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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산의 맛
작성자 관리자 [2026-07-26 22:3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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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1회 수필 공모 당선작

                     산의 맛

                                       김경숙

 

 

 


 

 

 

불암산 산행계획을 세웠다. 불암산은 흙보다 회색 바위가 먼저 그려지는 산이다. 나는 이 산처럼 소소한 바위산을 . 좋아한다. 5~6년 전에 생활 릿지 산악회에 가입했었다. 가파른 바위가 많은 암릉, 매끄러운 넓은 바위를 타는 슬랩, 그리고 전망이 살아 있는 북한산, 수락산, 운악산 등을 거의 주말 마다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하산길에 무릎이 시큰거리기 시작하면서 등산을 그만두게 되었다.

신발장을 열어 먼지가 뽀얗게 앉은 등산화를 꺼냈다. 작은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다. 부푼 마음을 가다듬으며 서울지하철 4호선 별내별가람역에 내렸다. 나는 얇은 천 장갑을 가져왔는데 사람들은 두꺼운 겨울 장갑을 끼고 있었다. 산행에 필요한 기본적인 복장마저 그새 잊어버린 것이었다. 급히 근처 다이소를 찾았다. 난간과 바위를 잡기 위해 그립감 있는 장갑을 골랐다.


주택가를 지나 불암산 초입 숲길로 들어섰다. 겨울철 메마른 흙길은 신발이 닿는 곳마다 퍼술퍼술한 흙먼지를 벨어냈다. 나뭇가지들은 허기진 허연 살을 생기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추위를 버티러 옆의 가지를 끌어안아 버린듯 엉켜버린 잔가지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보였다. 진기가 빠진 마른 낙엽들은 사락사락 밟힐 때마다 온기를 전해주었다. 숲길을 벗어나 바윗길로 들어서자 햇볕이 정면으로 얼굴을 때렸다.

불암산 암릉 구간은 험하지만 짧다. 아마추어에겐 안성맞춤인 코스다. 나는 산허리를 도는 지루한 흙산보다 직선으로 빠르게 정상에 오를 수 있는 바위산을 선호한다. 애기봉은 올라가지 않고 지나쳤다. 형클어진 머릿결 같은 건조한 나무들 사이를 걷다 보니, 바위가 시작되는 치마 슬랩 구간에 가까워졌다. 기존에 낡은 난간 뒤로 양쪽에 반짝거리는 새 난간이 보였다. 그 사이에 초록색 물체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다가가 상황을 확인한 나는 당황했다.

 

새로운 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위 옆구리에 일일이 구멍을 뚫어 호치키스를 박아놓은 모양으로 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이 계단은 정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웅장했던 바위 몸은 이미 상처를 입었다. 나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물론 덕분에 이제는 누구의 도움 없이도 암릉을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손쉽게 불암산 바위 맛을 알 수 있으니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인공시설이 낯설고 아쉬웠다

 

사실 나는 거대한 바위 면적의 광활함과 접지할 때 느껴지는 꺼끌꺼끌한 마찰력을 좋아한다. 깎아지른 바위 위에 우뚝 서 있을 때, 모든 신경은 발끝과 몸의 중심에 모아졌다. 두려움이 심장을 치며 졸깃해졌다. 그 매력에 한동안 푹 빠져 지냈었는데... 양쪽 난간을 잡고 발판에 한쪽 발을 올렸다. 중간이 병 뚫려 있어 위험해 보였다. 투덜거리며 새로 생긴 전망대까지 올라섰다. 탁 트인 시야 너머로 한강까지 보였다. 조금 전 지나쳤던 애기봉이 저 아래로 내려다보였다.

불암산은 세 구간으로 나뉜다. 첫 구간은 쉬엄쉬엄 오를 수 있는 치마 슬랩이다. 두 번째 구간은 '해당 구간은 경사 30도 이상의 암반으로 이뤄진 상급자 코스로 산행 경험이 많지 않은 분들은 다른 곳으로 U턴하시길 바랍니다'라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다. 불암산의 백미는 바로 이 구간부터다. 사람들은 이곳을 파도 바위라 부른다. 위에서 누군가 밧줄을 내려 주지 않으면 오르기 힘들 정도로 경사가 심했다. 

 

공사 이전에는 '불암산 바위를 타러 간다'라는 말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호치키스 사다리를 타러간다'라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계단을 비껴 도둑 발처럼 바위를 조심스레 밟았다. 오랜만에 발끝으로 전해지는 접지의 맛은 달콤했다. 코스 중간마다 옛 추억이 꼼꼼히 숨어 있었다.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강물에 흔들리는 낚싯대의 손맛에 중독된다고 한다. 나는 바위의 발 맛에 마음을 빼앗겼다. 묵직하고 단단한 바위가 껄끄러운 등을 내주면 신발 밑창에 걸리는 미끄러움과 껄끄러움을 온몸의 감각으로 읽어냈다. 뻐근해진 허벅지와 발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청아한 하늘 아래서 구슬한 땀이 머리에서 이마로 흘러내릴 때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바람 같은 나그네 바람이 성글게 엮인 생각들과 산란했던 마음을 슬쩍 훔쳐 갔다. 바위 끝에 걸린 하늘로 오르다 보면 구름처럼 자유로워졌다. 중력을 벗어나 시선을 멀리 둘 때 저절로 힐링이 되었다.

 

영원할 것 같은 나라는 존재는 잠시 사라졌다. 그 순간만큼은 존재에서 텅 빔으로 자유로웠다. 산등성이 사이로 아파트와 논밭이 드러나며 시야가 넓어졌다. 서울과 경기를 가르는 경계도 흐려졌다. 조경으로 다듬은 듯 멋진 소나무가 만들어준 그늘에 자리를 잡았다. 김밥과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인 뒤 흙길 능선을 올랐다. 정상까지는 0.4km 남아있었다.

 

드디어 기름 바위 앞에 섰다. 손 닿을 곳이 없어 밧줄 없이는 오를 수 없는 코스다. 한 발 디디면 그대로 미끄러지는 바위를 차지한 무례한 호치키스가 당당해 보였다. 경사도 90도에 가까운 구부러진 바위틈 사이도 사다리 덕분에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 위험한 바위에 기댈 밧줄도 없이 아찔하게 서 있는 나, 찬바람에 묻어 온 추억의 바위 냄새, 사방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전경 그리고 그리움을 품은 내 마음이 한데 엉켜 있었다.

 

마침내 암릉 구간을 모두 오르고 바위 끝에 섰다. 그전에는 없던 들마루와 벤치가 새로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은 최고였다. 안 온 사람은 있어도 한 번 온 이상, 두 번은 반드시 온다는 말이 실감 났다. 잠시 전경에 취해 상념에 잠겼다. 당나라 시대 선승인 혜능慧能 선사가 남긴 시구가 떠올랐다.

보리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가 아니네 /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 

어디에 먼지가 붙겠는가 

바위 중턱에는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넓은 자리를 차지하듯 산만하게 가지를 뻗고 있었다. 불암산 정상석 위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잠시 정상 조망에 미련을 두고 서울과 경기의 경계를 다시 그어본다. 오른쪽은 수락산, 저쪽은 구리시, 상계동은 그 너머, 손가락은 허공에서 땅 따먹기 하고 있었다.