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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씨세보서 [ 1887년 ]
작성자 관리자 [2021-07-15 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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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문(2021전과웅) ]

 

 

 

전씨세보서

 

 

북송(北宋)의 문정공(文正公) 범중엄(范仲淹)이 오(吳)나라 시절에 종족(宗族)이 심히 많아져서 서로 친소가 있으나, 조종[祖宗(시조)]으로부터 시작된 똑같은 자손(子孫)이라고 보는 것이 진실이고 바른 견해라고 말하였다.

대개 같은 성씨의 완전한 근본은 한 사람의 몸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기복(期服)과 소공(小功) 대공(大功)을 행하는 가까운 친척과 단면[袒免(복을 입지 않음)]의 먼 친척이 길거리에서 만나도 알지 못하여 남과 같이 된 사람도 그 근원을 따라 보면 한 사람의 후예(後裔)인데 만약에 족보를 닦아 여러 문중의 사람들을 하나의 계통으로 합하지 않으면 누가 능히 이를 상세히 알 수 있겠는가? 족보는 소위 여러 가지 다름을 계통으로 통합하여 하나의 근원으로 복귀하고, 그 근본에서 효도와 우애로 종친 간에 화목함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족보수보서(族譜修譜所)를 설치함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전씨는 널리 이름난 성씨(著姓)이다.

살펴보니 백제 다루왕때 승상(은솔)을 역임한 휘 호익(虎翼)公을 시조로 하며 7세를 전하여 휘 선(愃)은 전법판서(신라때 관직명은 추부시랑)을 역임하였으며 정선군(旌善君)으로 피봉(被封)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삼았다.

그 후 8세 고려조에 태사를 역임한 휘 이갑(以甲)公이 장절공 신숭겸公과 동수산(팔공산) 전투에서 함께 순국한 공로로 재차 정선군(旌善君)에 피봉(被封)되고 시호는 충렬을 받았고 한천서원과 도계서원을 건립하여 배향되시었다.

이상의 15세는 소목(昭穆)이 질서정연하나 중간의 여러 대는 여러 번의 전쟁으로 인한 화재로 인하여 계첩(系牒)이 흩어져 없어졌다.

 

특별한 분파에서는 세(世)와 이름(諱)과 나라에서 내린 시호(官諡)를 상세히 알 수 있는 분이 있도다.

휘 윤장(允臧)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역임하였으며 고려 시대 충혜왕 때 시호를 석릉군(石陵君)으로 받았다. [1: 석릉군파]

 

휘 방숙(邦淑)은 고려 시대 충렬왕 때 용성군(龍城君)으로 피봉(被封)되었다. 6세에 휘 원발(元發)이 있었으니 호는 국파(菊坡)이며 중국조정에서 금자영록(金紫榮祿) 집현 태학사(集賢太學士)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조선 조정에서 중국에 받치는 조공(租貢)인 금과 은, 비단과 말(馬)의 수량을 줄이는 공로(감면해줄 것을 아뢰어서 승낙을 받음)를 세웠고 조선으로 돌아와서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을 봉(封) 받았다. 용궁에 거주하며 난계 김득배, 익재 이제현, 척약재 김구용과 도의로 교류하였고 많은 시가(詩歌)를 서로 불러 주고 받은 내용이 동문선(東文選)에 등재되어 있다. 태종대왕이 축산(竺山) 일구(一區)를 하사하였으며 소천서원을 추가로 건립하여 배향되시었다. [2: 용궁파]

 

휘 숙(淑)은 관성군(管城君)에 피봉되었고 9세 휘 식(湜)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을 역임하였으며 호는 사서(沙西)이며 임진왜란 시 적을 무찌르는 공로가 많았고 황도(皇都)에서 봉사(奉使)하는 계기가 되었고, 세상 사람들이 덕망이 높다고 일컬었다. 좌의정에 증직(贈職)되었고, 충간(忠簡)을 시호로 받았다. 옥동서원을 건립하여 배향되시었다. 휘 극항(克恒)은 호는 규천(虯川)이며 충간(忠簡)公의 장자이다. 병자호란 시 남한산성에서 임금을 호위하다가 순절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정려(旌閭)하였다. [3: 옥천파]

 

고려 공민왕 때 휘 우화(遇和)는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으며, 장자 휘 분(賁)은 시호가 평간(平簡)이었다. 차남 휘 순(順)은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차남 휘 승(雨+承)은 시중평장사를 역임하였다.

평간공(平簡公) 휘 분(賁)의 장자 오륜(五倫)은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호는 채미헌(採薇軒)이었다. 포은 정몽주와 목은 이색 두 분 선생이 자설(字說)과 시(詩)를 지어 증정하였는데 기대함이 심히 중하였으며 포은과 목은의 문집에 등재되어 있다. 정선군 남면 낙동리 서운산에 돌아와 은거하였으며, 후학(後學)이 흠모하여 서산서원을 건립하고 배향되시었다.

채미헌公의 장자 휘 맹겸(孟謙)은 상호군이었으며 영송리(경남 거창면)를 선택하여 거주하였으며 초정(草亭)을 지어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증손 휘 철(轍)은 사직(司直)이었으며 그 정자를 중수하였으며, 퇴계 이황 선생께서 사락(四樂)이라고 편액을 내려주셨으며 시문(詩文)을 증정하였다.

차자(次子) 휘 숙겸(叔謙)은 현감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 효우(孝宇)는 홍문관 교리(校理)를 역임하였으며 맑은 덕행으로 널리 알려졌다. 5세손 순인(舜仁)은 승문원 교리(校理)를 역임하였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특별히 금으로 주조한 향로를 선물로 하사받았다.

평간공(平簡公) 휘 분(賁)의 차자(次子) 휘 오기(五紀)는 삼중대광(三重大匡)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했으며 아들(子) 두병(斗柄)은 중랑장이었다.

[4: 채미헌파]

 

시중(侍中) 승의 자(子) 휘 빈(賓)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서 신돈(辛旽)의 죄과를 논하여 탄핵하여서 축출하였으며 숙천군수(肅川郡守)를 보임 받았다. 태종 때 간의대부(諫議大夫)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평강백(平康伯)에 봉해졌다. 5세 휘 유형(有亨)은 호는 학송(鶴松)이며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판을 역임하였으며 이이첨의 옳고 그름을 따져 물리치고 모문룡(毛文龍)에게 편지를 보내고 명나라에 아뢰어서 군량미 20만석과 포의(베옷)를 탕감받았다. 중봉(重峯) 조헌(趙憲)과 만나 통곡하면서 함께 의병을 모으기로 도모하였다. 임금의 부름에 응하여 논리가 빈틈없이 속속들이 세밀(細密)하였기에 청안현감(淸安縣監)을 제수받았다. 왜병을 참수하는 공을 세워 이조판서를 증직 받았으며 시호는 의민(懿愍)이고 화암서원을 건립하여 배향하였다. 장자 우(????), 차자(次子) 강(鋼), 차자(次子) 현(䥪) 모두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다.

[5: 평강파]

 

천안 휘 승(昇)은 고려 충렬왕 때 병부상서, 숭문학사를 역임하였으며 영평군(寧平君)에 봉해졌다. 영평군의 자 휘 신(信)은 호가 백헌(栢軒)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에 걸쳐서 보문제학(寶文提學), 상호군(上護軍), 밀직사(密直事)를 역임하였다. 조선 태종대왕이 친필로 왕지(王旨)를 내려서 전신(全信)을 권농사(勸農使), 병마도중익(兵馬道中翼), 단련부사자(鍛鍊副使者)로 제수하였으며 대왕께서 친히 그곳을 방문하였기 그 마을을 왕방촌(王訪村)이라 칭하였고, 친히 하사한 산을 국사봉(國賜峯)이라 이름을 짓게 되었다. 금계서원(錦溪書院)을 건립하여 배향되시었다.

[6: 천안파]

 

시조(始祖) 이래 누세(累世)에 걸쳐서 환하게 빛났으니, 즉 국가 위기 상황에 충성으로 우뚝하게 뛰어난 공훈을 세워서 채읍(采邑)을 받고 봉군(封君)을 받은 높은 벼슬을 역임한 관리가 출현하였다. 이들이 또한 거주지와 관직과 충훈(忠勳)에 따라 각 파조(派祖)가 되었다. 즉 채읍(采邑)한 거주지에 따라 본관(本貫)을 나누었으니 12개의 관향(貫鄕)으로 많아지게 되었다. 이른바 정선, 용궁, 옥천, 평강, 성산, 죽산, 옥산, 천안, 나성, 감천, 기장, 완산이다.

분파가 많이 생긴 후 족보의 세계(世系)가 소원(踈遠)해져서 오래된 우의(友誼)를 증명할 수 없게 되어 점차 오다가다 길에서 만난 사람과 같이 되었다. 이에 각파(各派) 모두는 이를 두려워하여 후손들이 그 각각의 관향(貫鄕)을 합하여 하나의 족보를 만들게 되었다.

그 세대의 차례에 따라 윗세대를 내리고 새로운 세대로 이동하는 데 근거 없는 자와 의심스러운 사례는 소목을 비워두어야 한다. 오직 대의를 위해서는 기록하거나 보충할 수 있도다. 범중엄(范仲淹)이 조종[祖宗(시조)]으로부터 시작된 같은 자손(子孫)이라고 보는 것이 바른 견해라고 말함과 상통함이라.

 

후손 상순이 수년간에 걸쳐서 재물을 모으고, 일할 사람을 규합하여 계획을 세웠다. 상현 상수 재호 응규가 매체 두 종류 이상의 이본(異本)을 대조하여 틀린 데를 고쳤고 인쇄(印刷)할 목적(目的)으로 나무 판에 글자를 새김에 관여하였다. 희호 영현은 직첩(職牒)과 녹권(錄券), 이름을 수집하기 위하여 장거리를 가서 발이 묶이기도 하였다. 모든 이들이 정성을 다해 힘을 합하여 족보(族譜)를 완성하는 날에 나에게 와서 서문(序文)을 청하였다.

 

돌이켜보니 늙고 병들어서 실제로 후세에 전할 만한 모범이 되는 말과 글을 쓸 방안이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옛 족보의 서문(序文)과 비문(碑文) 등 근거가 되는 것을 모아서 제출하였기에 이들의 구함에 응하여 비로소 쓰게 되었다. 어찌 쓸 수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드디어 서문(序文)을 쓰노라.

 

 

1887년 6월 하순

숭록대부 전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홍문관제학

시강원 좌빈객 풍산 홍우길 敍

 

 

 

 

 

[ 1990년 해문 ]

 

 

전씨세보서

 

 

范文正이 말하기를 吳나라 時節에 여러 宗族이 살았으나 멀고 가까움을 떠나 始初의 祖宗(始祖)로부터 모두 한 子孫임이 眞實일진대 大槪 한 姓의 族親은 한 사람의 몸에서 비롯되었다. 期年服과 大小功服을 袒免(服을 입지 않음)해 남과 같이 된 者도 그 根源을 따라 보면 한 사람의 後裔인데 萬一 族譜를 닦아 和合하지 않으면 누가 能히 仔詳함이 있으리오

譜라 함은 所以萬餘가 다른 支派를 한 根源으로 復歸하여 孝道와 悌恭 그리고 宗族間에 親睦을 曉示 함이니 族譜修譜所를 設置함이 重要하지 않겠는가?

全氏의 姓은 우리나라 姓氏 中에서 著姓(大姓)인 바 詳考해 보면 百濟 多婁王朝대 丞相(恩率)을 지내신 諱 虎翼公을 始祖로 七世의 諱 愃은 典法判書(當時新羅官職 秋部侍郞)께서 旌善君에 被封되어 後仍들이 貫鄕으로 삼았고 其後 八世에 高麗開國功臣 太師 諱 以甲께서 申壯節公崇謙과 더불어 桐藪山에서 殉國하여 다시 旌善君을 封해 받고 諡號를 忠烈이라 賜號되어 寒泉 道溪 두 書院을 建立하여 配享되시다. 以上 十五世의 昭穆이 秩序가 整然하게 確立되었으나 中間數代에 여러 번 兵亂을 겪다 보니 世系家牒에 分派와 世代 및 官爵諡號의 可詳함이 散逸되었다.

諱 允臧이 있으니 門下侍郞平章事로 高麗忠惠王時에 石陵君에 被封되었고 高麗忠烈王時에 龍城府院君에 被封되신 諱 邦淑이 계셨고 六世에 내려와서 諱 元發은 號가 菊坡로 中朝(元나라)에 들어가 벼슬하여 金紫榮祿大夫集賢太學士가 되어 金銀과 비단 그리고 馬匹을 貢物로 秦蠲(진상)하고 高麗로 還國하여 竺山府院君을 受封받아 龍宮에 눌러살면서 蘭溪 金得培와 益齋 李齊賢과 惕若齋 金九容 等과 더불어 道義를 爲해 交際하며 酬唱하였음이 東國文獻에 登載되다. 朝鮮 太宗大王이 命하여 竺山고을 한 區域을 下賜하여 蘇川書院을 建立 配享되다.

諱 淑은 管城君에 被封되었고 九世를 내려와 諱 湜은 文科로 參判에 이르고 號는 沙西로 壬辰 倭亂時에 義兵을 일으켜 賊을 섬멸함에 功이 많아 皇都奉使케되니 世上에 德을 쌓았다. 말한다 左議政에 贈職되고 諡號를 忠簡이라 賜號하고 玉洞書院을 建立 配享되다. 虬川 諱 克恒은 忠簡公의 長子인데 丙子胡亂時 南漢山城에서 聖上을 扈駕하다 殉職하니 旌閭門을 나라에서 내리다.

高麗朝 恭愍王 時 諱 遇和는 官이 大提學이고 長子 諱 賁은 諡號가 平簡이며 次男 諱 順은 星山伯을 封하였고 次男 (雨+承)은 侍郞平章事이고 平簡公의 長子 諱 五倫은 官이 判書이며 號는 採薇軒이다. 鄭圃隱과 李牧隱 두 先生께서 字說과 詩를 지어주니 期詡(호탕함)함이 甚히 重하더라. 두 先生의 文集에 이르기를 瑞雲山에 들어가 隱居하였다고 登載되였으니 後世 사람들이 欽慕하여 西山書院에 配享되었고, 長子 諱 孟謙은 上護軍인데 迎送里에 살면서 茅亭을 建立하고 休息했고 曾孫 司直 諱 轍이 그 亭子를 重修하니 退溪 李先生께서 四樂亭이라 詩文을 지어주었다. 次子 叔謙은 官이 縣監이며 아들 孝宇는 弘文館校理를 歷任 淸德함이 著名했고 五世孫 舜仁은 弘文館校理로서 두 번 中國 明나라에 使臣의 一員으로 들어가 特命으로 金鑄爐(금으로 만든 香爐)를 下賜 받았다.

平簡公의 次子 諱 五紀는 官이 三重大匡典法判書요 아들 斗柄은 官이 中郎將이며 侍郞의 子 諱 賓 高麗朝 恭愍王때 文科에 登第하여 辛旽을 論劾해 逐出하였다. 肅川郡守를 歷任하였고 朝鮮 太宗朝에 諫議大夫 寶文閣大提學으로 陞任하여 有功으로 平康伯에 被封되였으며 또 五世의 諱 有亨은 號가 鶴松인데 朝鮮 宣祖朝에 文科로 刑曹參判이 되어 李爾瞻을 排斥하기 위해 論穚를 써 上呈하니 毛文龍(椵島都督)이 上書를 低止하다가 이윽고 毛文龍이 明나라 天子에게 奏謁하니 軍糧米 二十萬石과 麻布 衣類를 蕩減 받았다. 때는 壬辰倭亂을 當하여 趙重峯과 握手하고 痛哭하며 드디어 倡義兵을 募集하여 敵兵을 막아 大勝勳功하니 聖上께서 召命함을 입어 獨對함이 甚히 言路가 整然하니 王이 感歎하여 王名으로 卽時 淸安縣監을 拜하였고 倭兵을 斬戮한 功이 많아 吏曹判書를 贈하고 諡號를 義愍이라 賜諡하고 花巖書院을 建立配享되다. 長子는 ????이요, 次는 鋼이고, 次에 䥪인데 모두 다 孝行으로 旌閭門을 받았다.

天安君 諱 昇은 高麗 忠烈王때에 兵部尙書崇文學士시고 寧平君의 子 信은 號가 柏軒이요, 諡號는 文孝公인데 忠烈王 忠宣王 忠肅王 忠惠王 四代王朝를 補佐하여 寶文閣提學上護軍密直司事에 이르렀다. 朝鮮 太宗王이 親筆로 王旨를 全信에게 내려 勸農使를 除授하고 兵馬使道中翼鍛鍊副使를 兼職케 하였고 太宗大王이 몸소 그 마을을 親히 訪問하였다하여 그 마을 이름을 王訪村이라하고 其山一帶를 下賜한 山名을 國賜峯이라 하며 錦溪書院을 建立하고 配享되다.

돌이켜 詳考하여 보니 始祖 以來로 여러代에 걸쳐 爲國忠節로 燀爀(빛나는)한 嵬勳을 갖추어 封君을 받아 采邑을 받은 大官과 崇爵의 居地를 따라 各各 派祖로 높이어 分貫을 하여 十二分派에 이르렀으니, 旌善 龍宮 沃川 平康 星山 竹山 玉山 天安 羅城 甘泉 機張 完山派 等이다.

分派가 이미 많이 되어 後屬이 疎遠하고 系譜가 徵據 不充分하여 百世의 誼가 漸漸 行路人과 같이 對하게 이르렀으니 무릇 各派가 오로지 이 두려움 때문에 이에 各貫을 合하여 한 族譜를 이루어 그 世次의 옮김과 昭穆의 無稽(順序가 없음)한 빈자리에 부치고 行烈에 疑訝한 者는 오로지 大義를 발휘하여 間或 補修함도 있으니 范公이 이른바 自初의 祖宗으로부터 모두 한 子孫이라 말함을 卽見함이라.

後孫 相順이 數年을 두고 많은 宗人에게 募金을 하고 收單하여 相鉉 相壽 在浩 應奎와 더불어 校正하고 造板했고 羲浩와 永賢이 收單하여 協力 竣役하던 날 遠路에 發涉을 하고 와 弁文(序文)을 請하거늘 돌아보건대 늙고 病든 몸이 實로 立言(後世에 龜鑑이 될 만한 말)을 못한다고 하였으나 方然히 그 舊譜序와 碑文 等 可히 證據할만한 것을 가지고 와서 求言함을 對應케하니 이 이른바 著述을 作成하지 않겠는가? 드디어 敍述하노라.

 

崇禎紀元後五 丁亥(一八八七年) 六月 下旬

崇祿大夫前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弘文館提學

侍講院左賓客 豐山 洪祐吉 敍

 

 

 

 

 

[原文]

 

 

全氏世譜序

 

 

范文正曰吳中宗族甚衆固有親踈自祖宗視之則均是子孫誠哉是言也盖一姓之族本諸一人之身推而至於期功袒免而路人者追原其初則一人而巳苟不譜而合之孰能詳之有譜所以合萬殊而歸一原以示其本孝悌而敦睦也族譜之設顧不重歟全氏著姓也按其古籍百濟多婁王時丞相(一作恩率)諱虎翼爲始祖傳七世諱愃典法判書封旌善君仍以爲貫其後八世麗朝太師諱以甲與申壯節崇謙同殉桐藪再封旌善君諡忠烈建寒泉道溪兩院以上十五世昭穆有序中間幾代屢經兵燹系牒散逸特次分派世諱官諡之可詳者有諱允臧門下平章事勝國忠惠時封石陵君諱邦淑勝國忠烈王時封龍城君六世而有諱元發號菊坡中朝金紫榮祿集賢太學士奏蠲金銀繭馬之貢東還封竺山府院君退居龍宮與金蘭溪得培李益齋齊賢金惕若九容爲道義交多酬唱載東文選我太宗大王命賜竺山一區追建蘇川院有諱淑封管城君九世諱湜文參判號沙西壬辰倡義功多殲敵皇都奉使世稱有德贈左揆謚忠簡建院玉洞虬川諱克恒忠簡之長子丙子南城扈駕殉節命旌勝朝恭愍時有諱遇和官大提學長子諱賁謚平簡次順封星山伯次(雨+承)侍中平章事平簡公長子五倫官判書號採薇軒圃牧兩先生贈以字說詩作期詡甚重載兩隱文集歸隱瑞雲山中後人慕之建院西山薇軒長子諱孟謙上護軍卜居迎送里搆草亭休息曾孫司直諱轍重修其亭退溪李先生扁以四樂贈以詩文次子叔謙官縣監子孝宇歷玉署著淸德五世孫舜仁校理再聘皇朝特蒙命賜金鑄爐平簡公次子諱五紀官三重大匡典法判書子斗柄官中郎將侍中(雨+承)之子諱賓勝朝恭愍時文科論劾辛旽出補肅川郡我太宗朝諫議大夫大提學封平康伯五世諱有亨號鶴松我宣祖朝文科刑曹參判論斥李爾瞻抵書毛文龍奏天朝蕩減軍糧二十萬石布衣時遭龍蛇之變與趙重峯握手痛哭合謨倡義被召對語甚詳密即拜淸安縣多有斬倭功贈吏判謚懿愍建院花巖長子????次鋼次䥪皆以孝行旌閭天安君昇勝國忠烈時兵部尙書崇文學士封寧平君子諱信號栢軒謚文孝歷事忠烈忠宣忠肅忠惠四朝寶文提學上護軍密直事我太宗朝親筆王旨全信除勸農使除兵馬道中翼除鍛鍊副使者太宗大王親訪其里曰王訪村賜其山名曰國賜峯建錦溪院歷考始祖以來累世燀爀危忠巍勳具有封邑大官崇爵亦有居地忠勳官爵則各尊派祖封邑居地則分作貫籍以至十二貫之多曰旌善龍宮沃川平康星山竹山玉山天安羅城甘泉機張完山也派分旣多後屬踈遠系籍無徵百世之誼漸至行路凡此各派惟是之懼仍其各貫合成一譜其世次之迭遷昭穆之無稽者付之闕疑之例惟其大義冀或有補於范公所謂自祖宗視之則均是子孫之語矣後孫相順經紀有年鳩財謀衆與相鉉相壽在浩應奎校讐鋟梓羲浩永賢遠途褁足收牒錄名合力彈誠竣役之日來請弁文顧以老且病實無立言之方然而猶撮其舊序及碑文之可據者以應其求是所謂述而不作歟遂爲之序

 

崇禎紀元後五丁亥六月下澣

 

崇祿大夫前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弘文館提學

侍講院左賓客 豐山 洪祐吉 敍

 

 

 

 

◎ 범중엄[ 范仲淹 ]

요약

중국 북송(北宋) 때의 정치가·학자. 인종의 친정이 시작되자 간관이 되었으나 곽 황후의 폐립문제를 놓고 찬성파인 재상과 대립해 지방으로 쫓겨났다. 서하 대책을 맡고 그 침입을 막은 공으로 승진하여 내정개혁에 힘썼으나 하송 일파의 저항으로 지방관을 지냈다.

출생-사망/989 ~ 1052

자/희문

시호/문정

국적/중국 북송

활동분야/정치

출생지/중국 장쑤성 쑤저우

주요작품

《범문정공집》(24권)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 출생. 자 희문(希文). 시호 문정(文正). 인종(仁宗)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자 부름을 받아 중앙에서 간관(諫官)이 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 곽황후(郭皇后)의 폐립문제를 놓고 찬성파인 재상 여이간(呂夷簡)과 대립했기 때문에 다시 지방으로 쫓겨났다. 그 뒤로 구양수(歐陽修) ·한기(韓琦) 등과 함께 여이간 일파를 비난하였으며, 자기들 스스로 군자의 붕당(朋黨)이라고 자칭하여 경력당의(慶曆黨議)를 불러일으켰다.

1038년에 이원호(李元昊)가 서하(西夏)에서 제위(帝位)에 오르자, 산시경략안무초토부사[陝西經略安撫招討副使]가 되어 서하 대책을 맡고, 그 침입을 막았다. 그 공으로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고, 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 부재상에 해당)로 승진하여 내정개혁에 힘썼으나, 그를 미워하는 하송(夏悚) 일파의 저항이 강하여 다시 지방관(地方官)을 역임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시문 등을 모은 《범문정공집(范文正公集)》(24권)이 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범중엄 [范仲淹] (두산백과)

 

◎ 홍우길(洪祐吉)

조선 후기 한성부판윤, 대호군,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성여(成汝), 애사(靄士), 춘산(春山), 연탄(硏灘), 효문(孝文)

분야/조선시대사

유형/인물

성격/문신

성별/남

출생일/1809년(순조

사망일/1890년(고종 27)

본관/풍산(豊山,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경력/형조판서, 한성부판윤, 대호군, 이조판서

시대/조선

정의

조선후기 한성부판윤, 대호군,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여(成汝), 호는 애사(靄士)·춘산(春山)·연탄(硏灘). 홍희택(洪羲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필영(洪必榮)이고, 아버지는 동지돈녕부사 홍정주(洪定周)이며, 어머니는 조현성(趙顯誠)의 딸이다. 청주에서 살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50년(철종 1)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정언·지평·사간을 거쳐 1856년에 대사성이 되었다. 그 뒤 이조참의·예방승지를 거쳐 1859년 경상도관찰사, 1860년 이조참판, 공조·이조·예조·형조의 판서, 한성부판윤, 대호군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림을 잘 그렸다.

참고문헌

철종실록(哲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집필자

집필 (1998년)이원균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홍우길(洪祐吉))]

 

◎ 전이갑 [ 全以甲 ]

본관은 정선(旌善)이고 자는 자경(子經), 호는 도원(挑源)이다. 정선전씨의 중시조인 정선군(旌善郡) 전휘선(全諱宣)의 7세손 전우상(全禹相)의 아들로 태어났다. 관직에 올라 기랑(騎郞)을 지내던 중 왕건(王建)을 만나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신숭겸(申崇謙)등과 함께 고려의 영토 개척에 큰 공을 세웠으며, 925년(태조 8) 태사(太師)에 추대되었다. 927년(태조 8) 견훤과 달성(達成) 팔공산에서 싸우던 중 태조(太祖)를 구한 후 신숭겸, 김락 장군과 함께 전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이갑 [全以甲] (두산백과)

 

◎ 전윤장 [ 全允臧 ]

고려후기 첨의평리, 첨의찬성사 등을 역임한 관리. 문신.

 

◎ 전방숙(全邦淑)

벼슬이 평장사(平章事)였으며,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출처: 증보문헌비고

 

◎ 전원발 [ 全元發 ]

요약

고려말·조선초의 문신이다. 1315년 원나라의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원나라에서 영록대부병부상서 겸 집현전태학사 등을 지냈다. 뒤에 귀국하여 조선 초 축산부원군에 봉해졌다.

 

본관은 용궁(龍宮)이고, 호는 국파(菊坡)이다. 민부전서(民部典書) 진(珒)의 아들이다. 1315년(충숙왕 2) 원나라에서 고려인 인재를 뽑는 괴과(魁科)에 장원급제하여 영록대부병부상서 겸 집현전태학사(榮錄大夫兵部尙書兼集賢殿太學士)에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자주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는 바닷가에 위치하여 나라는 작은데 세공(歲貢)의 폐가 많습니다’라고 말하여 세공으로 인한 고려의 부담을 덜도록 노력하였다. 그가 벼슬을 그만두고 귀국할 때도, 당시의 황제인 순제(順帝)가 소원을 묻자, ‘다만 고려에서 거두는 공물(貢物)을 대폭 삭감해 주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대답하여 공물의 특감(特減)을 허락받았다고 한다.

김득배(金得培)·이제현(李齊賢)·김구용(金九容) 등과 교유하였으며, 조선 개국 후에는 축산부원군(竺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글씨에도 뛰어났는데, 유품으로 법주사자정국존비(法住寺慈淨國尊碑)의 글씨가 남아 있다. 용궁의 소천서원(蘇川書院)에 배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원발 [全元發] (두산백과)

 

◎ 전숙 [ 全淑 ]

옥천전씨 판서공파는 관성군 전유의 셋째 아들 전숙(全淑)을 파조로 합니다. 전숙은 아버지와 같이 봉익대부 판도판서의 관직을 지내고 관성군에 봉해졌습니다. 관직이 판서에 이르렀으므로 그 후손들을 '판서공파'라 합니다.

 

◎ 전식 [ 全湜 ]

정의

조선시대 대사간, 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옥천(沃川). 자는 정원(淨遠), 호는 사서(沙西). 전팽조(全彭祖)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혼(全焜)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전여림(全汝霖)이며, 어머니는 월성이씨(月城李氏)로 참봉 이신(李信)의 딸이다. 유성룡(柳成龍)·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왜적을 토벌해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 김응남(金應南)의 추천으로 연원도찰방(連原道察訪)이 되었다.

1599년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으로 전임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03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1607년 전적·예조좌랑과 정랑을 거쳐, 1611년 울산판관이 되어 고을 백성들의 교화에 힘썼다.

다음해 전라도도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 등과 산수를 유람해 세칭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라 일컬어졌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새 왕이 등위하자 예조정랑에 이어 수찬·교리가 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태복시정(太僕寺正)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천안에 이르러 집의가 되었으며, 연평군(延平君) 이귀(李貴)와 원수 장만(張晩)의 실책을 논하였다. 이어 병조참의·병조참지에 승진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갔다.

그 뒤 대사간·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했고, 왕이 도성으로 돌아오자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 뒤 예조참의와 예조참판에 임명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계(陞階)했으나 사양하였다.

1638년 대사간·대사헌을 거쳐 예조참판·대사성이 되었다. 왕이 순검사에 명해 하삼도의 수군을 정비하게 했으나 적절한 시책이 아니라고 반대하였다. 1642년 자헌(資憲)의 품계에 오르고 지중추부사 겸 동지경연춘추관사(知中樞府事兼同知經筵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그 뒤 재차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상주 백옥동서원(白玉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식 [全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전극항 [ 全克恒 ]

 

요약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병자호란 때 예조정랑으로 왕명을 받고 서울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본관은 옥천(沃川)이다. 자는 덕고(德古)·덕구(德久)이고, 호는 규천(虯川)이다. 대사헌을 지낸 전식(全湜)의 아들로 태어났다.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대교·검열·예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 예조정랑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려 했으나 서울을 지키라는 왕명을 받고 다시 돌아왔다. 그는 한성에서 수십 일을 머물며 성을 지키다가 적군에게 피살되었다. 도승지에 추증되으며, 1786년(정조 10)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극항 [全克恒] (두산백과)

 

◎ 전우화 [全遇和]

고려시대 예문각 대제학과 문화시중 평장사를 역임

 

◎ 전분(全賁)

벼슬이 전서(典書)였으며, 시호는 평간공(平簡公)이다.

[증보문헌비고]

 

◎ 전오륜 [ Jeon Ohryun , 全五倫 ]

정의

생몰년 미상. 고려 말의 문신.

 

개설

본관은 정선(旌善). 호는 채미헌(採薇軒). 대제학(大提學) 전분(全賁)의 아들이다. 고려 말에 고관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이성계 세력에 의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창업되자, 고려 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켜 두문동으로 들어간 인물로서 유명하다.

 

생애 및 활동사항

1373년(공민왕 22) 과거에 급제하였다. 1391년(공양왕 3) 우상시(右常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형조판서(刑曹判書)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392년(공양왕 4)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가 조선 태조에 의하여 본향안치(本鄕安置)의 처벌을 받았다. 이때 본향안치된 인물이 성석린(成石璘)·이윤굉(李允紘)·유혜손(柳惠孫)·안원(安瑗)·강회중(姜淮中)·신윤필(申允弼)·성석용(成石瑢)·정희(鄭熙) 등인데, 이들 중 성석린과 같이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살았던 인물들도 있었다. 뒤에 풀려나서 서운산(瑞雲山, 강원도 정선 소재)에 은거하였다.

두문동 72인 중의 한 사람이며, 뒷날 경상남도 안의(安義)에 소재한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전오륜의 유고(遺稿)와 행적 관련 자료를 모아놓은 책이 『채미헌실기(採薇軒實記)』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오륜 [Jeon Ohryun, 全五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전맹겸 [全孟謙]

判書 五倫 子 官 郡守

출처: 嶠南誌卷之六十 安義郡 人物

 

◎ 전철[全轍]

1481 1558 奉直郞 字 子由 號 四樂亭

 

◎ 전효우 [全孝宇]

[문과] 세종(世宗) 29년(1447) 정묘(丁卯) 친시(親試) 정과3등(丁科三等) 10위(20/26)

[이력사항]

선발인원 26명 [乙一等3‧丙二等7‧丁三等16]

전력/녹사(錄事)

관직/교리(校理)

관직/한림(翰林)

문과시험답안/책문(策問):법립폐립(法立弊立)

 

◎ 전순인 [ 全舜仁 ]

생애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1528년(중종 23)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였다.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로 있을 때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두 차례나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금으로 주조한 향로를 선물로 하사받았다. 그 후 풍천(豊川)·정선(旌善)·원주(原州)·청풍(淸風) 등의 수령을 지냈으며, 춘추관기사관 지제교(春秋館記事官 知製敎)·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순인 [全舜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전순인

 

◎ 전오기(全五紀)

벼슬이 전법 판서(典法判書)였다.

출처: 증보문헌비고

 

◎ 전빈(全賓)

생졸년 미상. 본관은 평강(平康).

『전씨 대동보(全氏大同譜)』에 의하면, 전빈(全賓)은 도시조(都始祖) 전섭(全聶)의 29세손이다. 그는 1371년(공민왕 20)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정언(正言)을 거쳐 숙천 군수(肅川郡守)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하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보문각 대제학에 올랐으며, 나라에 공을 세워 평강(平康)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평강백(平康伯)에 봉해졌다. 아들 전후백(全厚伯)은 세종 때 음보(蔭補)로 초계 군수(草溪郡守)에 올랐으며, 손자 전수산은 중종 때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고 전한다.

또 5대손인 전유형(全有亨)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고, 광해군 때 병조참판을 지낸 바 있다.

충북 괴산에 있는 의민사는 평강 전씨(平康全氏) 문중의 사당으로, 여기에는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 전빈(全賓)을 주향하고, 그 순손인 초계군수(草契郡守) 전후백(全厚伯) 외 14인을 배향하고 있다.

 

◎ 전유형 [ 全有亨 ]

요약

조선 중기 문신. 명나라에서 쌀 10만 석을 요구하자 특차사로 명나라에 가서 감량시켰고, 광해군 때 형조참판을 지냈다. 의술에도 능하여《오장도》를 그렸다.

본관 평강(平康). 자 숙가(叔嘉). 호 학송(鶴松). 시호 의민(義敏). 괴산(槐山)의 유생으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1594년 청안현감(淸安縣監)이 되었다. 1605년 정시문과에 장원, 이듬해 감찰에 발탁되고, 이때 명(明)나라에서 쌀 10만 석(石)을 요구하자 특차사(特差使)로 명나라에 가서 감량(減量) 시켰고, 광해군 때 형조참판을 지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반란군과 내통한다는 무고를 받아 성철(成哲) 등 37명과 함께 참형되었다. 의술(醫術)에도 능하여 《오장도(五臟圖)》를 그렸다. 1628년 신원(伸寃)되고, 이조판서가 추증되었으며 괴산 화암(花巖)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학송집》(1권)이 전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유형 [全有亨] (두산백과)

 

◎ 전우(全????)

[생원] 광해(光海) 7년(1615)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3등(三等) 48위(78/100)전우(全????)

 

◎ 전현(全䥪)

全䥪監役字兼汝號止善鋼之弟也六年居廬病痼

 

◎ 전승 [ 全昇 ]

요약

고려 후기의 관인이다. 충선왕 초 관제개혁을 실시할 때 승지로서 참여하였으며, 후에 좌부승지 판비서시사 보문각직학사와 지밀직사사 판도판서 문한학사 승지 등을 거쳐 밀직사에 올랐다.

본관은 천안(天安)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우정승을 지낸 전인량(全仁亮)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297년(충렬왕 23) 우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한 후 인사행정을 담당해오던 정방(政房)을 폐지하여 한림원(翰林院)에 합치는 등 전면적인 관제개혁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전승도 승지로서 개혁에 참여하였다.

이후 좌부승지 판비서시사 보문각직학사(左副承旨判祕書寺事寶文閣直學士)를 거쳐 1300년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다시 지밀직사사 판도판서 문한학사 승지를 거쳐 1302년 밀직사에 올랐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승 [全昇] (두산백과)

 

◎ 전신 [ 全信 ]

요약

고려 후기의 관인이다. 충렬왕·충숙왕·충혜왕의 3대의 왕을 섬기며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청렴하여 가난을 면치 못했으나 학문을 즐겨 당대의 성리학자들과 깊은 교분을 쌓았다.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자는 이립(而立)이고, 호는 백헌(栢軒),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밀직사를 지낸 승(昇)의 아들이다. 음서로 벼슬에 나아가 내의직장(內衣直長)에 임명되었으며, 1301년(충렬왕 27)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숭경부승(崇慶府丞)·정방관(政房官)·비서량·국학직강(國學直講)·안동부판관 등을 역임하고, 충숙왕 때는 전의부령(典儀府令)·김해부사·사헌장령·선부의랑(選部議郎)·보문각제학·계림부윤·복주목사((福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충혜왕 때는 감찰대부 진현관대제학 상호군(監察大夫進賢館大提學上護軍) 등을 거쳐 동지밀직사사 상의회의도감사(同知密直司事商議會議都監事)에 올랐다. 3대의 왕을 섬기며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청렴하여 언제나 집이 가난하였다. 또한 학문을 즐겨 당대의 성리학자인 백이정(白頤正)·이제현(李齊賢) 등과 깊은 교분을 쌓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신 [全信] (두산백과)

 

◎ 정몽주 [ 鄭夢周 ]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 [鄭夢周] (두산백과)

 

◎ 이색 [ 李穡 ]

고려 말의 문신·학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정방 폐지, 3년상을 제도화하고, 김구용·정몽주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우왕의 사부였다. 위화도 회군 후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를 억제하려 했다. 조선 태조가 한산백에 책봉했으나 사양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색 [李穡] (두산백과)

 

◎ 이황 [ 李滉 ]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로 주자의 사상을 깊게 연구하여 조선 성리학 발달의 기초를 형성했으며, 이(理)의 능동성을 강조하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하였다. 주리론(主理論) 전통의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로 숭앙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황 [李滉] (두산백과)

 

◎ 김득배 [ 金得培 ]

고려 말기의 문신. 강릉대군(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고 홍건적 침입으로 의주·정주·인주 등이 함락되자 이를 방어했다. 서경을 탈환하여 적을 압록강 밖으로 격퇴했으며 홍건적이 다시 침입하자 개경을 수복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득배 [金得培] (두산백과)

 

◎ 이제현 [ 李齊賢 ]

정의

고려후기 정당문학, 판삼사사, 정승 등을 역임한 관리. 학자, 문인, 문신.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이지공(李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후예로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이진(李瑱)이다. 아버지 이진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비로소 가문의 이름이 높아졌다. 그의 딸은 공민왕과 혼인하여 1359년(공민 8) 4월 혜비(惠妃)에 봉해졌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제현 [李齊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구용 [ 金九容]

고려 말기의 학자. 정몽주·박상충·이숭인 등과 성리학을 일으켰고, 척불숭유의 선봉이었다. 사장(詞章)을 잘하였으며,《동문선》에 8편의 시가 전한다. 저서에《척약재문집》,《선수집》,《주관육익》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구용 [金九容] (두산백과)

 

◎ 신돈 [辛旽]

고려 공민왕 때 국정자문을 맡아 개혁정책을 펼친 고려 말기의 승려. 자는 요공, 법호는 청한거사, 승명은 편조로 공민왕 7년 왕의 측근인 김원명의 소개로 공민왕을 처음 만나 궁중에 드나들기 시작했으나 이승경의 비난을 받았으며, 정세운으로부터 죽음의 위협도 받았다. 공민왕의 신뢰를 받으며 많은 권력을 가지고 최영 등 무장세력을 비롯해 이인복, 이구수 등 많은 권문세족을 물러나게 했다. 1369년 국내외 정세가 불리해지자 큰 타격을 받았으며, 집권 말기에 처첩을 거느려 자식을 낳고 주색에 빠지자 비난이 높아졌다. 태후와 사이가 좋지 않아 태후와 연결된 권문세족의 공격을 받아 반역의 혐의로 수원으로 유배됐다가 그곳에서 처형됐다.

 

◎ 이이첨 [ 李爾瞻 ]

조선 중기의 문신. 선조 때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이 적합함을 주장했다. 광해군 즉위 후 조정에서 소북파를 숙청했다.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시켰다. 폐모론을 주장,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인조반정 뒤 참형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이첨 [李爾瞻] (두산백과)신돈

 

◎ 모문룡

1621년 후금의 요동 공격으로 인해 조선으로 도망쳐온 모문룡은 후금의 배후에서 싸운다는 명분으로 1629년까지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머무르며 1627년 정묘호란 발발의 원인이 되었다. 자는 진남(鎭南)이며, 산시성 태평(현 샹펀 현) 사람이다.

 

◎ 균시(均是) ; 똑같이

 

◎ 기복 [ 期服•朞服 ]

사람이 죽었을 때 1년 동안 입는 상복(喪服). 기복에는 장기(杖朞)와 부장기(不杖朞)가 있으며, 조부모•자(子)•장자처(長子妻)•적손(嫡孫)•형제자매•백숙부모•숙부•고모•조카•처 등 2촌 또는 3촌 친척이 죽었을 때 입었음. 그리고 결혼한 여자는 친정 부모가 죽었을 경우, 아버지가 살아 있고 어머니가 죽었을 경우 기복을 입었음. [유사어] 기년복(朞年服). [참고어] 오복(五服).

[네이버 지식백과] 기복 [期服•朞服]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소공 [ 小功 ]

소공에는 5개월간 상복을 입는데 이때의 상복을 소공복(小功服)이라 하고, 소공복을 입는 친족의 범위를 소공친이라고 한다.

소공친은 할아버지 형제의 내외(증조부·종조부·종조모), 아버지의 사촌형제 내외(종숙부·종숙모), 6촌형제(재종형제), 4촌형제의 아들(종질), 형제의 손자(종손) 등과, 외가로 외할아버지·외할머니·외아저씨(외삼촌)·이모 등이 해당된다. 시집간 여자의 경우는 남편의 형제, 남편형제의 손자, 남편 사촌형제의 아들, 남편형제의 부인(동서) 등이 소공복친의 범위에 든다.

그런데 소공복을 5개월간 입는 것은 원칙적인 규정이고, 실제로는 경제적 이유나 일상 생활조건에 따라 줄여지기도 했다. 상복을 입는 기간이 줄어지는 것을 강복(降服)이라고 하는데, 가령 소공이면 한 등급 낮은 시마(媤麻)에 해당하는 기간과 복장을 하게 된다. 시마는 3개월간 상복을 입는 것이며 시마복도 소공복과는 다른 모양으로 짓는다.

소공복을 짓는 재료는 숙포(熟布)로서 대공복보다는 가는 베를 사용하는데, 김장생(金長生)의 『가례집람(家禮輯覽)』에는 11새[升]로 규정되어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공 [小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대공[大功]

정의

상례喪禮의 오복제도五服制度에서 사촌 형제자매를 위해 상제가 입는 복服.

내용

상복喪服은 사망한 지 4일째 되는 날 죽은 사람에 대한 유복자들의 친소원근親疏遠近과 존비尊卑의 신분에 의거하여 참최斬衰, 재최齋衰(자최齊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緦麻의 오복五服을 착용한다. 대공大功의 복상 기간은 9달이다. 정복正服은 종부從父의 형제자매를 위하여 입고, 중손衆孫 남녀를 위하여 입는다. 남자의 대공복大功服은 관冠・의衣・상裳・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리履 등으로 구성되며, 여자의 것은 소素족두리 또는 개두蓋頭・대수장군大袖長裙・전계箭笄(비녀)・수질首絰・요질腰絰・교대絞帶・리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공복은 재최복齊衰服보다 조금 더 가늘고 소공복小功服보다는 좀 더 거친 숙포, 즉 초추숙포稍麤熟布(표백한 베)를 사용하여 상복을 만드는데, 대공복을 만드는 베를 대공포大功布라고 한다. 관은 재최관과 동일한 형태이며 재료의 승수에 차이가 있다. 머리에 얹는 수질首絰의 둘레는 5촌 남짓, 허리에 두르는 요질腰絰의 둘레는 4촌 남짓, 교대絞帶의 둘레는 자최복의 요질보다 좁다. 질絰은 재최와 같이 시마枲麻(씨 없는 삼)로 만들고, 대帶는 베[布]로 만든다. 리履로 승구繩屨(짚신)를 신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공 (한국일생의례사전)

 

◎ 단문[ 袒免 ]

상복(喪服)의 하나. 단(袒)은 몸에 장식을 없애는 것이며, 문(免)은 사각건. 관(冠)은 지극히 존귀하여 육단(肉袒)의 차림에는 맞지 않으므로 문(免)으로 대신하였으며, 면(免)은 면(冕)과 음(音)이 같아 잘 구별이 되지 않아 문으로 음을 바꾸었음. 단문은 왼쪽 어깨를 벗으며, 머리를 풀어헤치고 사각건을 쓰는 것으로 오세 이상친(五世以上親)은 복(服)이 없이 단문만 함.

[네이버 지식백과] 단문 [袒免] (한국고전용어사전, 2001. 3. 30.,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屢經

자주[여러 번]…하다.

 

◎ 병선[ 兵燹 ]

전쟁이나 내란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화재로, 전쟁의 상태나 그 뒤의 파괴된 상황을 비유하기도 함. [유사어] 병액(兵厄). 화병(火兵).

 

◎ 酬唱 (수창)

시가(詩歌)를 서로 불러 주고 받음

 

◎ 奏蠲(주견)

감면해 주기를 아뢴다.

 

◎ 창의 倡義

국란(國亂)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

 

◎ 左揆 좌규

(→左議政(좌의정))

 

◎ 勝朝 (승조)

바로 전대의 왕조(王朝)

 

◎ 卜居 (복거)

살 만한 곳을 가려서 정(定)함

 

◎ 草亭 (초정)

풀로 지붕을 한 정자(亭子)

 

◎ 옥서[ 玉署 ]

홍문관(弘文館)의 다른 이름.

 

◎ 홍문관[ 弘文館 ]

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 ·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 論劾 (논핵)

죄과(罪過)나 허물을 분석(分析)하여 탄핵(彈劾)함

 

◎ 논척 (論斥)

옳고 그름을 따져 물리침.

 

◎ 天朝 (천조)

천자(天子)의 조정(朝廷)을 제후(諸侯)의 나라에서 일컫는 말

 

◎ 布衣 (포의)

1 벼슬이 없는 선비. 백의(白衣). 백포(白布)

2 베옷

 

◎ 龍蛇之變 (용사지변)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달리 이르는 말. 龍蛇之亂.

 

◎ 소대 (召對)

임금의 부름에 응함. 왕명으로 입대(入對)하여 정사에 관한 의견을 상주함. [참고어] 독대(獨對). 윤대(輪對).

 

◎ 詳密 (상밀)

빈틈없이 속속들이 세밀(細密)함

 

◎ 燀爀 천혁

환하게 빛남.

 

◎ 외훈 (巍勳)

1. 우뚝하게 뛰어난 공훈.

 

◎ 無稽 무계

참고어

無據(무거)

 

◎ 闕疑(궐의)

의심스러운 것을 비워두다.

• 闕(궐): '비다'라는 뜻의 형용사가 '비우다'라는 뜻의 사역동사로 전용된 것.

 

◎ 경기[ 經紀 ]

경륜기리(經綸紀理)의 준말. 계획을 잘 세워 다스린다는 뜻으로, 계획•대책•방도 등의 의미를 가짐. [유사어] 강기(綱紀).

 

◎ 鳩財 (구재)

재물(財物)을 거두어 모음

 

◎ 교수 (校讎)

매체 두 종류 이상의 이본(異本)을 대조하여 틀린 데를 고침.

 

◎ 직첩 (職牒)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아치의 임명장.

 

◎ 녹권 (錄券)

공신의 훈공(勳功)을 새긴, 쇠로 만든 패.

 

◎ 鋟梓 침재

인쇄(印刷)할 목적(目的)으로 나무 판에 글자를 새김.

 

◎ 弁文 변문

서문(序文)

 

◎ 입언立言

후세에 전할 만한 모범되는 말과 글. 그 사람은 죽어도 없어지지 않고 남게 되는 세 가지 중의 하나임.

 

◎ 좌빈객 [ 左賓客 ]

시대/조선(朝鮮)

분류/관직>동반>문관

조선시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정이품(正二品) 문관(文官)으로 정원은 1원이다. 우빈객(右賓客: 正二品)과 함께 이사(貳師: 從一品)의 다음이고, 좌·우부빈객(左右副賓客: 從二品)의 위이다.

1395년(태조 4) 5월에 설치된 세자관속(世子官屬)은 뒤에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과 호위를 담당하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로 분리되었다.

세자시강원은 조선시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 하였던 관청으로 왕세자를 모시고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을 강의하며 도의를 가르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사(師: 正一品)·부(傅: 正一品)·이사(貳師: 從一品)·빈객·부빈객 모두 타관이 겸직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세자시강원이 왕태자궁(王太子宮)으로 바뀌면서 좌빈객이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좌빈객 [左賓客] (관직명사전, 2011. 1. 7., 한국학중앙연구원)

 

 

① 著姓

: 李·金·朴·鄭·尹·崔·柳·洪·申·權·趙·韓(12개 성).

② 그 다음 著姓

: 吳·姜·沈·安·許·閔·任·南·徐·具·成·宋·兪·元·黃·張(16개 성).

③ 그 다음 다음 著姓

: 曺·林·呂·梁·禹·羅·孫·盧·漁·睦·蔡·辛·丁·裵·孟·郭· 卞·邊·愼·慶·白·全·康·嚴·高(25개 성).

④ 稀姓

: 田·玄·文·尙·河·蘇·池·奇·陳·庾·琴·吉·延·朱·周·廉·潘·房·方·孔·王·劉·秦·卓·咸·楊·奉·太·馬·表·殷·余·卜·芮·牟·魯·玉·丘·宣(41개 성).

⑤ 그 다음 희성

: 都·蔣·陸·魏·車·那·韋·唐·仇·邕·明·莊·葉·皮·甘·鞠·承·公·石(19개 성).

⑥ 僻姓

: 印·昔·杜·智·甄·於·普·伍·拓·夜·賓·門·于·秋·桓·胡·雙·伊·榮· 恩·邵·貢·史·異·陶·龐·溫·陰·龍·諸·夫·景·强·扈·錢·桂·簡(38개 성).

⑦ 貴姓

: 段·彭·千·片·葛·頓·乃·間·路·平·馮·翁·董·宗·馮·鍾·江·家·童·陽· 章·桑·程·荊·耿·敬·密·京·筍·井·原·遠·萬·班·員·堅·騫·燕·時·傳·瞿·米·艾·梅·雷·紫·包·何·和·賀·花·華·賈·夏·麻·牛·僧·侯·曲·柏·翟·畢·谷·弓·種·邦·凉·良·芳·卿·刑·永·秉·登·昇·勝·信·順·俊·藩·端·鮮·芋·牙·水·彌·吾·珠·斧·甫·部·素·附·凡·固·台·才·對·標·肖·那·瓜·化·壽·祐·價·尋·森·占·汎·克·郁·翌·宅·直·側·澤·綠·赫·冊·濯·骨·燭·律·物·別·實·弼·合·思·范(136개 성).

⑧ 複姓

: 南宮·鮮于·皇甫·石抹·扶餘·獨孤·令孤·東方·西門·司馬·司空(11개 성).

 

◎ 다루왕 [ 多婁王 ]

백제의 제2대 왕(재위 28∼77).

 

◎ 均 고를 균, 운 운, 따를 연

1.(고를 균)

a.고르다

b.평평하다(平平--)

c.가지런히 하다, 조절하다(調節--)

d.비교하다(比較--), 따지다

e.(밭을)갈다, 김매다(논밭의 잡풀을 뽑아내다)

f.널리, 빠짐없이

g.두루, 모두, 죄다

h.녹로대(轆轤臺: 돌림판. 도자기를 만들 때 사용하는 기구)

i.조율기(調律器)

j.악기(樂器)의 이름

k.검은 옷, 군복(軍服)

 

◎ 是 이 시/옳을 시

1.이, 이것

2.여기

3.무릇

4.이에(접속사)

5.옳다, 바르다

6.바르게 하다

7.옳다고 인정하다(認定--)

8.바로잡다

9.다스리다

 

◎ 誠 정성 성

1.정성(精誠) 2.진실(眞實) 3.참

 

 

◎ 諸 모두 제, 김치 저/어조사 저

1.(모두 제)

a.모두

b.모든

c.무릇

d.여러

e.딴, 기타의

f.만약(萬若) ~한다면

g.이, 저(대명사)

h.지차(之次: 맏이 이외의 자식들)

i.말을 잘하다

2.(김치 저/어조사 저)

a.김치(소금에 절인 배추나 무 따위를 양념에 버무린 뒤 발효를 시킨 음식)

b.장아찌

c.절임

d.두꺼비(두꺼빗과의 양서류)

e.~에, ~에서(어조사)

 

 

◎ 踈 트일 소

1. 트이다 2. 틀다 3. 나누이다 4. 나누다 5. 멀다 6. 멀리하다 7. 멀어지다 8. 드물다 9. 거칠다 10. 길다 11. 새기다 12. 그리다 13. 치우다 14. 깔다

 

◎ 袒 웃통 벗을 단, 터질 탄

1. 웃통을 벗다 2. 소매를 걷어 올리다 3. 어깨를 드러내다 4. 옷 솔기가 타지다 5. 옷이 해어지다 6. 가세하다(加勢--) 7. 편들다 8. 열다 a. (옷이)터지다 (탄) b. 피다 (탄) c. 봉오리가 벌다

 

◎ 免 면할 면, 해산할 문

1.(면할 면)

a.면하다(免--), 벗어나다

b.용서(容恕)하여 놓아주다

c.허가하다(許可--)

d.(옷을)벗다

e.해직하다(解職--)

f.내치다

g.힘쓰다, 노력하다(努力--)

2.(해산할 문)

a.해산하다(解産--), 아이를 낳다

b.관을 벗고 머리를 묶다

c.상복(上服: 윗옷. 위에 입는 옷)

d.신선(新鮮)한 것

 

◎ 苟 진실로 구/구차할 구

1.진실로(眞實-), 참으로

2.다만, 단지(但只)

3.겨우, 간신히

4.만약(萬若)

5.구차하게(苟且--)

6.바라건대

7.잠시(暫時)

8.구차하다(苟且--), 구차(苟且)하게 굴다

9.미봉하다(彌縫--: 일의 빈 구석이나 잘못된 것을 임시변통으로 이리저리 주선하여 꾸며 대다)

10.낮다

11.탐하다(貪--), 탐내다(貪--)

 

◎ 燹 야화 희, 야화 선

1.(야화 희) 2.야화(野火: 들불) 3.난리(亂離)로 일어난 불

 

◎ 逸 편안할 일/달아날 일

1.편안하다(便安--) 2.없어지다 3.잃다

 

◎ 蠲 밝을 견

1.밝다 2.조촐하다 3.덜다

 

◎ 繭 고치 견

1.고치(벌레가 실을 내어 지은 집) 2.누에고치 3.실

 

◎ 揆 헤아릴 규

1.헤아리다, 가늠하다 2.관장하다(管掌--), 관리하다(管理--) 3.멸망시키다(滅亡---)

 

◎ 謚 웃을 익, 시호 시

1.(웃을 익) 2.웃다 3.웃는 모양

 

◎ 虬 규룡 규, 규룡 구

1.(규룡 규) 2.규룡(虯龍: 양쪽 뿔이 있는 새끼 용) 3. 뿔 없는 용

 

◎ 詡 자랑할 후, 자랑할 허

1.(자랑할 후) 2.자랑하다 3.두루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 搆 얽을 구/이해 못 할 구

1.얽다 2.(집을)짓다 3.이루어지다

 

◎ 遭 만날 조

1.(우연히)만나다 2.(나쁜 일을)당하다(當--) 3.두르다

 

◎ 燀 밥 지을 천

1.밥을 짓다 2.밥 지을 불을 때다 3.성(盛)하게 하다

 

◎ 徵 징,치

1.(부를 징)

a.부르다

b.징집하다(徵集--)

c.소집하다(召集--)

d.구하다(求--), 모집하다(募集--)

e.거두다, 징수하다(徵收--)

f.징계하다(懲戒--)

g.밝히다

h.증명하다(證明--), 검증하다(檢證--)

i.이루다

j.조짐(兆朕), 징조(徵兆)

k.현상(現狀)

l.효험(效驗)

2.(음률 이름 치)

a.음률(音律)의 이름

 

◎ 付 줄 부

1.주다, 수여하다(授與--) 2.맡기다, 부탁하다(付託--) 3.의지하다(依支--)

 

◎ 闕 대궐 궐

1.대궐(大闕)

2.대궐문(大闕門)

3.조정(朝廷)

4.흠

5.궐하다(闕--: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빠뜨리다)

6.이지러지다(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없어지다)

7.이지러뜨리다(이지러지게 하다)

8.파다

9.뚫다

 

◎ 校 학교 교

1.학교(學校)

2.장교(將校)

3.부대(部隊), 군영(軍營)

4.울타리, 바자울(바자로 만든 울타리)

5.차꼬(죄수를 가두어 둘 때 쓰던 형구(刑具)), 형구(刑具)의 총칭(總稱)

6.(기물의)다리

7.헤아리다, 따져보다

8.(수를)세다

9.가르치다, 교습하다(敎習--)

10.본받다, 모방하다(模倣ㆍ摸倣ㆍ摹倣--)

11.비교하다(比較--), 견주어 보다

12.조사하다(調査--), 심사하다(審査--)

13.교정하다(校正--), 바로잡다

14.갚다, 보복하다(報復--)

15.빠르다, 신속하다(迅速--)

 

◎ 讐 원수 수

1.원수(怨讐)

2.동류(同類)

3.대답하다(對答--)

4.갚다

5.맞다

6.바로잡다

7.합당하다(合當--)

8.자주

9.빈번히

 

◎ 鋟 새길 침, 첨예할 첨

1.(새길 침)

a.새기다

b.조각하다(彫刻ㆍ雕刻--)

c.판각하다(板刻--)

2.(첨예할 첨)

a.첨예하다(尖銳--)

b.날카롭다

c.송곳

 

◎ 梓 가래나무 재, 가래나무 자

1.(가래나무 재)

a.가래나무(가래나뭇과의 낙엽 활엽 교목)

b.목수(木手), 목공(木工)

c.나무 그릇

d.판목(板木)

e.관(棺), 널

f.고향(故鄕)

2.(가래나무 자)

a.가래나무(가래나뭇과의 낙엽 활엽 교목)

b.목수(木手), 목공(木工)

c.나무 그릇

d.판목(板木)

e.관(棺), 널

f.고향(故鄕)

 

◎ 褁 자루 척, 쌀 과

1.(자루 척)

a.자루(헝겊 따위로 길고 크게 만든 주머니)

b.주머니

2.(쌀 과)

a.싸다, 포장하다(包裝--: 물건을 싸거나 꾸리다)

b.얽다

 

◎ 撮 모을 촬/사진 찍을 촬, 수레 이름 찬, 상투 최, 거머쥘 채

1.(모을 촬/사진 찍을 촬) 2.모으다, 취합하다(聚合--) 3.(사진을)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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