 후손들이 받아야 할 것이다.

 

()의 영정(影幀)3()이 있는데 임금을 업은 1()은 충훈부(忠勳府)에 봉안(奉安)되고 1()은 장단(長湍)의 어느 한 종파(宗派)의 가문에 봉안되었으며 나머지 1()은 성주(星州)의 제4파의 집에 봉안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향사(享祀)하고 있다.

지금 명()을 부탁하는 사람은 장단(長湍)의 영준(永俊)과 성주(星州)의 종권(鍾權)이니 모두 공()12세손이다.

이에 의당(宜當) ()을 지으니 명왈(銘曰) 삼생(三生 : 전생, 현생, 후생)에 한 분만 섬기는 사람을 기록(記錄)하여 말하기를 목숨바쳐 죽을 곳 있으니 그 정성(精誠)은 일성(日星)을 꿰뚫는다.

 

오호라 전공(全公)은 세찬 바람에도 굳건히 버티는 풀과 같아 천리 먼 길을 업고 고삐잡고 엎어지고 자빠지며 몸으로 호위(護衛)하고 어가(御駕)를 배종(陪從)하여 용만(龍灣)에 다다르니 묘사주(廟社主)를 봉환(奉還)하란 명()을 받들었네. 천 겹으로 쌓인 적진(敵陣)에 검극(劍戟)이 번득이니 격투(格鬪) 끝에 포위(包圍)는 무너졌으나 볼이 떨어지고 귀가 깎였더라. 5일을 다친 채로 강행(强行)하여 드디어 행재소(行在所)에 이르렀네. 임금이 와서 보고 슬퍼하며 친히 약을 전해주었다. 굳세 그 용기(勇氣)와 열렬(烈烈)한 그 충성(忠誠)은 충근정량(忠勤貞亮 : 임금을 섬기는데 근면하고 진실로 곧음)이니 그 훈업(勳業)을 철권(鐵券)에 기록(記錄)한다. 아왕산(兒旺山) 북쪽 묘()와 당()이 있는 곳에 내 명()을 돌에 새겨 의열(義烈)을 드높이리라.

 

서기 1935년 병자 하지절 의왕 이강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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